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연인인 척을 하라고요? 그게 각인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황당해진 정원이 물었다. 그사이 석주는 정원이 빼 주려던 의자를 스스로 슬쩍 빼더니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아차 하는 심정으로 그를 돌아보았지만 석주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최 선생은 꼭 그 광경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심해하는 표정을 지은 채 앉아 있었다. 그가 말했다.
“감정적인 유대감이 있어야 하고, 심리적으로 가까워야 하고…… 이게 다 무슨 뜻이겠나?”
정원이 도로 최 선생을 향해 눈을 돌렸다. 확실히 연인 관계라면 심리적으로 가까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원은 문득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각인이라는 것 자체가 워낙 위험 부담이 크고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데다 제약까지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각인을 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지는 못했다.
그러니 그동안 본 각인한 에스퍼와 가이드를 떠올려 보도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또 정원이 그들의 관계에 일일이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니었던지라, 각인을 맺은 에스퍼와 가이드가 정확히 어떤 관계였는지는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정원이 아는 케이스를 모두 떠올려 보면…….
각인에 성공했다는 이들은 확실히, 연인 관계였다고 들은 것 같았다.
연인 관계여서 성공한 것인지, 아니면 상호 독점적인 각인 관계가 되는 바람에 연인으로 발전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곰곰이 생각에 잠긴 정원을 향해 그가 다시 말했다.
“적어도 지금 같은 상태로는 무리겠지. 잘 생각해 보게.”
“…….”
“나는 며칠 자리를 비울 거라네.”
고민하는 정원을 내버려두고 그가 말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석주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짐작하고 있을 텐데? 유 관장이 나를 불러내더구나.”
“……얼마 만이죠?”
“글쎄, 적어도 5년은 되지 않았나 싶은데…… 아무래도 석주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 챈 모양이야.”
얼굴을 찌푸린 채 그 대화를 듣던 정원이 석주에게 물었다.
“알고 있으면서 여기까지 찾아오지는 못하는 건가요?”
“어르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건 나뿐이거든요. 안다고 해도 찾아오기 힘든데, 모르면 불가능하죠.”
그래서 찾아오는 대신 최 선생을 불러내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들 때문에 멀쩡히 잘 지내고 있던 최 선생에게 애먼 불똥이 튄 꼴 아닌가. 사과하거나, 최 선생을 위해서라도 여기를 떠나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는 정원과 달리 석주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녀오세요. 아직 마음 읽는 능력에 당할 정도는 아니시죠?”
“허허…… 걱정은 티끌만큼도 안 되는 모양이구나.”
최 선생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석주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정원이 입을 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원은 불편한 기분으로 고민에 빠진 채 식사를 마쳤다.
자리를 비울 거라고는 했지만, 그게 당장 오늘부터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 선생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떠날 채비를 했다. 석주는 계속해서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최 선생의 준비를 돕더니, 뻔뻔하게도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며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조금 난처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보던 정원이 석주에게 물었다.
“이래도 괜찮은 게 맞나요?”
“그럼요. 곧장 유 관장 앞으로 갈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계시거든요.”
그런 게 있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지금 그런 걸 물은 건 아니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냐고 눈빛으로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는데, 석주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최 선생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 말을 새겨 듣게.”
떠난다더니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방으로 들어가는 게 다인가. 정원이 의아해하며 석주를 돌아보았다.
“가신 건가요?”
“네, 한번 열어 봐요.”
머뭇거리며 노인이 들어간 방문을 열어 보았다. 석주의 말대로 방 안은 정말 비어 있었다. 유 관장의 앞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도구라. 들어 본 적은 없지만 어떤 에스퍼의 능력일 거라고 생각하면 납득은 갔다.
확인을 마친 정원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방으로 향했다. 석주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왔다. 오지 않았더라도 부를 생각이었기에 다행인 일이었다.
정원이 말을 고르고 있을 때, 석주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정원 씨, 영감님 말씀에 너무 의미를 둘 필요는 없어요.”
“어떤 말이요?”
