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정원은 누군가 숨통을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 숨을 멈춘 채 석주를 바라보았다. 당장 눈을 돌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능력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그 눈빛에 묶인 듯한 기분이었다. 형체 없는 눈길이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았다.
한참 만에 다시 눈을 돌렸다. 정원이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내내 눈을 떼지 않던 석주는 정원이 고개를 돌린 뒤에야 질문을 던졌다.
“이제부터 어떡할 거예요?”
방금 전 본 눈빛은 거짓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담백한 목소리. 정원은 천천히 고개를 위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쨍쨍한 햇빛 탓에 눈이 시렸다. 결국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곱씹어 생각해 보니 더없이 막막한 말이었다. 지금이야 바닷가에 느긋하게 누워 석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사실 그 어느 때보다 급박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원래의 계획, 원래의 생각과는 너무 많은 부분이 틀어져 버렸다.
사장을 만나게 된다면 뭔가 갈피가 잡힐 줄 알았는데……. 무언가를 이루기는커녕 더욱 막막해지기만 했다. 자신이 그동안 쫓아온 것이 모두 덧없는 짓으로 느껴질 만큼.
이제껏 필사적으로 찾아다녔던 것이 허망할 정도로, 그가 쉽게 나타났던 것부터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가 눈앞에 있는데도 여러 요인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게 문제일까. 차라리 그때 실패를 각오하고 바로 복수를 시도했다면 달라졌을까.
하지만… 다 무의미한 생각이다. 형이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무작정 사장 하나만 죽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한숨을 쉰 정원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석주에게 말했다.
“그러게요. 이제 어떡할까요?”
뱉은 직후 후회스러워졌다. 그렇다고 이렇게 무기력한 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건데.
석주는 고요한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그 말을 뱉은 뒤, 석주는 정원을 향해 조금 몸을 기울였다. 그 물음을 듣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버린 바람에 다시 석주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늘처럼 드리운 검은 머리카락. 가만히 이쪽을 내려다보는 눈길. 햇빛과 섞여 유난히 옅게 느껴지는 노란색 눈동자.
순간 뱉었던 약한 말 따위는 완전히 잊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그의 얼굴은 꼭 정원이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걸 이뤄 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허무맹랑한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기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더욱 혼란스러웠다. 정원은 너무 뜨겁게 느껴지는 눈길에 홧홧해진 얼굴을 다시 반대편으로 돌렸다. 대체 그의 눈을 오늘만 몇 번 피하는 건지 모르겠다.
“…뭐, 어떻게 하고 싶은지야 정해져 있죠.”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담담하게 뱉는 말과 숨기지 못하는 눈빛 중 어느 쪽이 그의 진의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대놓고 거리를 좁히지도 않고, 목소리에도 감정을 담지 않는 것은 정원이 모른 척 넘어가도 된다는 그의 배려가 아닐까 싶어서……. 이렇게 눈을 돌리는 것이다.
정원은 그를 외면한 채 말을 마무리했다.
“사장을 죽이고… 형을 구해 와야죠.”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말이지만, 정원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목표였다. 무모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고민하던 정원은 결국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무릎을 양팔로 감싸 안은 뒤 들릴 듯 말 듯 말을 다시 꺼냈다.
“이런 부탁, 힘든 건 알지만…….”
그의 시선이 곧장 옆얼굴에 와 닿는 것 같다.
“내가 사장을 죽인다고 치면, 강석주 씨가 어떻게든 형을 구해서 빠져나가 줄 수 있나요?”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겠지만.
석주는 즉답했다.
“못 해요.”
“…….”
뭐에 대한 대답인지 알 수 없었다. 형을 구해주지 못할 거라는 뜻인가. 아니면 자신이 사장을 죽이지 못할 거라는 뜻인가. 아니면 정원이 그런 짓을 하게끔 그가 내버려두지 못할 거라는 뜻인가.
“내가 정원 씨를 죽게 두기 싫다는 거랑 별개로, 어차피 정원 씨가 목숨을 걸어봤자 못 죽일 거예요.”
생각을 읽은 것처럼 석주가 말을 이었다.
“그건 강석주 씨가 모르는-.”
