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83화 (83/126)

83.

정원은 석주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조금도 거칠지 않은 손길이 석주의 눈가에 닿았다.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검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힘없는 목소리로 정원이 물었다.

“왜…… 울고 그래요.”

석주는 말없이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든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려 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자꾸만 눈이 감겨 왔다. 방금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힘들었던 것일까. 체력이 그렇게 많이 떨어져 있었나. 기묘한 고양감이 몸 안을 감돌고 있었다.

석주는 대답하는 대신 역으로 정원을 향해 손을 가까이 가져왔다.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는 듯한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 정원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그만 울어요…….”

“…정원 씨 표정은 왜 그래요.”

자신의 표정이 어떻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답은 반사적으로 나왔다.

“우는 게 보기 싫어서…….”

이유는 모르겠다. 그의 우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게 전부였다.

석주는 그 대답을 듯고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몸을 숙여 정원의 뒷목과 허리를 가까이 당겼다. 정원을 한껏 끌어안은 채 그가 속삭였다.

“힘들 거예요. 쉬어요.”

“…….”

그 말에 안심해 버린 것일까. 억지로 붙들고 있던 정신이 흐려졌다. 등허리를 도닥이는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정원은 느린 숨을 몇 차례 뱉었다.

천천히 눈이 감겼다.

깊은 잠에 빠져들기 직전, 석주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웃음기인지 울음기인지 모를 약한 숨소리가 섞인 음성으로.

“꼭 빨리 일어나요.”

이상한 말이었다. 꼭 정원이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을 걱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 * *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중요한 걸 놓쳐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약속이 있는 날에 늦잠을 자 버린 것만 같은 낭패감.

정원은 퍼뜩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드러운 백색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활짝 열린 창틈으로 조금도 차갑지 않은 공기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익숙한 듯 낯선 침대. 낯선 곳에서 잠들었던 것은 맞지만, 잠들기 전과도 영 다른 풍경 같았다.

여기는 어디지. 아무리 둘러봐도 생전 처음 보는 곳이었다. 정원은 의아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상할 만큼 몸이 가벼웠다. 잠들기 직전 그런 일이 있었으니, 당연히 어느 정도는 피로하고 상태가 좋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아해하며 문을 열고 나와도 낯선 광경은 그대로였다. 깨끗하지만 생활감이 묻어나는 집 안. 환한 복도를 지나 잘 꾸며진 거실이 있고, 문을 열고 나서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주위를 둘러본 정원이 작게 입을 벌렸다. 정원은 쏟아지듯 바람이 흘러드는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분명 바닷가에…… 있지 않았나.

어쩐지 확신이 없이 가물가물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더라? 정원은 한참 동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주위에 다른 인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동화책 속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운 풀밭만이 펼쳐져 있었다. 언덕 아래 풍경은 먼 세상의 것처럼 동떨어져 보였다. 아주 작게만 보이는 집들이 먼 곳에서 굴뚝 위로 연기를 피워 내고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나. 영화나 책 바깥에도.

그때 저 멀리서 조그만 그림자가 보였다. 언덕을 타고 성큼성큼 걸어 올라오는 그 남자의 머릿결이 바람에 나부꼈다. 정원은 걷잡을 수 없는 반가움에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옮겨 그가 다가오는 방향 쪽으로 걸어갔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강석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를 향한 정체 모를 반가움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어도.

석주는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정원의 바로 앞에 선 그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정원이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는 사이, 석주는 자연스럽게 정원의 양 어깨를 쥐더니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일어나 있었어?”

다정한 목소리. 그리고 그만큼이나 친근한 말투. 그의 존댓말에 익숙해져 있던 정원은 흠칫 놀라 인상을 찡그렸다. 석주는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꽤 이른 시간인데. 아직 자고 있을 줄 알았더니.”

“난…….”

정원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여전히 의아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어쩐지 말은 막힘없이 흘러 나왔다.

“원래 빨리 일어나잖아.”

