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정원은 한참 침묵한 채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언은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사장을 처치하면 예언의 주인공은 자신이 될 거라고? 무슨 소리인지 이해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 능력을 가진 에스퍼들이 이렇게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이제껏 정원이 만나 본 몇 안 되는 이들도 하나같이 의미심장하게 알 수 없는 소리를 뱉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려니 넘기는 게 편했다.
“예언가의 화법이란 건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래서 그게 대체 무슨 뜻이냐고 캐묻지는 않았다. 정원이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린 채, 건조하게 질문 한 가지를 던졌다.
“어쨌거나 각인을 하면 뭔가… 나아질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최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애초에 각인을 하고 싶어 했던 것은 정원 쪽이었다. 이제 와 거부하는 게 더 이상했다.
“각인을 맺는 법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정원 씨…….”
정원이 던진 질문에 석주가 난감하게 그를 불렀다. 정원은 못 들은 척하며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본래 각인을 맺을 때 에스퍼와 가이드는 기관을 방문해 정식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둘은 지금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각인을 맺자고 하기에는 정원이 그 방법을 몰랐다.
질문을 들은 최 선생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그거라면……. 나보다는 석주가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한참 만에 나온 대답이었다. 정원이 그제야 반사적으로 석주를 바라보았다. 석주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최 선생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각인을 맺으려면 당사자들 사이에 깊은 유대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야.”
“유대라면…….”
지금도 나름 있는 편이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왠지 민망했다. 확신이 들지 않기도 했고. 정원이 망설이는 사이 최 선생이 말을 이었다.
“둘 사이가 서먹할수록 실패할 가능성이 커지지.”
“…….”
유대감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서먹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이였다. 정원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여기 있는 동안 강제로라도 가까워지게.”
그래도 가깝기는 하지 않나.
적어도 정원은 이제 석주를 꽤나 가깝게 여기고 있었다. 정원 혼자만의 생각일까. 스스로 말하기는 민망한 일이지만 석주가 자신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건 분명했다. 그러나 유대감이라거나, 가깝다고 느끼는 것은……. 역시 별개일지도.
그에게 유대감을 느낀다. 나름대로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조금 서먹하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심정이었다.
최 선생은 그 말을 끝으로 피로하다며 자리를 떠났다. 정원과 석주도 어색하게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정원은 머쓱한 심정으로 석주의 눈치를 살폈다.
석주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먼저 말을 꺼낼 기색은 아닌 것 같았다.
“그…….”
결국 정원이 입을 열었다. 어색함 탓인지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각인하는 방법에 대해 잘 안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
우선은 가장 궁금한 것부터. 머쓱하게 던진 질문에 석주가 겨우 정원 쪽으로 눈을 돌렸다. 말없이 서서 정원을 바라보는 눈빛이 묘하게 어색했다.
함께 바닷가를 산책할 때 느꼈던 안정감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긴장된 분위기였다.
석주는 아주 오랫동안 정원을 마주 보았다. 정원이 ‘대답하기 힘들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예의상 꺼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쯤 겨우 답이 돌아왔다.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좀 애매하게 굴었죠.”
침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정원이 각인을 해 달라고 부탁할 때마다 석주가 미묘한 태도를 보이기는 했다. 고민해 보겠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지만, 주로 단호하게 거절하는 편이었다.
그는 정원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각인… 하는 법은 알아요.”
“…….”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요.”
그 순간 어떤 예감이 들었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원은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린 채 물었다.
“…해 본 적이 있어서인가요?”
석주는 한참 동안 말없이 조용히 정원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네. 실패했지만.”
그런가. 실패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방어적이었던 건가. 평소의 정원이었다면 어렵지 않게 말을 이었을 것이다. ‘결과가 좋지 않았던 건가요?’ 같은 말을 했겠지. 그러나 이상하게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각인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가까운 가이드가 있었던 것인가.
그는 분명 정원을 어릴 때부터 생각해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다른 가이드와 깊은 유대감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인가?
