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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71화 (71/126)

71.

어깨 부근에서 더운 숨결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그를 받아 안으려 양팔을 들어 올렸던 정원은 그를 끌어안지도, 그렇다고 팔을 내리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강석주 씨?”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불러 봤지만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정원은 난감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했어야지…….”

“…….”

“여기서 잠들어 버리면 어떡해요?”

어차피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오히려 마음 놓고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러나 어이없는 심정과는 별개로 아픈 그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원은 석주를 받쳐 안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눕혀야겠는데……. 해가 쨍쨍한 바닷가보다는 그늘진 곳으로 옮기는 게 낫지 않을까.

정원은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석주를 일으켜 세웠다. 가뜩이나 정원보다 체격이 큰 석주인데, 정신을 잃은 상태라 훨씬 힘겹게 느껴졌다.

그를 부축해 걸음을 옮겼지만 적당한 나무 그늘조차 눈에 보이지 않았다. 무성한 풀숲에 사람을 눕혔다간 이 섬에 사는 벌레나 뱀에게 물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때, 진땀을 빼며 한숨을 쉬던 정원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정원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이런 데 왜…….”

잘못 본 것도 아니고 착각도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분명 집이었다. 으리으리한 대저택 수준은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작고 낡은 오두막까지도 아닌. 딱 적당한 크기의 인가처럼 보였다.

무인도라고 하지 않았나? 그가 거짓말을 한 걸까?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데, 그도 몰랐던 걸까. 아니면 과거에는 누가 살았다가 지금은 방치된 집일지도 모른다.

정원은 한참 경계하듯 대문을 노려보았지만,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 상태로 석주를 지탱한 채 서 있기에는 서로에게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정원은 조심스럽게 집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당겨 보았다.

잠금장치는 걸려 있지 않았다. 문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열렸다. 삐걱이는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이왕 문까지 연 마당에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정원은 자세를 고쳐 석주를 더 단단히 부축한 채 집안으로 들어섰다.

조명이 없어 어두침침했지만, 구석에 난 창을 통해 빛이 들어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둘러본 집안은 폐가라고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불이 꺼져 있을 뿐 먼지가 쌓여 있지도 않았고, 귀신이 나올 것처럼 으스스한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분명 누군가에 의해 관리된 흔적이 느껴졌다.

이제라도 돌아 나가야 하나. 석주가 이 모양 이 꼴인데, 누가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하지만 곧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더는 생각할 기운도 없었다.

정원은 제일 먼저 보이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창가에 자리 잡은 침대 위에 침구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정말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그 위에 석주를 던지듯 눕혔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깨어날 기색조차 없는 걸 보니 상태가 많이 안 좋기는 한 모양이었다.

가이딩이라도 해야 할까.

힐끗 석주를 돌아본 뒤 창밖을 내다보았다. 넓게 뻗은 바닷가가 곧장 눈에 들어왔다. 해변에서 빠져나와 풀숲을 헤치고 꽤나 걸었으니, 저긴 아마도 정원과 석주가 있던 곳의 반대편 해변쯤 될 터였다.

예상보다 더 작은 섬인 모양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원은 곧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석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마를 짚어 보니 절절 끓는 온도가 여실히 느껴졌다.

불안정한 숨을 뱉던 석주는 정원의 손이 닿자마자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가만히 늘어져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뻗어 온 손이 정원의 손목을 잡아챘다. 정원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려다가 겨우 자세를 유지했다.

“정신이 들어요?”

“…….”

석주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혼곤한 눈동자 안에 자신의 모습이 온전히 들어차는 걸 보려니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석주는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원 씨?”

정원이 여기 있는 것이 신기하기라도 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석주의 얼굴에 점차 안도감이 차올랐다. 동시에 손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자 석주는 급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네, 여기 있어요.”

그 모습에 마음이 누그러진 정원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잠시 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마주 보다가, 잡힌 손목을 통해 천천히 기운을 흘려 넣었다.

가이딩에 노곤해진 것인지, 아니면 정원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한 것인지 석주는 금세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도 손목을 잡은 손의 힘은 그대로라 풀어내는 게 제법 힘에 겨웠다.

정원은 조심스럽게 그에게서 빠져나온 뒤, 잠든 석주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상태가 좋지 않은 와중에도 정원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

이 사람을 정말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쩌면 그가 생각보다 굉장히 단순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원은 곧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틈으로 방 을 빠져나와 보니, 큰 창이 나 있는 방안에 비해 어두운 복도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귀를 쫑긋 세워 보니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렸다. 정원은 잔뜩 긴장한 채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소리의 출처가 부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게만 들리던 것이 실은 물을 끓이는 소리였다는 것도.

역시…….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여차하면 육탄전까지 각오한 채 부엌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나 정원은 불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왜소한 노인이 주전자 앞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

“아, 왔나?”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노인이 인사를 건네 왔다. 정원은 탐색하듯 그 옆모습을 살펴보았다. 주전자를 바라보는 것도, 초점이 있는 것도 아닌 흐린 눈동자.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실례합니다. 계신 줄 모르고 함부로 들어오게 됐네요.”

“석주를 데려온 게지?”

알 만하다는 듯한 질문. 정원은 입을 다문 채로 멈칫했다. 자연스럽게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와 아는 사이인 건가.

“그렇습니다……. 무리했는지 갑자기 쓰러져 버려서요.”

“그 녀석이 원래 좀 그런 편이지.”

“아는 사이이십니까?”

“글쎄다.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는 사이겠지.”

이건 또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정원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린 채로 조심스레 물었다.

“강석주 씨는 여기가 무인도라고 하던데…….”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

점점 더 얼굴이 찌푸려졌다. 노인은 작게 콧노래 비슷한 소리를 내며 불을 껐다. 주전자를 들고 식탁 앞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앞은 보이지 않아도 감각이 상당히 예민한 모양이었다.

“어르신께서 여기 계시는 걸 그 사람이 모르는 겁니까?”

“아니, 그럴 리가. 알고 있으니까 여기로 온 거지.”

“…….”

“나 하나만 있는 섬이니 무인도라고 불러도 맞는 말 아니겠나? 그건 아무래도 좋으니 우선 앉으시게. 지쳤을 텐데 차라도 한잔 드리지.”

정원은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익숙한 손길로 차를 우려낸 노인이 정원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받아 마시지는 않았다. 아마 앞이 보이지 않아도 정원이 차를 마시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아챘을 테지만, 노인은 그에 대한 말없이 자신의 목을 축이기만 했다.

“긴장한 것 같은데, 누가 쫓아오기라도 할까 봐 그러나?”

정원은 신중하게 대꾸했다.

“그런 부분도 있습니다.”

“걱정 말게.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석주 그 녀석이야 여기가 제 집처럼 익숙하니 들어올 수 있는 거고. 섬 밖에 결계 비슷한 게 덮여 있어서, 여기선 사람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다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어 보였던 석주를 생각하면 아주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정원은 그래봤자 노인이 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실례가 아니라면 어르신이 누구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음…….”

말을 흐리며 의뭉스럽게 웃는 모습을 보니 대답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괜찮다 대답하려던 정원은 문득 드는 기시감에 노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진으로 보았던 것과는 다르지만, 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

정원이 잔뜩 경계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예언자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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