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84화 (84/126)

84.

“정신이 들어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언뜻 듣기에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서늘한 손길이 마음에 들었다. 꿈에서 깨기 직전 느꼈던 당황스러움이 진정되기에는 충분했다. 정원이 비몽사몽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

“이거…….”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정원이 목을 한번 가다듬었다. 다시 입을 여는 말투는 여전히 몽롱하게 잠겨 있었다.

“이게 무슨 향이야?”

반말을 뱉어 버린 것은 꿈의 연장선이었다. 석주는 한손으로 정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또 다른 손으로는 정원의 굳은 손을 맞잡은 채 멍하니 대꾸했다.

“향…… 향이요. …아, 향.”

혼이 빠진 것 같은 말투였다. 정원의 상태를 살피는 데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탓일 것이다.

“뭘 좀 피워 뒀어요.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뭔가 익숙한 향이 나는데…….”

석주의 말투는 잠들기 전과 마찬가지로 차분한 존댓말이었다. 다정한 손길이지만 말투와 손길에 모두 기묘한 거리감이 섞여 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찰나의 꿈이 너무 큰 영향을 미쳐 버렸나 보다.

“아. 차로 마신 적이 있어서 그럴 거예요. 영감님이 타 주셨으니까…….”

“아…… 그래서.”

석주가 애써 침착하게 설명했다. 목소리가 흔들리는 걸 보면 제법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 같은데. 이유가 뭘까.

“이상한 효과가 있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걱정 안 하는데…… 나한테 못 할 짓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완전한 반말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말투. 신뢰가 섞인 말에 석주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곧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컨디션은 어때요. 많이 안 좋아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당황스러운 꿈을 꾸다가 깨서.”

멍한 말투로 대꾸하다 보니 드디어 정신이 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원이 급히 고개를 돌려 석주를 바라보았다.

“각인은…… 어떻게 된 건가요?”

“잘 끝났어요.”

즉답이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말임에도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각인이라는 건 분명 목숨이 달린, 위험하고 심각한 절차라고 하지 않았던가. ‘각인하자’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어도 그 섹스만으로 모든 게 끝났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잘 끝났다니.”

미심쩍은 투로 중얼거리고 석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원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이상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뭘 한 기억이 없는데. 섹스 말고는…… 원래 그렇게 쉽게 끝나는 거였나요.”

다시 물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각인에 실패해 목숨을 잃는 경우에는… 섹스 도중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는 건가?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보다 그렇다면 석주는 앞선 각인 시도에서도 같은 방법을 썼던 걸까.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이런 감정도 꿈의 여파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못마땅한 기분을 가라앉혔다.

석주는 정원의 손을 주무르며 설명했다.

“각인할 때에는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자기 기운을 완전히 쏟아부어야 해요. 단순히 가이딩을 할 때랑은 비교가 안 되는 수준으로. 굳이 비유를 하자면 폭주할 때처럼……. 전부 쏟아낸다고 보는 게 맞겠죠.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역시 섹스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고요.”

정원이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말이었다. 이전 파트너와도 이렇게 각인을 맺으려 했던 걸까? 순간 궁금해했다가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다니……. 그로서는 너무 민망한 일이었다. 차마 티를 낼 수 없어서 덤덤한 척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석주는 꼭 정원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씩 웃더니 말을 이었다.

“기관에 각인 신청을 할 경우에는 장치를 써요.”

그 장치가 에스퍼의 기운을 진정시키고, 가이드로 하여금 좀 더 쉽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그런 것도 없는 환경에서, 보통의 에스퍼도 아닌 강석주의 기운을 받아들인 것이다. 관계가 주는 쾌락에 취해 그런 복잡하고 심각한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잠들기 직전 너무 기운이 빠진다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나.

“용케 성공했네요.”

“그렇죠. 정원 씨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어요.”

“…….”

잠시 서먹한 공기가 지나갔다. 정원은 불길한 예감에 입을 열어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요?”

석주는 미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원 씨 잠든 지 오늘로…… 사흘 째였나. 나흘인가.”

“아……. 오래 걸리긴 했네.”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성공했다고 생각한 건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석주의 얼굴이 퀭해 보인다 했다. 일어난 자신을 반기는 태도도 어딘가 넋이 빠진 것 같았고. 그게 다 며칠 동안 속앓이를 한 탓인가 보다.

“며칠 동안 잠은 잤어요?”

“…….”

“밥은?”

“음.”

석주가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눈을 피했다. 한 끼도 안 먹고, 잠도 자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정원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쉬어 가면서 봤어야죠.”

