68.
눈을 한 번 길게 깜빡이고 나니, 눈앞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삭막하고 텅 빈 회색조의 건물 내부에서, 길게 펼쳐진 해안선으로.
철썩, 하고 파도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다를 바라보았다.
가능한 한 멀리 이동하라고 부탁하기는 했지만… 설마 어딘지도 모르는 바다로 데려올 줄이야.
바다는 노을 색으로 젖어 있었다. 시간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벌써 해가 저무는 시간대였나 보다.
멍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래사장에는 사람 한 명조차 보이지 않았다. 원래 인기척이 드문 곳인 걸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짝 긴장한 상태였는데, 노을에 젖은 바다를 보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쩐지 맥이 탁 풀린 것처럼 마음이 평온해졌다. 정원은 한숨을 푹 쉬며 모래사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긴 어딘가요? 꽤 멀리 온 것 같은데.”
“…….”
석주는 대답이 없었다. 정원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가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선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봤을 때부터 뭔가 이상한 상태라고는 생각했지만… 역시 무리한 걸까.
그 정도 가이딩으로는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 석주가 묶여 있던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느꼈다. 그에게서는 평소의 절반, 아니 반의 반, 반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미약한 기운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능력 면에서 무슨 짓을 당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순간 무언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석주의 이런 비슷한 모습을 전에도 본 적이 있다, 는 기시감. 그의 능력을 다시 끌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이딩이 필요할 것 같다는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감정을 못 이기고 주먹을 날리는 척하며 가이딩을 시도했다. 다행히 전무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멀찍이서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한 덕분에 이렇게 성공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생각이기는 했지만 확신은 없었는데, 그 상황에 석주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어서 다행이었다.
가이딩을 통해 일시적으로 다시 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지금 석주는 굉장히 불안정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정원은 한숨을 푹 쉰 뒤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이리 와서 앉아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길래 설마 들리지도 않는 상태인가 걱정했는데, 석주는 의외로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줄 달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흐물흐물 다가와 앉는 모습을 보니 이게 정말로 그 강석주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쨌거나 지금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정원은 석주의 손목을 끌어다 쥔 뒤 기운을 불어넣듯 가이딩을 시작했다. 한순간에 몸에서 힘이 쭉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정도 석주의 기운이 안정될 때까지 가이딩을 한 뒤, 여유가 조금 생긴 상태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더니.”
이런 꼴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석주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렇게나 기운이 빠진 상태인 건지, 혹은 정신적으로 맥이 풀린 상태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 설명해 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무작정 그를 끌고 오기는 했다. 나름대로 이성적으로 생각한 결과였지만, 순간의 감을 믿고 한 행동이기도 했다. 사장의 말을 듣는 순간에는 정말로 석주를 향한 원망이 끓어오르기도 했다. 어쩌면 정말로 그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국가기관과 같은 목적으로 자신을 농락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몇 차례 보여줬던, 자신을 향한 석주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눈빛을 떠올리고. 겨우겨우 마음을 다잡은 결과가 이것이었다.
사장이 생각보다 허술하게 당해 줘서 가능한 일이었기는 해도 어쨌든 그 고생 끝에 여기까지 무사히 데려왔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석주의 모습을 보니 답답함이 끓어올랐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거면?’
형을 두고 온 게 잘못된 선택이었으면? 자신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사장이 형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하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사장에게도 자신보다는 형 쪽이 훨씬 가치 있는 말일 테니까.
“뭐라고 말 좀 해봐.”
그러나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답답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닦달하자 석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정원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눈에 미묘하게 희망적인 기색이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기억났어?”
석주가 물었다. 이제까지 고수했던 존댓말은 어디로 가고, 어린애가 보채는 것 같은 반말이 튀어나왔다.
‘설마 내가 반말했다고 자기도 말을 놓는 건가…….’
묘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석주가 다시 채근하듯 물었다.
“아니면 뭔가 알게 됐어?”
