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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74화 (74/126)

74.

한순간에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사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곧 시야가 환해졌다. 와 본 적이 있는 사무실. 너른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사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정원과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넓은 보폭으로 정원이 있는 방향을 향해 다가오더니,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잡힌다.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의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보니 사장의 손은 허공을 휘휘 배회하고 있었다. 정원의 몸을 통과하듯 움직이는 손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긴, 아무리 생생하다고는 하나 지금은 꿈속이었다. 손이 닿지 않는 것 정도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돼 먹은 구조인지는 모르겠다. 꿈이라고 부를 수는 있는 건지. 사장 역시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아니면 사장의 현실에 자신이 개입하고 있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간에 그의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정원에게는 다행이었다.

“흠……. 역시 잡을 수는 없군.”

사장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예상했다는 것처럼. 정원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데도 깨어날 기미는 없었고, 지난 꿈에서 듣지 못한 부분을 알아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깨어나기를 포기하고 그를 노려보고 있을 때, 사장이 다시 말했다.

“지금 어디 있냐고 물어보면 알려줄 건가?”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설마 알려줄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닐 테고. 계속해서 경계를 가득 담아 노려보자 사장은 경쾌하게 웃었다.

“하하. 물론 어떻게 지금 여기 그런 식으로 있는 건지도 대답은 안 할 테고.”

역시 당연한 소리였다. 정원은 계속해서 입을 다문 채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사장은 다시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더니, 책상 옆에 있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대화라도 하지. 거기 앉게.”

실체도 아닌 사람에게 앉긴 뭘 앉으란 건가. 의자에 무슨 장치를 해 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다리가 안 아프네요.”

그렇기에 뻔뻔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사장은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그 혼자만 자리에 앉았다. 느긋한 자세로 기대 앉은 채, 정원을 향해 어딘가 즐거워하는 기색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그렇게 대처할 줄은 몰랐네. 자네 형이 잘못 생각한 모양이군.”

정원을 예민하게 반응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형의 이름이 나오자 급속도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정원은 무심코 그 쪽을 향해 한 발을 내디디며 말했다.

“형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한다면, 어쩔 텐가?”

즉답이었다. 여유 넘치는 목소리였으나 어딘가 날 선 구석이 있었다. 정원은 유심히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어쩌면 즐거운 기색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도 실은 화가 나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잠자코 입을 다문 정원을 향해 사장이 나긋나긋하게 경고했다.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뭘 꾸미고 있는 겁니까.”

무거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알려줄 거라고 생각하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던진 말에, 사장은 의외로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냐고 물으면…… 이것부터 물어보지. 자네는 부당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나?”

“뭘 말이죠?”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부당하다니? 사장은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대꾸했다.

“자네 본인의 처우에 관해서.”

“…….”

“에스퍼와 가이드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느냐는 뜻이야. 자네 같은 입장이라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했을 만한데.”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일까. 차마 표정 관리를 할 여유도 없었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부당한 대우라. 에스퍼나 가이드 중에는 능력을 가진 자신들이 능력이 없는 비각성자들을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노동을 강요당한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최고라 불리는 테프트의 사장에게서 나오는 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자네 같은 입장’이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는 사실 알 것 같았다. 정원은 국가기관에 소속된 가이드로서, 다른 에스퍼나 가이드에 비해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 또한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혹시 너무 길들여져서 부당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던 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사장이 말했다. 일부러 정원을 도발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갈 리는 없었다. 정원이 싸늘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지금 그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뭡니까.”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사장에게서 나온 말이 정원의 맥을 빠지게 한 것 같았다. 사장이 정말로 ‘그런’ 주장을 펴려는 것이라면……

“설마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뻔한 이야기는 아니길 빕니다.”

“뻔하다고 생각하나?”

사장의 목소리에서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정원이 묘한 눈으로 사장을 노려보며 물었다.

“에스퍼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정말로 그런 얘기라도 하려는 겁니까?”

“유치한 표현이지만……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

사장은 담담하게 인정했다. 정원은 묘한 심정이 되어 그를 노려보았다. 조금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각성자가……그중에서도 에스퍼가 지배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아주 많았다. 그러나 실제로 사기업에 소속되어 일하는 에스퍼들이란 그런 주장을 펼 만한 입장이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테프트의 사장이 지금보다 더 나은 처우를 원한다는 건……말 그대로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 아닌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의 목적이 결국에는 그저 그런 것이었다고? 정원이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물었다.

“민간인을 불러들이려는 이유는 뭐죠.”

민간인을 학살이라도 해서 지배자가 되겠다는 건가. 사장은 진심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웃음을 띠며 대꾸했다.

“나는 비각성자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

“굳이 따지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보다는 비각성자의 노예를 자처하면서 정작 권력과 재물, 본인이 원하는 건 뭐든 독식하려고 하는 쪽이 더 꼴 보기 싫지.”

정원은 계속해서 침묵했다. 그의 말에서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 있었던 탓이다.

“누구 이야기인지는 자네도 짐작하고 있겠지.”

“유 관장님 말씀인가요.”

“그렇게 대답하는 걸 보면 자네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군.”

당신의 생각을 짐작해 보았을 뿐이라고 대답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사장이 정말로 유 관장을 거슬려하는 것인지,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영화 속 악당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인지, 민간인을 어떻게 처리하려는 것인지……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만 더 말해주자면……비각성자를 거슬려하는 건 내 쪽이 아니야.”

그때 사장이 입을 열어 덧붙였다. 혼란을 더하게 하는 말이었다. 정원을 놀리는 것 같은 미소가 유난히 신경 쓰였다.

비각성자를 불러들이려 한 것은 사장의 지시가 아니었던가. 본인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잡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잠시만요. 그 얘기는 대체…….

“모쪼록 조만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군.”

정원의 다급한 부름에도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사장은 여유 있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정원의 꿈은 그대로 끝이 났다.

* * *

“일어났어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일어난 정원의 옆에서, 기다렸다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밖은 깜깜한 밤이었다. 창으로 들이치는 달빛을 보며 정원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렸다.

석주는 정원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 가만히 앉아 정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이 당황해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또 갑자기 잠이 들어서……걱정했어요.”

“제가……오래 잤나요.”

석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그렇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기 이렇게 불편하게 있을 건 뭔가요. 당신이야말로 쉬어야 할 텐데.”

“괜찮아졌어요.”

정원의 걱정 섞인 목소리에 석주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가만히 바라보니 석주의 얼굴은 확실히 차분했지만, 여전히 핏기가 없었고 주위의 기운이 불안불안했다.

“기운이 이렇게 불안정하면서.”

“그럼 손 잡아주세요.”

석주가 담담하게 즉답했다.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적극적인 태도였다. 망설이고 머뭇거릴 때는 언제고, 손을 잡아 달라는 말을 저렇게 태연하게 뱉는 걸까.

“……강석주 씨도 무슨 안 좋은 꿈 같은 걸 꿨나요?”

“왜요. 이상해요?”

“이상하다기보다…….

머뭇거리며 묻던 정원이 결국 인정했다.

“네, 좀 이상하네요.”

“자는 얼굴을 너무 오래 봐서 그런가.”

석주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석주가 먼저 손을 뻗었다. 겹쳐진 손을 내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 정원 씨를 오래 보고 있거나……오래 생각하게 되면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묘한 말이었다. 당장 입을 열어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입을 열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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