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73화 (73/126)

73.

정원의 목소리에는 바짝 날이 서 있었다. 상대가 맹인 노인이자 예언자인 최 선생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격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을 것이다. 정원의 날카로운 말에 최 선생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그저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짓이라니……. 무슨 짓을 한 건 아니라네.”

정원 쪽을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는 그 시선이 얄궂게 느껴졌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반박했다.

“전 분명히 그 차를 마시고……!”

“그래,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고 있네. 하지만 그건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차일 뿐, 무슨 능력이 있는 건 아니야.”

“…….”

“나 역시 자네가 쓰러진 건 예상 밖이었어. 당황했을 텐데, 미안하군.”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여전히 정원의 손을 잡고 있는 석주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정원의 표정을 집요하게 살피며 잡힌 손을 매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라는 건가. 정원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제가 본 건……. 뭐였습니까?”

“꿈에서 뭔갈 봤다는 게지?”

말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볼 수 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입으로 그렇다고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최 선생은 듣지 않고도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뭘 봤나?”

“…그 사람이.”

거기까지 말한 정원이 말을 흐렸다. 차마 사장에 대한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원은 꿈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다시 말했다.

“틀림없이 선생님의 예언 능력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난 더는 능력을 쓸 수 없게 된 지 오래라네. 남에게 그런 꿈을 꾸게 만들 능력은 당연히 남아 있지 않고.”

최 선생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정원의 표정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덧붙였다.

“아마 이 섬 때문일 게야. 나도 여기 온 뒤에 종종 기묘한 꿈을 꿀 때가 있었으니…….”

최 선생의 능력이 아니라 섬 자체가 가진 신비한 힘이라도 된다는 건가.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 걸까?

“그래서, 꿈에서 본 게 뭐였길래 그렇게 사색이 된 건가?”

“사장이…….”

이어지는 질문에 다시 입을 열기는 했지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꿈의 내용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본 정원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명확히 듣지는 못했다고 하나 절대 유쾌한 내용은 아니었다. 꼭 그 이후를 들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인데, 하필이면 그때… 꿈속의 사장에게 발각당하다니.

“정원 씨. 진정하고 말해 봐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석주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진정하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려 내려다보니, 그에게 잡힌 자신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모르는 사이 긴장한 모양이었다. 조금 당황한 정원은 애써 차분하게 입을 열어 설명했다.

“…사장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전무라는 사람도 제대로 모르는 눈치였어요…….”

그렇게 말하며, 정원이 최 선생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더라도 왠지 최 선생이 있는 자리에서는 입을 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석주는 최 선생 쪽을 바라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어르신. 잠깐 나가 주시겠습니까?”

정중한 어투였다. 최 선생은 알 수 없는 기색으로 허허 웃더니 순순히 방을 나가 주었다. 정원은 그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대체 그와 무슨 관계인지를 먼저 묻고 싶었지만, 당장은 꿈의 내용에 대해 말하는 게 우선이었다.

“세뇌에 관한 말을 했습니다. 행사에 민간인을 많이 불러 모으라는 이야기도 했고요.”

“우리가 가려고 했던 그 행사 말이죠.”

석주가 침착하게 부연했다. 정원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확히는 듣지 못했지만 틀림없이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자연스럽게 이어 생각나는 것은 역시 형의 얼굴이었다. 만약 그 행사에서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형에게도 나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사라져서 가뜩이나 거슬릴 텐데, 혹시라도 형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라면.”

“…….”

“…제가 가 봐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정원이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석주는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불렀다.

“정원 씨.”

“강석주 씨 몸 상태가 나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사장이 당신을 노리고 있는 것 같으니 더더욱 가면 안 되겠죠. 그러니 저만이라도-.”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석주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횡설수설 떠드는 정원을 향해 몸을 굽혔다. 단단한 손길이 정원의 어깨를 짚었다.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그를 올려다보자, 석주는 신뢰감을 주려는 듯 차분한 표정으로 정원의 얼굴을 마주 보다 그를 당겨 안았다.

“…….”

정원은 입을 다물었다. 당황스러운 기분도 잠시, 기이할 만큼 긴장되어 있던 마음이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마에 닿은 너른 가슴팍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 왔다.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평범하게 느리지도 않은 속도다.

“…이제 진정했어요. 놔 주셔도 됩니다.”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석주는 그 뒤로도 잠시 더 정원을 끌어안은 채 몸을 물리지 않았다. 정원 역시 굳이 나서서 저항하지 않고 숨을 골랐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는 차의 약효가 이제야 듣는 것인지 모르겠다.

후자는 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걸 알고 있지만. 정원은 천천히 손을 올려 석주의 팔을 붙들었다. 잠시 굳었던 석주의 몸이 곧 이완되고, 그는 그 뒤로도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정원을 안은 팔을 풀었다.

그의 손이 다시 가 닿은 곳은 이번에도 정원의 손 위였다. 손가락을 건드리는 손길이 전만큼 어색하지 않아 가만히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정원 씨, 아직 행사 날까지 시간이 있어요. 지금 당장 뭘 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거 알잖아요. 이 섬을 나가 봤자 위치만 들키게 될 거고요.”

“…….”

그의 말이 맞는다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아마 정원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부러 말을 고르고 있다는 사실도.

자신이 당장 가 봤자 뭔가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정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안해요. 잠깐 너무 흥분했어요.”

석주는 말없이 정원의 손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간지럼을 태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진정하라는 듯 차분하게 매만지는 것뿐이었으나 어쩐지 손이 간질거렸다. 정원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돌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분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이신가요.”

“최 선생님 말이죠.”

“네. 이런 곳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무인도라고 하셨으니까요.”

“딱 저분만 사는 곳이에요. 대외적으로는 무인도가 맞기도 하고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거짓말이라거나, 자신을 속였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에 대한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어릴 때 도움을 좀 받았어요. 제가 도움을 드리기도 했고요.”

석주가 간결하게 설명했다. 그 이상 말하려는 눈치가 아니기에, 정원은 혼잣말처럼 대꾸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네. 여기서 지내신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 여기 있을 생각인가요.”

“그래야겠죠. 어느 정도는 들었겠지만……. 여기는 아무도 못 찾아올 만한 곳이에요. 적어도 당분간은. 그러니까 당장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좀 쉬어요.”

석주가 느릿느릿하게, 하지만 멈추지 않고 정원을 달랬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정원과 눈을 맞추었다.

“안색이 너무 나빠요, 정원 씨.”

그 말을 들은 정원이 작게 웃었다.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누가 누구의 안색을 이야기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말하는 석주야말로 아직 여독이 남은 듯 창백한 얼굴이었다.

“강석주 씨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중얼거린 정원은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허공에서 잠시 멈춘 손은 이윽고 망설임을 끝낸 뒤 원래의 목적지를 찾아갔다.

석주의 머리카락으로 향한 손은 천천히 그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석주는 그런 손길을 난생처음 받아보는 사람처럼 당황한 표정이었다. 곧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기묘한 안정감이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 * *

다시 잠이 들어 버린 걸까?

정원은 이번에도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어느 순간 잠든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는데, 그런데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 것 같았다.

그때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꼭 정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또 왔군.”

사장의 목소리였다. 분명히 정원을 겨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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