왜 이렇게 절박한 목소리로 묻는 걸까? 자신이 답답함에 던진 반말이 촉매라도 된 건가. 석주는 대답하지 않는 정원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온 탓에 시야가 온통 강석주로 채워졌다.
“왜 날……. 데리러 왔어?”
“…….”
“날 욕하러 온 거 아니었나……. 한 대 치겠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걸 듣고 있었……. 아니, 그보다 왜 계속 반말이에요.”
사장을 속이기 위해 용을 쓰던 광경을 석주가 다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당황스러웠다. 하긴 그걸 직접 들었다면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지금 석주의 말투는 별개의 문제였다. 가뜩이나 그의 반응 때문에 괜한 짓을 했나 싶어 마음이 복잡한데,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말을 찍찍 까는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꽁해진 것이었다.
원래대로 돌아간 정원의 말투에 석주의 표정이 갑자기 멍하게 변했다.
“아…….”
살짝 당황한 듯 탄성을 흘린 석주가 곧 표정을 바로잡았다. 평소처럼 빠릿빠릿한 얼굴로 돌아온 걸 보니 방금 전까지는 좀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고, 지금 겨우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가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생각난 줄 알았는데.”
“그냥 열받아서 말 좀 깐 거지, 딱히 다른 뜻은 없었어요.”
정원이 삐딱하게 뱉은 말에 석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을 흐렸다.
“그렇구나…….”
…역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것 같다.
넋이 빠진 건지 뭔지. 석주의 상태가 어떻든 들을 건 들어야겠지만, 저런 상태로는 제대로 설명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일단 석주가 물은 말에 먼저 대답을 해 주어야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한 대 패 버리겠다고 했던 말은 그냥 한 소리예요. 내가 강석주 씨한테 적개심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해야 만나게 해 주든 말든 할 테니까……. 사장도 당신도 믿은 걸 보면 연기가 꽤 괜찮았던 모양이네요.”
“날 믿었어요?”
“뭐… 믿지 말았어야 했나요? 속인 거였어요?”
“아니!”
석주의 평소답지 않게 가라앉은 모습을 보며, 짐짓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러자 이어진 반응은 생각보다 더 격렬했다. 고개를 치켜들며 아니라고 크게 부정한 뒤, 얼굴까지 가까이 내밀며 급하게 고개를 저은 것이다.
“그럴 리가……. 그런 걸 속였을 리가 없잖아요.”
한숨을 푹 쉰 그가 곧 한 손으로 제 눈가를 짚는 것이 보였다.
“몰랐어요. 정원 씨 형이 거기 있다는 건. 믿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저도 관장님이 알려준 만큼만 알고 있는 입장이라…….”
“믿기 힘들 건 또 뭔가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석주의 말을 끊고 받아쳤다. 그는 놀란 듯,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은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지 모르겠는데……. 상식적으로 그 인간 말을 믿는 게 말이 되나? 아니, 기관이 날 속인 건 속인 거고, 그 인간이 우리 부모님을 죽인 건 죽인 건데. 그런 사람 말을 어떻게 믿어요.”
석주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런 얼굴은 또 처음 보는 것 같다. 항상 뭐든지 다 알고 있는 척, 여유 있는 척을 그렇게 해 놓고. 이런 때 보면 또 세상 물정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다.
어느 쪽이 더 실제 모습에 가까운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정원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거기다 형까지 납치해서 여태까지 데리고 다녔다는 건데, 더 최악이죠.”
“…정원 씨 형은 만나 봤어요?”
짐짓 모른 체 묻자 정원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합류하자던 형의 말이 떠올랐다. 형의 말대로 테프트에 남았더라면, 당장 형의 옆에 있을 수는 있었겠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원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나한테 사장 밑으로 들어오란 식으로 말했어요. 협박당했거나, 아니면 세뇌를 당한 거겠죠.”
석주는 오묘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는 건가.
“말해 줬으니까 이제 대답하죠? 우선 여기가 어딘지부터.”
이번에는 바로 대답이 나왔다.
“무인도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