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79화 (79/126)

79.

기묘한 경험이었다. 머릿속으로 기억이 범람하는 것 같았다. 영화가 재생되듯 장면이 흘러갔다.

처음엔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은 분명 예전의 자신이었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정원은 그냥 이 기억에 흘러가듯 자신의 몸을 맡기기로 했다.

“상태는 좀 어떤가요?”

“둘 다 썩 좋지는 않습니다. 일단 목숨을 건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예요.”

침대 옆을 둘러싼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중에는 연구원이나 의료진으로 추정되는 사람들,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당시 연구소장, 그리고 아직도 익숙한 얼굴인 유 관장이 섞여 있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위험할 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폭주 규모가 그렇게까지 클 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애초에 에스퍼가 능력을 빼앗긴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데, 그렇게 빈 그릇 같은 상태에서 이 정도의 폭주 규모를 만들어낸다는 건…….”

석주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했다. 능력을 빼앗겼다는 말, 그리고 이례적일 만큼 규모가 컸다는 폭주까지. 석주에게 들은 말과, 정원의 머릿속 희미하게만 남아 있는 그날의 기억에 모두 들어맞는 말이다.

“그걸 가이딩으로 막았다는 것도 대단하네요. 확실히 그 예언이 틀린 말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들은 유 관장은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이것은 정원 자신에 대한 말 같았다. 저 사람들은 아마도 정원이 진짜 예언 속 그 가이드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관장은 그 사실 때문에 곤란해하는 것일 테고.

“관장님, 환자가 깨어난 모양입니다!”

정원을 살피고 있던 의료진이 말했다. 관장은 성큼성큼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린 정원에게 말을 걸었다.

“정신이 좀 드나?”

“…….”

혼이 나간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던 정원의 눈에 금세 생기가 돌아왔다. 활활 끓는 용암 같은 눈이었다. 성치 않은 몸을 벌떡 일으킨 정원이 외쳤다.

“그 사람은 어디 있죠? 그 자식은……!”

“우선 진정하도록 해. 여전히 정신이 덜 든 모양이군.”

관장이 정원의 어깨를 눌러 진정시켰다. 결코 상냥하지 않은 동작인 데다, 막 깨어난 상태인지라 괜찮을 리가 없었다. 작게 신음한 정원이 어깨를 감쌌다. 관장은 아무렇지 않게 그런 정원을 떠밀어 자리에 눕혔다. 바로 옆에서 의료진의 당황한 듯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헙……! 관장님, 환자입니다! 그렇게 다루시면 곤란해요.”

“자네가 본 건 그 남자가 아니야.”

의사의 입바른 말을 무시하고 관장이 말했다. 드러누운 상태 그대로 정원이 대꾸했다.

“그렇다면……!”

“아는 사이였다고 하던데?”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의연한 태도에 의사는 놀란 것 같았지만, 관장은 태연했다. 그 말을 들은 정원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 머릿속으로 어린 석주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애먼 소년과 사장을 겹쳐 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아, 설마. 그렇게 중얼거린 정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탈함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빠르게 진정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관장은 그제야 태연하게 말했다.

“몸은 좀 괜찮나?”

“제가 막은 게 그러면… 그 에스퍼인가요?”

관장의 질문을 무시한 정원이 뭉뚱그려 질문했다.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는 서로 잘 아는 부분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관장이 말했다.

“깨어나는 대로 만나 볼 수 있게 해 주지.”

“굳이 그럴 필요는…….”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는 듯 비관적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정원은 곧 고개를 저으며 말을 고쳤다.

“아닙니다, 만나 볼게요. 착각한 걸 사과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목숨을 구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하겠다는 말. 관장은 재미있는 발상이라는 듯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들어왔으면 깨우지 왜 그렇게 서 있어?”

장면이 전환되듯, 정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눈을 깜빡이니 정원의 침상 옆에 서 있는 석주의 모습이 보였다.

“…잘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머쓱한 듯 중얼거린 석주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정원은 한참 만에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석주를 바라보았다.

“몸은 괜찮아? 거의 폭주할 뻔했으니까, 상태가 많이 안 좋을 텐데…….”

