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78화 (78/126)

78.

석주를 향해 고개를 가까이, 더 가까이 숙였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에 혼란이 묻어났다. 코끝이 스칠 때까지도 정원은 눈을 감지 않았다. 석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된 지는 이미 오래였고, 남은 건 찰나의 고민뿐이었다.

이게 정말 맞는 건가. 예언 능력도 모두 잃었다는 뒷방 예언가의 말을 듣고 연인다운 모습을 보이겠다며 이런 촌극을 벌이는 게… 정말 옳은 선택인 걸까.

하지만 이만큼 거리를 좁힌 이상 이미 늦은 고민이었다. 정원의 눈에는 어느 순간부터 석주의 눈동자 속 들어찬 스스로의 모습밖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정원은 잠시 의사를 확인하듯 코끝을 스치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비틀었다. 마침내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대려던 때 석주의 손이 정원의 뒷목을 감싸 왔다.

망설인 것은 잠시뿐이었지만 잠시로도 충분했다. 강하게, 하지만 아프지는 않을 정도로 정원을 제게로 끌어당긴 석주가 먼저 입을 맞춰 왔다. 잠시 흠칫했지만 자신 역시 하려던 일이니 곤란해 할 이유는 없었다.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입을 열자 놀란 듯 잠시 동작을 멈춘 것은 오히려 석주 쪽이었다.

그러나 정원이 그랬듯 석주의 망설임 역시 길지는 않았다. 뜨겁고 촉촉한 것이 입술 사이를 가르고 막힘없이 흘러 들어왔다. 점막을 훑는 숨결이 이상하게도 낯설다거나 남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정원은 누군가와 입을 맞출 때면 이물을 받아들이는 것 같은 그 감각이 항상 불편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걸까.

부드러운 혀가 입안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짜릿함보다 안정감이 앞섰다. 정신을 차려 보면 정원 쪽에서 더 급하게 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했는데도 그만둘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정원은 석주의 뒤통수를 감싸 쥔 채 입안 깊은 곳까지 온기를 받아들였다.

석주와의 키스는 급박했다.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원이 생각하는 강석주는 폭주 직전에도 누군가를 이렇게 서툴고 거칠게 몰아붙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 주는 역설적인 짜릿함이 상당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세지 않았다. 숨이 막힐 때쯤 되면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입술을 부딪치기를 반복했다. 강석주와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분명 없었을 텐데도 왜 이렇게, 처음부터 원했던 것같이 다급하게 입을 맞추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한참이 지나서야 아쉬움을 담은 살갗이 떨어져 나갔다.

석주는 젖은 입술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이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정원은 잠시 멍하니 그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자신과 맞닿아 있었다는 것도, 또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도 현실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다시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석주의 표정은 멍한 정원과 달리 무거웠다. 화가 난 건가. 아니면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후자라면 뭐에 대한 회의감일까. 자신의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가.

그러나 그 말에는 허점이 있었다. 정원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식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는 이러고 싶었다는 뜻인가요.”

이런 식이라는 건 뭘까. 이렇게 목적이 있어 하는 키스가 싫다는 뜻이라면, 그런 목적성이 없는 스킨십을 바란 적은 있다는 뜻이 아닐까. 왜 이런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는지는 정원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석주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말장난이나 하라는 게 아니에요.”

정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번 그를 제게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다시 그에게 키스했다. 복잡한 생각이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정원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의무감도 아니고, 절박함도 아니었다. 그게 스스로도 낯설었다.

혀를 섞다 보면 문득 익숙한 기억이 스쳤다. 의식적으로 묻어 두어 거의 잊고 있었던 그날. 석주와 보냈던 밤 말이다. 딱 하루뿐이었고, 서로가 별일 아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묻어둘 수 있었던 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게 원래의 태도를 유지하는 건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의 관계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해도 결국에는 일이었다. 업무의 일환이기에, 가이딩을 위해 어떤 시간을 보냈든 다음날이 되면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어야 했다.

물론 그러다 연인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반대로 멀쩡한 연인이 파탄 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에스퍼 혹은 가이드가 비각성자의 연인일 경우 일을 위해 다른 사람과 섹슈얼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연인을 심적으로 감당하지 못해 이별을 고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런 일들은 모두 정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원은 가이딩 상대와 교제해 본 적도 없었고, 가이딩을 위해 섹스를 해야만 했던 경우에도 그 일을 다시 떠올리며 곱씹은 적도 없었다. 태연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당연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날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뭘까. 그 순간을 생각하며 민망함인지 뭔지 모를 감정에 휩싸이는 건 왜일까.

정원은 가늘게 눈을 떠 석주를 살폈다. 그는 어딘가 모르게 애가 타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다음, 또 그다음을 원하는 것 같은 얼굴이다. 어쩌면 정원이 하는 생각과도 같을지 모르겠다.

밀어내려는 듯 들어 올렸던 손이 지금은 정원의 뒤통수와 허리를 각각 단단히 붙든 채 떨어지지 않았다. 정원은 거부하지 않았고, 가늘게 뜬 눈으로 그와 눈을 맞추기만 했다.

석주의 손이 망설이듯 옷 위로 정원의 등을 쓸어 내렸다. 미묘한 감각보다도 그 손길 자체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다. 석주의 시선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계속해서 정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금세 감으려던 눈은 어느새 완전히 뜨인 채였다. 정원 역시 이 순간 석주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었다.

그러다 이번에도 역시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석주가 정원을 침대 위로 밀어 눕혔다. 매트리스가 꺼지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정원은 그가 곧바로 다시 키스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예상과 달리 석주는 그 상태 그대로 가만히 정원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집요한, 열망 섞인 눈동자. 왜인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이런 식으로 바라본 적 없었을 것 같다.

정원은 홀린 듯 입을 열어 물었다.

“이랬던 적이 있나요?”

멍한 질문이었다. 석주는 곧장 대답하지 않은 채 손을 뻗어 정원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그 감각 역시 썩 나쁜 것은 아니라 정원은 더 캐묻지 않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랬던 적이라는 게 뭐예요.”

잠시 시간이 지나서야 그가 되물었다. 여전히 정원의 머리를 만지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였다. 무심코 있는 그대로 입을 열 뻔했다. 다른 사람과도 이래 본 적이 있나요. 이런 식으로 당신을 스쳐 간 사람이 있나요. 그게 왜 궁금한지 이유를 생각할 자신도 없으면서.

“처음 각인을 시도했다던 때에도……. 이렇게 했나요?”

가다듬은 결과가 이거였다. 석주는 다시 아무 말 없이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어디 뚫리겠느냐.’ 같은 농담을 던졌다가는 정말 뚫려 버릴까 싶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 말을… 내가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석주의 대답이었다. 답이 섞이지 않은 모호한 말에 정원은 조금 초조해졌다. 작은 한숨을 뱉자 석주가 달래듯 정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없어요. 누구한테도 이랬던 적은 없어요.”

“…….”

“이렇게 하고 싶었던 적도…….”

“…….”

“이런 식인데도 내가 웃고 있는 게 웃기지 않아요?”

대답하지 않는 정원을 향해 웃으며 말을 늘어놓은 석주가, 마침내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다시 입술이 닿았다. 정원은 석주의 목을 양 팔로 끌어안았다. 석주의 손이 당연하다는 듯 옷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렇게 했다.

분위기에 잘못 휩쓸려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멈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주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석주가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정원이 듣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였다.

“정원 씨만 생각하겠다고 말했었잖아요.”

정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말을 듣는 것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겹쳐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마침내 석주는 기억하고 정원은 기억하지 못했던, 과거의 그 말이 범람하듯 흘러 넘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