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그대로 체중을 가득 실어 석주를 끌어안았다. 그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휘청이지는 않았다. 틈 없이 안겨 드는 정원을 받아 안으면서도 미동 없이 안정적이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다. 그러나 이미 악몽을 꾼 뒤의 정원을 본 적이 있어서인지, 석주는 의아해하면서도 그의 상태를 납득하는 것 같았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정원 씨, 기절했던 건 기억나요? 악몽이라도 꿨어요?”
“괜찮아요.”
즉각 대답했다. 이미 한계까지 닿아 있음에도 급하다는 듯 몸을 비틀어 가까이, 더 빈틈없이 석주를 끌어안았다. 안은 몸이 잠시 굳는 것이 느껴졌지만 석주의 상태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갑작스럽게 흘러든 정보 때문에 과부하가 올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울 일인가.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게 실은 남이 일부러 지워 낸 부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정신이 없고 화가 날 수는 있지만, 지금의 이 감정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본 광경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석주의 눈동자를.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는 것처럼 뜨거운,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그 눈을.
“괜찮아요…….”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말할 수도 없으면서, 계속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정작 달래는 것처럼 정원의 등을 쓰다듬는 것은 석주 쪽이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들어 석주의 얼굴을 바라봤다. 꿈에서 본 어리고 미숙한 모습의 소년이 아니라, 완벽하게 여문 남자가 눈앞에 있다. 그 황금색 눈동자는 꿈에서 보았던 것과 조금의 차이도 없는 온도를 가지고 있다. 소중한 것을 대하는 것처럼 뜨겁고, 걱정하듯이 흔들리고 있는 눈.
그의 눈을 보며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해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그와 별반 차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거의 확신했다. 정체 모를 애틋함이 가슴을 메웠다.
겨우 그 짧은 장면을 보았을 뿐인데. 그저 그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편이 되어 주겠다고 말했던 석주를 보고, 그 순간의 심정을 겪고 깨어났을 뿐인데……. 그 사실이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다는 게 신기했다.
이럴 거라 예상했기에 관장은 정원의 기억을 지운 것일까. 정원에게 이런 애틋함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지금은 그런 원망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눈을 마주 보고 있을수록 머릿속이 끓는 듯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기분을 해소하고 싶었다.
정원은 그대로 석주의 목을 안은 채 가까이 끌어당겼다. 온 체중을 다해 끌어안았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았을 만큼 단단한 몸이 그 가벼운 동작에 속절없이 끌려왔다. 정원의 손길에는 힘주어 저항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뜻이다.
망설이지 않고 석주의 입술을 물었다. 지난 키스와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달랐다. 석주는 이번에도 살짝 당황한 것 같았지만, 정원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은 손에서 힘을 풀지는 않았다.
길어진 키스 탓인지 그의 것은 이미 반쯤 부풀어 있었다. 하의 겉으로 느껴지는 윤곽을 손으로 꾹 누르자 석주의 미간이 곤란한 듯 찌푸려졌다.
“뭐가 다음이라는 건가요. 이런 상태로…….”
“…참을 수 있어요, 짐승도 아니고.”
못마땅한 목소리에 가볍게 웃음이 흘렀다. 묘한 것은 석주가 정원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잠시 멍하니 표정을 풀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눈빛에 잠시 당황했지만 틈을 놓치지는 않았다. 정원은 부드럽게 손의 각도를 틀었다. 옷 위로 부드럽게 그의 것의 윤곽을 더듬다가 사이로 손을 밀어 넣은 것이다.
평소에는 벨트로 단단히 조여 매 틈이 없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이곳에서 빌려 입은 옷은 맵시 있는 정장 바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원을 안은 석주의 손이 흠칫 떨렸다. 과감하게 굴면서도 민망한 기분이 아예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 차마 석주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는 않고 있던 정원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떨림에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고개를 들어 석주의 얼굴을 살폈다.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성기 끝을 스치자, 이를 악물고 있던 표정이 완전히 흐트러지는 것이 보였다.
이래도? 라고 말하는 것처럼 짓궂은 손길. 석주가 조금 사납고 거친 웃음소리를 흘렸다. 정원은 반사적으로 느꼈다. 지금이 그 말을 할 때라는 걸.
“다……. 다 기억났어요.”
옷 속에 손을 집어넣고 할 말은 아닌가. 풀어지는 얼굴을 보며 웃는 것도 잠시, 석주가 가볍게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요?”
뭘 가리키는 건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확인을 위한 질문이겠지. 정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고 있잖아요. 우리 어렸을 때…….”
그가 그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말이 어떤 기폭제가 된 것 같았다.
석주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가, 묘한 환희로 젖었다가, 울듯이 일그러지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곧 확실한 열기를 띠었다. 석주는 덤벼들듯이, 또 물어뜯을 듯이 입을 맞춰 왔다. 몰아붙이는 키스에 머릿속이 혼곤해졌다. 이빨끼리 부딪치는 소리에 웃음을 흘릴 겨를조차 없었다. 그 서툰 모습마저 달가웠다. 정신없이 입술이 뒤섞였다.
