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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69화 (69/126)

69.

“무인도…….”

정원은 복잡한 목소리로 석주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도착했을 때부터 느낀 기묘한 한적함의 이유가 그것이었나 보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묘하게 맥이 풀렸다. 그래서 정원은 평소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을 했다. 탁 트인 모래사장에 그대로 드러누워 버린 것이다.

여기저기 닿는 모래의 감촉이 까끌까끌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석주는 조금 놀란 듯한 눈으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정원은 그를 향해 아주 약간만 고개를 틀고 물었다.

“그래서요? 다음은요.”

석주는 여전히 말없이 정원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보나마나 ‘다음은 뭐요?’ 같은 말을 하려는 거겠지. 정원은 알아서 덧붙였다.

“사장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그런 것들 있잖아요.”

“말했지만, 정원 씨 형에 관한 건 몰랐어요.”

그는 의외로 선선히 입을 열어 대꾸했다. 그 부분은 이미 들은 것이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석주는 정원에게서 느릿느릿 눈을 돌렸다.

“애초에 이번 작전에 참여하라고 하면서 관장님이 설명해 줬던 것도 그것밖에 없었어요. 테프트의 동향이 수상하다는 거하고, 정원 씨가 같이 참여한다는 거.”

차분한 목소리였다. 처음부터 그가 하는 말을 믿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딱히 의심이 가지는 않았다.

“정말로 딱 그것밖에 몰랐다고 하지는 않을게요. 나 나름대로 조사한 것도 있었고 생각한 것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정원 씨 형이 살아있다는 건 몰랐어요. 알았으면 처음부터 좀 달랐겠죠, 우리 둘 다.”

이 말까지 덧붙이니 더 그랬다. 정원은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는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정원의 얼굴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슬슬 다음 말을 재촉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래.

“그 사람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하면.”

겨우 그 말을 한 뒤, 석주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이번에도 꽤 길어졌다. 꺼내기 힘든 이야기인 걸까.

석주는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예전에 그 사람이 날 키웠던 적이 있어요. 키웠다기보다는 사육했다거나, 가지고 있었다거나……. 그런 말이 더 잘 어울리겠지만.”

“사육이라고요.”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린 채 물었다. 석주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미미한 미소를 띠어 보였다.

“뭐라고 했더라, 본인이 내 먼 친척이라고 했던가……. 대충 그렇게 말하고 날 데려갔었죠.”

“잠깐……. 그 전까지는요? 어디 있었길래 그런 말로 사람을 데려가고 말고 하나요?”

“글쎄요. 고아원 비슷한 데였어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하는 말에 정원만 괜히 말문이 막혔다. 침묵을 끊기 위해 간신히 이성적으로 대꾸했다.

“데려가서 뭘 했는데요?”

“때 되면 밥 먹이고……. 그 정도?”

밥을 먹이고, 끝?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평범한 일상이라 생략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밥만 먹이고 아이를 방치하는 고문 아닌 고문을 한 것인지 의아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그냥 방에 있었고, 가끔은 그 남자가 와서 하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 그보다 더 가끔은 그 사람을 따라서 나가기도 했었고.”

석주의 설명을 들어 보니 아마 후자에 가까운 듯했다. 그렇다면 석주에게도 그 남자가 좋은 기억일 리는 없는 것이다.

“알려준 게 없어서 어디서 지냈는지는 잘 몰라요. 아니, 몰랐는데……. 지금은 정황상 어디였구나, 하고 짐작은 하고 있어요.”

“그게 어딘가요.”

“노른이죠.”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며 동시에 반응까지 하려니 두통이 올 지경이었는데, 석주의 담백한 즉답에 잠시 생각이 멈췄다.

“본사도 아니면서 너무 알을 불렸어요.”

역시나 덤덤한 설명에 정원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 과거에 사장이 석주를 데리고 있었다는 곳, 그리고 지금 한국 본사보다도 더 공을 들이는 듯한 테프트의 지부가 있는 곳.

노른에 뭔가 특별한 점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한국이 아닌 다른 곳을 거점으로 삼아야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정원은 고민하느라 안 그래도 구겨져 있던 미간을 더 심하게 찌푸렸다. 정원 쪽을 돌아본 석주는 무심코, 인 듯한 얼굴로 정원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찌푸린 골을 펴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러나 닿지는 않았다.