사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걸 정원 스스로 잘 알았다. 에스퍼와 가이드는 어디까지나 업무적인 파트너였다. 그가 정원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다른 가이드와 유대 관계를 쌓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걸 신경 쓴다는 건 그야말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정원과 석주는 그런 걸 신경 쓸만한 관계도 아니지 않나.
하지만 정원의 입에서는 이미 그 질문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누구랑요?”
그 말에 담긴 미묘한 어조를 석주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생각에 잠긴 것인지 추억에 빠진 것인지 모를 얼굴로 그가 대답했다.
“꽤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이었어요. 저기 계신 영감님……. 최 선생님이랑도 아는 사이였고. 도움을 많이 받았죠.”
“…….”
“에스퍼와 가이드로서 합이 잘 맞았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았고……. 가끔 친누나 같다고 느낀 적도 있었으니까, 가까운 사이였어요.”
가까운 사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이유가 뭔지 알고는 있었다. 그만큼 유대감이 있어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해주려는 거겠지. 하지만 정원의 표정은 여전히 불편한 상태 그대로 펴지지 않았다.
“그래서 각인을 맺어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네. 그렇게 됐어요. 유대감이 있어도 성공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거죠.”
왜?
왜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거지?
이렇게 갑자기?
정원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추스르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들지 않았다. 자신이 느끼는 이 심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긴 고민 끝에 겨우 던진 질문이었다. 어찌어찌 평온한 목소리를 가장할 수 있었다. 석주가 잠시 침묵했다.
“죽었어요.”
예상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직접 들으면 묵직하고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정원은 겨우 고개를 들어 석주의 표정을 보았다.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얼굴이 침통한 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각인 도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는데, 한동안 의식을 못 찾고 누워만 있었죠. 다시는 가이딩을 할 수 없는 몸이 됐다고 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애도해야 마땅한 상황이다. 실제로 각인에 실패한 가이드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도 물론 들기는 했다. 그와 동시에 ‘신경 쓰인다.’는 비이성적인 감정이 일어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표정이 많이 별로네요, 정원 씨.”
정원의 곤란한 얼굴을 뭐라고 생각한 건지, 석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그러니까 이제라도 다시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
“…정원 씨?”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석주의 목소리가 의아해졌다.
“새삼스럽게 무서워진 건 아닐 거고. 그런 표정도 아닌데…….”
정원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석주를 바라보았다. 이런 감정에 더딘 정원이라 확신은 없었지만, 가정이 하나 고개를 들기는 했다.
이건… 질투심 같은 건가? 그 가이드에 대한?
대체 왜?
당황한 정원의 머릿속에서 어떤 기억이 떠오를 듯 말 듯 애매하게 일렁거렸다. 석주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석주와 관련이 있는 기억일 것이다.
그러나 떠올려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랬다가는 이 이상한 감정에 쐐기를 박아 버릴 것 같다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조금 안타깝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제 생각이 변하지는 않아요.”
일부러 더 단호한 투로, 정원이 대답했다.
“내일부터는 조금 더 가까워지도록 하죠.”
가까워지자는 말을 몹시 사무적인 어투로 하는 정원을 보며 석주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정원은 최대한 냉랭한 표정을 지은 채 석주를 방 밖으로 떠밀었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 * *
다음날 아침.
정원은 식탁 앞에서 마주친 석주를 향해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
답지 않게 서먹한 투로 대답하는 석주를 보며 괜히 고민하게 됐다. ‘가까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려니 오히려 행동이 더 어색해지는 것 같았다. 정원이 머쓱하게 물었다.
“의자를 빼 드릴까요?”
석주는 웃음을 참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하는 것인지 모를 애매한 표정으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라, 차마 그를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때 주전자를 들고 나타난 최 선생이 혀를 차며 말을 붙였다.
“내 말을 전혀 이해 못 한 모양이구만…….”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원은 구세주라도 본 것처럼 그를 향해 눈을 돌렸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억지로라도 가까워지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정원을 향해 그가 말했다.
“연인 행세라도 하라는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