맞닿은 혀의 온도가 평소보다 뜨겁다고 느낀 건 착각일까. 난잡하게 느껴질 만큼 급하게 입안을 헤집는 열기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급한 동작에 벽까지 밀려나 등이 찬 벽에 닿았음에도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정원은 고개를 비틀며 남는 손으로 석주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키스가 길어질수록 석주의 성기는 손 안에서 착실하게 부피를 키워 가고 있었다. 핑계를 대라면 댈 수 있었다. 지금의 이 접촉은 각인을 위한 과정이라고. 그러나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인정한다. 지금 정원이 그와 키스하고 있는 건 어떤 목적성도 없는 행위였다. 굳이 따지자면 확인이 하고 싶어서일까. 지금 이 기분이 뭔지. 대체 왜 그 기억이 서로를 이렇게 다급하게 만든 것인지.
처음으로 그가 에스퍼고 자신이 가이드라는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석주의 기운이 흐트러진 것을 느끼며 그가 지금 자제하기 힘든 상태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정원은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보며, 보란 듯 석주의 손가락을 끌어다 입에 물었다. 흥분으로 가득한 얼굴을 보니 그것만으로도 전에 없이 성감이 고조됐다. 혀를 써서 검지와 중지를 정성껏 적셨다. 애무의 목적으로 시작한 행위가 아닌데도 전희 같았다. 석주의 미간이 조금씩 찌푸려지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일까.
가만히 받고만 있던 석주의 손가락이 곧 입안에서 구부러졌다. 민감한 혀 아래쪽이나 입천장, 말랑한 입안 벽을 비비는 손길에 정원 역시 점차 머리가 몽롱해졌다. 이런 적이 없었건만 자꾸만 다음을, 그다음을 바라게 된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석주가 중얼거렸다.
“다 된 것 같은데.”
“…….”
대답 대신 살짝 눈을 피했다. 민망해하는 정원을 굳이 짓궂게 놀리지 않고, 석주는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리 들어 보세요.”
젖은 목소리. 침대 위로 정원의 몸이 눕혀졌다. 석주는 난폭하게 밀어붙이려는 것을 겨우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손이 거침없이 옷 안을 헤집고 들어왔다. 길쭉한 손가락이 속옷을 끌어내리고, 두꺼운 손바닥으로 성기가 짓눌려지듯 비벼졌다. 정원의 고개가 젖혀지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미 반쯤 발기한 것은 정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고된 자극이었음에도 허리가 저절로 튀었다.
“잠, 잠시만…….”
급히 몸을 뒤틀었지만 그럴수록 고정된 손바닥에 앞을 비비는 꼴이 될 뿐이었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렇게 될 것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강, 강석주 씨…….”
이름을 불러 봤자 크게 소용은 없었다. 석주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멈춰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귀두를 자극하는 손길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이를 악물고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석주가 앞을 건드리지 않는 한 팔로 정원의 두 손을 한데 쥔 것이다.
정원의 손목이 그렇게 쉽게 붙들릴 만큼 가늘고 연약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석주는 남는 틈을 순전히 힘으로 짓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막은 것뿐이었다. 낯이 홧홧해졌다.
당황한 정원이 고개를 저으며 뭐라 입을 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다시 한번 이어진 키스가 말문을 막았다.
느릿느릿 옮긴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뒤쪽을 향했다. 남의 것을 받아들인 경험이 있다고는 하나 익숙하다 말할 정도는 못 된다. 한 손으로 엉덩이를 잡아 벌리는 행위가 너무 난잡하게 느껴져 이제는 얼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하다못해 붙들린 팔이라도 해결하기 위해 급히 입을 열었다. 손, 손 풀어 주세요. 아무것도 안 할게요. 아무것도…….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 석주는 말없이 정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뒤에야 손목을 감싼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 손은 그대로 내려와 정원의 입안을 헤집는다. 거칠고 여유 없는 동작이었다. 난폭하다 느낄 만큼. 젖은 손은 이미 아래쪽에 자리 잡은 다른 손을 따라 내려간다. 정원의 한쪽 다리를 들어 제 어깨 위에 걸친 석주가 그 길로 젖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입구를 더듬는 손길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먼저 시작한 쪽은 자신이니 물러설 수도 없다.
잇새로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흐른 것 같았다. 과연 자신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맞는지 확신은 없다. 이미 수치심을 넘어서는 흥분 때문에 눈앞이 흐려진 상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던 약속도 잊은 채, 정원은 가쁜 숨을 흘리며 팔을 뻗어 석주의 목을 끌어안았다. 석주는 웃음기 없이 오직 열기뿐인 얼굴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짐짓 느긋한 체하며 앞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정원이 다시 우는 듯한 소리를 냈다. 석주가 속삭였다.
“각인하자.”
그답지 않은 반말. 지적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그 말이 어떤 고백보다도 무겁게 들렸다는 건. 정원은 대답 대신 석주의 아랫입술을 길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