멍해 보이던 석주의 얼굴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물들었다. 그가 멈칫하며 손을 뒤로 물렸다.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대려던 건가. 당혹스러운 낯빛을 보니 어쩌면 그의 표정 없는 얼굴은 단순히 위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일렁이는 게 뭔지 잠시 궁금했지만, 묻지 않고 살짝 눈을 피했다.

“…그래서요?”

조금 서먹하고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정원이 다시 화제를 돌렸다. 석주는 묘한 표정으로 도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러다 능력을 뺏겼어요.”

“네?”

너무 간결하고 직관적인 한마디. 잘못 들었나 싶어 반사적으로 되물은 정원은 곧 얼떨떨하게 다시 물었다.

“잠시만요. 그 사람이 당신한테서 능력을… 그러니까 초능력을 뺏어갔다고요?”

석주는 이번에도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게 가능한가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저도 저 말고는 본 적이 없긴 해요.”

“아니, 무엇보다 그때 당신… 폭주하기 직전이었는데.”

정원이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랬다. 정원의 기억 속 과거 석주의 모습은 폭주 직전의 에스퍼였다.

능력을 빼앗긴 에스퍼가 폭주는 어떻게 했던 것이며, 또 지금 멀쩡히 능력을 쓸 수 있는 건 어떻게 된 일인지. 여러모로 혼란스럽기만 했다.

석주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 부분을 기억하는 거구나, 중얼거렸다. 지나가듯 한 말이라 더 물을 겨를도 없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때 석주는 능력을 되찾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실험해 보던 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폭주할 뻔했다는 것. 그러나 갑작스레 뛰어든 정원 덕분에 겨우 폭주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까지.

“그때 뺏긴 능력 몇 개는 안 돌아왔어요.”

“…….”

“반대로 그때는 없었다가 생긴 것들도 있죠. 순간이동도 그중에 하나고.”

복잡한 표정의 정원을 내려다본 석주가 웃으며 덧붙였다.

“불안정한 능력이라 쓴 적이 거의 없어요. 아까 좀 놀랐는데. 어떻게 알고 얘기하나 싶어서.’

“그냥……. 나한테 얘기 안 한 능력도 많을 것 같아서 말해봤을 뿐입니다.”

도박을 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성공했으니 다행이지만,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정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여러모로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잘못 생각한 건 아닌지 고민스럽다가도 석주의 말을 듣고 나니 이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같이 들었다.

혼란스러웠지만, 그의 말이 다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 물었다.

“그럼 강석주 씨도 비슷한 이유로… 이번 작전에 참여한 건가요. 그 남자에 대한 앙심 때문이라거나…….”

그가 다시 눈을 돌려 정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다.

“솔직히 난 그 사람이 뭘 하든 관심 없어요.”

“…예?”

그럼 왜?

반사적으로 든 의문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걸 물을 수가 없었다.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라서. 석주는 재차 작은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그때 정원 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 안 나죠.”

“…네, 안타깝지만.”

여전히 단편적인 기억뿐이었다. 그가 폭주하려던 걸 막는 순간의 장면뿐,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까지는…….

석주는 장난치듯 웃으며 선언했다.

“말은 안 해 줄 거예요.”

‘…어쩌자는 거지?’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석주는 따뜻한 것인지, 아닌지 모를 묘한 온도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데 나는 그 말 때문에라도 정원 씨를 계속 생각했고……. 그래서 정원 씨가 바라는 게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그래서예요. 별거 없어요.”

미온에 가까운 눈빛.

그런 담담한 표정으로 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당신 지금… 이 작전도 나 때문에 참여했다고 얘기하는 건가요.”

정원은 확인하듯 물었다.

혹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으로 과거사와 함께 이런 솔직한 고백을 듣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석주는 여전히 평온해 보이는 얼굴로 정원을 마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언뜻 잔잔해 보여서, 그렇다고만 생각했던 눈빛 속에서……. 정원은 그 순간 어떤 감정의 조각을 읽어냈다.

몇 차례 스치듯 본 적이 있는 눈빛.

아주 오래된, 해묵은 애정 같은 것.

그렇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 석주는 망설이듯 다시 손을 뻗었다. 아까 이마를 짚으려 했던 손이 궤도를 바꿔 정원의 머리칼을 건드렸다.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정원 씨를…….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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