무슨 말인지 뻔히 알면서도 던진 질문이었다. 석주는 정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대답했다.
“능력이 사라져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몰라도 영감님도 혜안을 좀 잃으신 것 같고.”
신랄한 말투였다. 다만 정원의 질문에 대한 대답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떤 말이냐고 물어봤는데…….”
“알잖아요. 연인 행세를 하라는 말이요.”
“아뇨. 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예상하고 있던 말에, 정원은 빠르게 대답했다. 석주가 이 상황을 예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빠른 답을 예상하지는 못한 듯했다. ‘네?’ 하고 물으며 얼굴을 찌푸리는 석주를 향해 정원이 설명했다.
“모든 경우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제가 본 각인한 사람들은 거의 다 연인 관계였어요.”
“…….”
바로 부정의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원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강석주 씨의 예전 파트너…… 가족 같은 사이였다고 했죠?”
“……어떻게 보면요.”
애매한 대답이었다. 역시 그 상대를 완전히 가족처럼 친밀하게 여기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만큼 가깝지는 않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단순히 가족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관계였다는 뜻일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정원이 다시 물었다.
“그럼 연인이었나요?”
“그럴 리가요.”
석주의 대답은 빨랐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하듯 단호한 어조였다. 정원이 묘한 기분으로 다시 물었다.
“왜요. 그랬을 수도 있죠. 그럴 리가, 라고 할 일인가요.”
자신의 말이 너무 떠보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을지 괜히 걱정이 됐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원을 빤히 보던 석주가 단언했다.
“연애 감정으로 누굴 만나 본 적은 없어요.”
정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에게 다시 놀랐다. 이건 안도의 한숨인 건가.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스스로를 정당화해야 했다. 그야 두 사람이 연인이었는데도 각인에 실패한 거라면, 연인 행세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을 테니까…….
생각을 접어 두는 게 나을 듯했다. 왜 누군가에게 연애 감정을 품어 본 적이 없는지도 조금 궁금했지만, 그걸 지금 묻는다면 그야말로 부적절한 질문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사무적인 투로 물었다.
“연애 감정 말고 다른 이유로는 만나 본 적 있다는 뜻인가요?”
“오늘따라 질문이 많네요, 정원 씨…….”
석주는 답지 않게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다. 정원은 강경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연애를 해 본 적이 있냐고 묻는 거라면… 있기는 있어요.”
연애 감정은 아니었지만 연애를 하기는 해 봤다? 정원이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나쁜 남자라는 말을 듣기 딱 좋은 발언 아닌가. 묘하게, 아주 약간 신경이 쓰였지만 이번에도 불편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정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가요. 경험이 없어서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안 통하겠네요.”
“있다고 해 봤자 임무 때문이었어요. 연애 같은 걸 하기에는 좀… 바쁘기도 했고. 정원 씨도 그렇지 않아요?”
그의 말대로,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정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지만, 왠지 그가 적당히 상황을 모면하려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그러니까, 그가 누군가에게 연애 감정을 품어 본 적이 없는 데에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속일 정도는 됐다는 뜻이잖아요? 연인 흉내 정도는 어렵지 않겠네요.”
“하아…….”
귀가 막힌 것처럼 구는 정원을 보며 석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얼굴을 보니 묘한 오기 비슷한 것이 들기도 했고, 기묘한 충동이 끓어오르기도 했다. 석주를 노려보듯 응시하던 정원이 고개를 가까이 숙였다.
“뭐부터 하는 게 좋을까요?”
“이런 게 정말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해 봐야 알겠죠.”
“남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건 정원 씨 스스로를 속여야 하는 거잖아요.”
정원은 눈을 깜빡이며, 꽤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석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은 노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그는 ‘정원 씨 스스로를’이라고 말했다. ‘석주 자신까지 속여야 한다’는 말은 왜 하지 않는지가 조금 궁금했다.
정원은 담담한 낯으로 그에게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댔다. 석주는 짐짓 화가 난 듯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어요?”
그러나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는 다가가는 정원을 밀어내지 않았다.
혼란 끝에 그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