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이대로 침묵이 길어지게 둘 수는 없었다. 정원은 차분하게 입을 열어 물었다.
“어떻게 이상해진다는 건가요?”
“정원 씨가 뭐든지 다 대답해 주고……, 다 들어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어렵지 않게 대답한 석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례적으로 기지개를 한 번 켜는 모습을 정원이 빤히 바라보았다. 석주는 창밖을 힐끗 바라본 뒤 곧 눈을 돌려 정원을 향해 웃었다.
“잠깐 걸을까요? 바닷가.”
달빛에 비친 석주의 얼굴은 평소와 같으면서도 다르게 보였다. 달빛이 섞인 탓인지 그의 노란 눈동자도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졌다. 홀린 듯 그를 바라보던 정원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 나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 석주는 침대 옆에 놓여 있던 담요를 들어 정원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정원이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어 흠칫 놀랄 뻔했지만 겨우 평정을 유지했다.
“밖이 쌀쌀하니까.”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변명하듯 웃어 보였다. 정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워요.’ 중얼거렸다. 분명 속삭이듯 작은 소리였음에도 그와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석주의 말대로 밖은 쌀쌀했다. 담요가 없었더라면 이가 덜덜 떨렸을 것이다. 정원은 담요를 더 바짝 동여매며 물었다.
“춥지 않나요, 강석주 씨는?”
“많이 추워요?”
먼저 물은 것은 자신 쪽이건만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미간을 찌푸리는 정원에게 석주가 손을 내밀었다.
“손 주세요.”
내민 손에는 떨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표정 역시 평온한 것을 보니 춥지는 않은 모양이다. 정원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것도 추울 것 같아서인가요.”
“그런 거죠.”
석주가 곧장 대답했다. 작게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저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정원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았다.
조금 충동적인가. 그가 추울까 봐 인정을 베푼 것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이 이상했다.
기묘하게 평온하면서도 벌렁거리는. 안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신경이 곤두서 있는. 그런 이상한 기분.
하지만 막상 석주의 손을 잡고 보니 마음이 잔잔한 물결처럼 차분해졌다. 그의 손이 추운 날씨에도 너무 따뜻한 탓일까.
그가 같이 걷자고 한 이유가 있을 줄 알았다. 뭔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 자리를 만든 거라고. 그러나 걷는 내내 석주는 말이 없었다. 가끔 잡은 손을 더 단단히 고쳐 쥐거나, 정원에게 춥지 않냐고 묻는 것이 전부였다.
정원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한참 동안 할 말을 골랐다.
그러나 그 역시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마음이 편안했기 때문이었다.
* * *
묘한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추위 탓에 뺨이 달아오른 정원에게 말을 건 것은 최 선생이었다.
“이제 들어오나?”
“아…….”
제법 늦은 시간일 텐데, 아직 자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원과 석주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잠시 고민하던 정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여러모로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것부터가 민폐라면 민폐다. 그럴 만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거처를 제공해 준 이에게 날을 세우고 추궁했던 것도 사과할 일이었다. 마음이 안정되고 나서 보니 사과할 일이 마음에 걸렸다.
함축적인 사과를 건네는 정원을 보며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폐는 무슨.”
“…….”
“석주에게 이야기는 대충 들었네.”
그가 천천히 운을 뗐다. 정원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다면 꿈 이야기를 제대로 해 주겠나? 늙은이의 조언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니…….”
사과와 이야기는 별개였다. 그에게 잘못한 것과는 별개로 꿈의 내용을 온전히 털어놓기는 여전히 불편했다. 정원이 망설이는 것을 알아챘는지, 작게 침음을 흘리던 노인이 곧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자네도 ‘그 예언’을 한 게 나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겠지.”
여기서 갑자기 예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줄이야. 정원이 놀란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나도 그 예언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네.”
“책임감이라니요.”
“자네는 자네 형이 그렇게 된 데에 그 예언 탓도 있다고 생각하겠지? 나 역시 그렇다는 뜻일세.”