가벼운 대답. 그랬다. 정원은 원래 빨리 일어나는 편이었다. 몸에 밴 습관 탓에 얼마 되지 않는 쉬는 날에도 늦게 깨는 날이 없었다. 정말로 녹초가 되어 늘어진 날이 아닌 이상은 항상 그랬다.

그러나 석주는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정원의 귀에 대고 작게 웃을 뿐이었다.

“그랬지. 그랬는데… 아니게 된 지 좀 됐잖아.”

그가 짓궂게 웃으며 정원의 코를 꼬집었다. 당황스러울 만큼 친근하고 장난스러운 스킨십. 정원은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며,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코를 더듬었다. 뭐지? 석주는 아무렇지 않게 등을 돌려, 방금 전 정원이 나온 집 쪽으로 다가섰다.

아니게 된 지 좀 됐다……. 알 수 없는 말의 내용보다도 너무나 다정한 그의 태도가 더 신경 쓰였다. 이건 꼭….

연인의 일상 같은 모습 아닌가.

석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그제야 집의 모습이 똑바로 눈에 들어왔다. 그림책에 나올 것 같은 오두막이었다. 나무로 된 지붕 위에 파랗고 노란 새 두 마리까지 올라 앉아 있는 모습. 이렇게 인적 없는 곳에서, 작고 멋진 집에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정원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거실 소파를 향해 걸어가는 석주의 모습을 보니 당연하다는 듯 입이 열렸다.

“마실 거라도 줄게.”

자신도 모르게 뱉은 말이었다. 말투가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째서인지 석주를 따라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뱉게 됐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런 말투로 대화했다는 것처럼. 정원은 어색하게 석주를 앞질러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몸에 밴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엌이 있는 곳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당연하다는 듯 주전자를 꺼내고, 찬장에서 티백도 하나 꺼내 물을 올렸다. 어디선가 맡아 본 적 있는 것 같은 은은한 차 향이 부엌을 가득 메웠다. 들고 있던 짐을 푸는 것인지 거실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던 석주가 잠시 조용해졌다.

묘한 긴장감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바짝 신경을 기울이게 됐다. 더는 석주의 소리가 들리지 않자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그의 옆에 있는 것이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이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낯설었고, 너무 친근한 그의 태도가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쁘다기보다는 좋은 쪽의 당황이었기 때문에…….

“다 됐어?”

바로 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정원이 화들짝 놀랐다. 석주는 놀란 듯한 숨소리를 내더니, 다시 정원의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졸지에 그에게 안기다시피 기댄 정원은 숨을 멈춘 채 눈을 크게 떴다. 괜히 보글보글 끓고 있는 주전자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조심해야지…… 불 앞에서.”

낮은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려 왔다. 묘하게 섹시하게 들리는 음성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그 반응에 석주는 아무 망설임 없이 정원을 뒤에서부터 꼭 끌어안아 왔다.

“추워?”

“…그런 게 아니라.”

“오늘 왜 이렇게 뻣뻣해?”

간지러운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석주는 그대로 정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더니,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처럼 가볍게 머리를 부벼 왔다. 뒷덜미에 솜털이 오소소 곤두서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나쁜 의미로 소름이 끼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순간 뱃속이 간질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문제였다. 정원이 곤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좀 떨어져 봐.”

“왜애.”

어린아이처럼 길게 끄는 말끝. 당황스러울 정도로 살갑고 애교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더 당황스러운 것은 어느덧 그의 이런 모습을 당연하다는 것처럼 받아들여 가는 자신이었다.

대체 뭐지……? 뭔가를 놓친 것 같았다. 정원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자신을 향해 기댄 석주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충만한 안정감이 가슴속을 채웠다. 석주는 정원의 목을 간지럽히려는 듯 다시 작게 웃더니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이어지는 짧은 입맞춤.

부드러운 입술이 정원의 입술을 자근자근 물었다. 무심코 질끈 눈을 감은 정원이 석주의 뒷머리를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가득 담겼다.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은은한 차의 향기.

맡아본 적 있는…….

그 순간 정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반사적으로 석주의 가슴팍을 밀쳐냈다. 석주는 예상했다는 것처럼 정원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가 말했다.

“일어날 시간이야.”

그리고 정원은 다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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