“아뇨, 알아요. 관장님이 정원 씨 몸에 자폭 장치 달아 놨죠. 대 에스퍼용으로.”
“…….”
말문이 막힌 정원이 석주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스스로 말한 적은 물론 없다. 그렇다면 관장에게 들은 것일까? 관장의 성격을 생각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렇다고 그냥 떠본 것이라거나, 때려 맞힌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인 이야기였다. 멍해진 정원의 얼굴을 보며 석주가 단언했다.
“그걸로 안 될 거라는 얘기예요.”
“…어떻게.”
자폭 장치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는지, 또 그게 효과가 없으리라는 걸 어떻게 아는지. 두 가지가 모두 섞인 질문이었다. 온전히 묻지는 못했지만.
석주는 알아듣지 못한 척 딴소리를 했다.
“왜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렇게 각인을 하자더니.”
“이 상황에서 각인해 봤자…….”
계속해서 멍하니 대답하던 정원은 곧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애초에 강석주 씨 몸 상태가 괜찮기는 해요?”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는 질문이었다. 석주의 지금 상태는 언뜻 보기에도 최악이었다. 기운부터가 불안정하게 일렁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기운의 크기는 평소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그가 해 준 옛날이야기처럼, 지금도 능력을 빼앗긴 상태라 그런 게 아닐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엉망이면서 뭘…….”
중얼거린 정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지금 제대로 능력 쓰지도 못하잖아요. 이번에도 뺏겨서 그런 거죠?”
“놔두면 나아요.”
석주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저절로 어이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이번에는 완전히 뺏긴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묶였던 것뿐이라서, 두면 차차 돌아올 거예요.”
침착한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주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그의 능력이 돌아온다고 해서 각인을 맺겠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석주는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여전히 덤덤하게 답했다.
“한……. 일주일 정도?”
긴 시간은 아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없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니까. 정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그전까지는 뭐 어떡하게요. 여기서 휴양이라도 즐기려고?”
“그것도 괜찮겠죠.”
순간 석주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스쳤다. 낯빛이 조금… 달아올랐나? 그가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여긴 둘뿐이고…….”
이 와중에 무슨 소리를.
정원의 입이 무심코 벌어졌다.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가? 무인도에 단둘뿐이라는 이유로? 황당함인지, 어처구니없음인지, 아니면 그의 부끄러움에 자신 역시 전염되어 버린 건지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정원이 답지 않게 빽 지르듯 물었다.
“지금 그게 할 소리예요?”
석주는 작게 웃었다. 웃고는 있지만 농담이었던 것 같지는 않은 오묘한 얼굴. 이래서는 계속 모른 척만 하기도 어렵지 않나. 마음을 숨겨 줄 거면 좀 확실하게 해 줄 것이지…. 정원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그전에 사장이 쫓아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그럴 일은 없어요.”
석주는 이번에도 담백하게 즉답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묻기 위해 입을 달싹이다 말고 그냥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석주가 낮게 웃었다.
“정원 씨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그게 자신의 나쁜 버릇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것도 상황 나름이지.
“…이 상황에 생각을 안 할 수가 있나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 봐요.”
그렇게 중얼거린 석주가 곧 정원 쪽으로 몸을 기대 왔다.
어깨에 닿는 머리의 무게에 정원은 놀라 몸을 굳혔다. 아까까지만 해도 손을 대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았나. 왜 갑자기 이런 식으로 거리를 좁혀 오는 걸까.
“갑자기 왜…….”
이마를 찌푸린 채 고개를 틀어 석주의 얼굴을 내려다본 정원의 낯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강석주 씨?”
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방금 전에는 그게 순전히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가 닿은 어깨가 조금 뜨끈하다는 걸 그제야 느꼈다.
당황한 정원이 석주를 바로 앉혀 놓고 이마를 짚었다. 석주는 무슨 생각인지 이 상황에도 그냥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이마는 예상대로 불처럼 뜨거웠다.
“몸 상태가 이러면 진작 말을.”
그 말이 끝나기도 전, 석주는 정원을 향해 다시 고꾸라지듯 얼굴을 묻었다.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