속을 꿰뚫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원이 영 불편한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최고의 가이드가 최강의 에스퍼를 막을 것이다.’ 대강 그런 내용이었다. 그 예언 이후 사장이 정원의 집을 찾아왔었다.
맞는 말이지만 예언자 본인의 입으로 듣기는 껄끄러웠다. 정원이 묘한 어투로 대답했다.
“예언이라는 건 원래 예언 능력을 가진 에스퍼 본인이 숨기려고 한다 해서 숨겨지는 게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책임감을 가지실 이유는 없지 않나요.”
“세상에는 내 탓이 아니라고 우긴다고 해서 완전히 피해 갈 수는 없는 일들이 있으니 말이야.”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정원은 노인의 얼굴을 보며 한참을 더 망설였다. 그러다 문득 석주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는 정원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듯 묵묵히 정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을 보니 어쩐지 확신 비슷한 것이 생겼다.
정원은 천천히 입을 열어 꿈을 설명했다. 사장이 한 말과 행사 날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숨김없이 털어놓은 것이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노인은 신중한 얼굴로 고민하더니, 입을 열어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말해 봤자 뾰족한 해결책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대뜸 나온 이 질문이 의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석주 너는?”
노인의 질문은 정원의 답이 나오기도 전 석주에게로 옮겨 갔다.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석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나 마나 뻔하지.”
자문자답. 이 사람은 강석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자신은 여전히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는데. 정원이 반사적으로 석주를 돌아보았다. 석주는 찌푸려진 얼굴로 그를 불렀다. 이제 그만 하라는 것처럼.
“영감님.”
“너는 예전부터 그게 문제야. 뭐든지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거.”
정원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석주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이제까지는 어떻게든 통해 왔을지 몰라도, 이번에도 해결이 될 것 같나?”
“그만 말씀하시죠.”
“내 보기에 자네 둘은 참 비슷해. 하는 생각도 거기서 거기고.”
석주가 뭐라고 하건 노인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강석주야 아는 사이라 쳐도, 정원에 관해서는 아는 것도 없으면서 왜 속을 다 안다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말인가. 정원이 인상을 찡그렸다.
“둘 다 자기희생적이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는 살짝 뜨끔했다. 자신이 희생하더라도 복수를 실행하고 형을 구하겠다는 말을 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최 선생의 말은… 석주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인가.
다시 석주를 돌아보니, 그는 밀랍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최 선생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원을 향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만하시죠, 어르신.”
석주가 다시 한번 차분하게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더 좋은 길을 두고 돌아가려고 하는군.”
석주의 한숨 소리가 노골적으로 들렸다. 노인은 덤덤했다.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새겨듣게. 자네 둘은 협력이라는 걸 좀 할 필요가 있어.”
의아한 말이었다. 정원과 석주가 하고 있는 것이 협력이 아니라면 뭐라는 말인가?
최 선생은 얼굴을 찡그린 정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정확히 자신의 눈을 마주 보는 것만 같은 그 흐린 눈동자에 흠칫 놀라게 됐다.
“각인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나?”
그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다. 각인을 맺으라는 건가? 그렇다면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힘을 합치면 이겨낼 수 있다, 그런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정원이 조금 삐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언해 주시는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조금 더 명확하게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뭐가 궁금한가?”
최 선생은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정원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강석주 씨와 제가 각인을 맺는다면 그 사람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 확답을 내리지 않았다. 정원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한참 만에, 노인이 다시 말했다.
“이 나이를 먹고서야 깨달은 게 있지. 예언이라는 건 원래 듣는 이가 생각하기 나름이라네. 절대 깰 수 없는 불변의 법칙도 아니지.”
또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이해하기 위해 애써 보았지만, 갑자기 예언 해석의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뭔지는 영 알 수 없었다. 노인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최강의 에스퍼를 막는 최고의가이드……. 이걸 꼭 그 사장 녀석과 자네 형의 이야기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자네가 그를 막아낸다면, 그때부터 예언의 주인공은 자네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