“너야말로……. 몸이 말이 아닐 거라고 들었어.”

“가이딩을 했을 뿐인데, 뭐.”

그야말로 어색한 대화였다. 힐끗 보았을 뿐이지만 서로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뻔했다. 정원은 서 있는 게 고작인 것 같은 석주의 불안정한 기운을 보고 한숨을 쉬었고, 석주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정원을 보며 답지 않게 눈치를 살폈다. 다시 입을 연 것은 정원이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심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죽어 버리라는 말?”

석주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거니와,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입에 담는 석주의 모습이 당황스러워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

“그렇지만 네가 죽이기 전까지는 죽지 말라는 말?”

“…별말을 다 했네.”

덧붙인 석주의 말에 정원이 난감한 듯 중얼거렸다. 석주는 천천히 정원의 옆으로 다가와 침대 옆 의자에 몸을 앉혔다. 정원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자 뒤늦게 질문이 나왔다.

“앉아도 돼?”

어딘가 기계적인 물음. 그게 예의라는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 같은 투였다. 묘하게 상식이 결여된 것 같은 태도는 석주가 에스퍼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교육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정원이 웃으며 말했다.

“이미 앉아 있으면서?”

“…….”

“미안해. 심한 말 한 거.”

“나한테 왜 사과하는지 모르겠어. 날 구해 준 거잖아.”

머뭇거리며 나온 사과에 석주는 정말로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원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말로 상처를 줬잖아. 목숨을 구해 준다고 다가 아니야. 그리고, 그렇게 좋은 목적으로 한 일도 아닌데 감사를 받는 것도 이상하고……”

“…….”

“난 너를 싫어하는 게 아니니까, 사과하고 싶었던 거야.”

그 말을 들은 석주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것이 어떤 표정인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아마 석주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를 것 같았다. 그러나 분명히 싫어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에 가까운 얼굴. 정말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것 같은 애틋함이 담긴 표정이었다.

정원은 그 눈으로부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석주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상처받지 않았어.”

상처받는다는 게 뭔지 모르는 건 아니고?

그렇게 묻고 싶었다. 석주는 인간적인 감정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보였으니까. 그러나 정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 남자가 그렇게 미운 거지. 밉고 싫은 거지?”

석주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계속 생각해 봤어. 이 기분이 뭔지.”

“…네 기분?”

“한 가지 확실한 건, 네가 날 구해 줬으니까……. 나도 널 도와주고 싶다는 거야.”

그 말을 하는 석주는 올곧은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속삭이는 석주의 말을 듣고 정원이 눈을 크게 떴다. 흠칫 놀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랬구나. 단순히 자신이 그의 폭주를 막은 것으로 끝이 아니었던 거다. 깨어난 뒤로 다시 그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정원은 자신이 기억을 잃은 것이 그의 폭주를 막았을 당시에 받은 충격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를 사장으로 착각해 폭언을 늘어놓은 데다, 억지로 온 힘을 다해 가이딩을 하기까지 했으니. 기억을 잃을 만큼의 충격을 받았다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눈앞에 스치는 기억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깨어난 뒤 석주를 만났고, 자신을 저렇게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와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다. 그리고 ‘널 도와주고 싶다.’는 절절한 말까지 들었다. 그런데 왜… 이제까지 잊고 있었던 걸까?

그때 머릿속으로 스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런 걸 기억하게 둬 봤자 좋을 게 없어.’

‘왜인가요, 관장님? 이 둘이 가깝게 지내면 기관 측에도 전력이 될 텐데요…….’

‘너무 가까워지게 할 필요는 없겠지. 허튼 생각을 품으면 곤란하니까. 무엇보다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어 봤자 본인도 괴롭지 않겠나?’

상대의 호칭만 들어 봐도 알 수 있었다. 관장의 목소리라는 걸.

‘조금만 건드리면 돼. 딱 이 며칠간의 기억만…….’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안개가 걷히듯 머릿속이 깨끗해지고, 정원은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인 것은 또 다시, 석주의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정원은 홀린 것처럼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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