너무 잔소리를 하나. 그래도 걱정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석주는 여전히 정원의 손을 소중하게 쥔 채로 눈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그래요.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던 건데.”

“멀쩡히 잘 살아났는데 그런 불길한 소리를 다 하네.”

정원이 반쯤 농담조로 투덜거렸다. 석주는 웃으며 그런 정원을 마주 보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웃음기보다 다른 감정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눈가가 촉촉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자신의 눈에 필터라도 낀 건가.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마음고생이 심했나.

그 모습을 보니 꿈에서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리던 석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런 꿈을 꾼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음에 걸렸다. 정원이 조용히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조금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말을 놓을래요?”

이유는 간단했다. 꿈에서 본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에. 단순히 말투를 바꾸는 것만으로 이룰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들은 석주는 한쪽 눈썹을 휘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장난기 어린 되물음이 돌아왔다.

“갑자기 말을?”

“아니, 뭐……. 예전에는 그랬잖아요?”

차마 방금 그런 꿈을 꿨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고, 오래전을 들먹였다. 그러나 얼떨떨한 얼굴로 웃고 있는 석주를 보니 실수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원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아니다……. 잊어버려요. 이상한 꿈을 꿔서 잠깐 헛소리를 한 것 같네요.”

“무슨 꿈이었는데?”

석주가 물어 왔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놀란 것 같더니 놀랍도록 적응이 빨랐다. 일부러 말을 놓은 거겠지. 정원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그건 알 거 없고.”

“자는 동안 내 꿈 꿨어?”

유들유들한 목소리였다. 자신이 먼저 꺼낸 말이지만 놀림당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원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표정을 홱 구긴 뒤 눈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석주가 하하 웃으며 손을 뻗었다. 뺨과 귀를 매만지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말을 놓으라고 한 거지 스킨십을 하라고 한 게 아니라며 쏘아붙일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미 갈 데까지 간 사이에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스운 듯해 입을 다물었다.

“왜 짜증 내. 난 형 잠들어 있는 동안 형 생각밖에 안 했는데. 공평한 거 아닌가?”

“무슨…….”

형이라니? 말문이 막히고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 은근한 말투 때문인지, 여전히 뺨을 쓰다듬고 있는 손길 때문인지. 어쩌면 형이라는 호칭 때문일 수도 있겠고, 자신만을 생각했다는 간지러운 말이 문제였을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총체적으로 간질간질한 기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정원이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석주의 손을 밀어냈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여전히 톡 쏘는 투였다.

“그만해. 말 놓지 마.”

“왜? 먼저 하라고 해 놓고? 줬다가 뺏는 거야?”

완전히 맛을 들인 건지 장난기가 역력한 투였다. 정원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반말하지 말라고요.”

그러나 표정관리를 못 했던 걸까. 석주는 조금도 겁먹지 않은 얼굴로 웃기만 했다. 정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우는 줄 알았던 게 잘못이지…….”

“내가 우는 것 같아 보였어요?”

어느덧 원래대로 돌아온 말투. 이러니저러니 해도 끝까지 우기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정원이 한숨을 쉬었다. 다행인데…… 왜인지 아쉽기도 했다.

“캐묻지 마세요. 착각했다고요.”

“착각이라고는 안 했는데?”

그러면 울 것 같았던 얼굴은 사실이었나. 지금의 말끔한 미소를 보면 그게 방금 전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았지만. 정원은 괜히 딴청을 피우며 말을 돌렸다.

“내가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던 거면 이제 시간이 없겠네요.”

석주는 더 이상 짓궂게 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아요. 이제 여기도 곧 떠나야겠죠.”

“선생님은 아직 안 돌아오신 건가요.”

“네. 생각보다 좀 길어지네요…….”

석주가 조용히 말을 흐렸다. 잠들어 있는 정원을 신경 쓰느라 거의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고 고백하는 표정이 꽤 심각했다. 석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원이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잠깐 나가서 걸으면서 얘기할까요.”

드물게 먼저 꺼낸 제안이었다. 석주가 놀란 듯한 얼굴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느릿느릿 설명을 덧붙였다.

“어차피 여긴 곧 떠나야 할 거라면서요. 산책이라도 좀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별것도 아닌 말에 석주의 얼굴이 티 나게 밝아지는 것을 보니 은근히 만족스러웠다. 정원은 따라 피어나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몸을 돌리고 겉옷을 챙겼다.

그때 창문을 툭, 툭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부딪치는 듯한 소리였다. 옷을 챙겨 입다 말고, 정원이 홱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불길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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