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석주는 보호하듯 정원의 앞을 가린 채 창문을 열었다. 문을 두드린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두운 색의 새 한 마리가 창문 앞에 멀뚱멀뚱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경계하는 정원을 뒤로 살며시 밀어 놓고, 석주가 성큼성큼 새를 향해 다가갔다.
문을 두드린 것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사람이 손을 뻗어도 전혀 도망치지 않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훈련받았거나 에스퍼의 능력을 통해 길들여진 새 같았다. 석주는 얌전히 창가에 앉은 새를 살펴보더니 가볍게 그 다리를 쥐었다.
“발에 뭐가 묶여 있네요.”
“새라니… 고전적인 방법이네요.”
전서구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석주는 담담하게 새의 발에서 쪽지를 풀어내며 대답했다.
“이런 능력을 가진 에스퍼도 있으니까요.”
동물과 교류하는 에스퍼라면 정원도 본 적이 있었다. 납득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석주가 쪽지 내용을 확인했다.
“어르신 글씨체네요. 당분간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적혀 있어요.”
돌아오지 않았다던 최 선생에게 일신상의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정원은 대번에 심각한 표정이 됐다. 최 선생은 유 관장의 부름을 받아 떠난 것이었다. 유 관장이 그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건지, 아니면 다른 변고가 생긴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정원은 석주를 향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쪽지를 건네달라는 것이었는데, 석주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누가 손을 달랬나요.”
그 와중에 장난스럽지도 않고 진지한 표정이라서, 장난을 친 것인지 진심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최 선생에게 문제가 생긴 거라면 심각한 상황이 분명한데, 그런 상황에 실없는 장난을 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혼란스러웠다.
정원의 말에 그제야 손을 뒤로 물린 석주가 쪽지를 건네주었다. 구깃구깃 접힌 쪽지에 희미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당분간 돌아가기 힘듦.
빨리 장소를 떠날 것.]
두 줄뿐인 메시지였다. 단순히 돌아가기 힘들다는 것만이 아니라, 여기를 떠나라는 메시지까지 함께 적혀 있었다. 이곳의 위치를 들키기라도 한 걸까. 긴장 때문에 쪽지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정원과 달리 석주는 태연한 태도였다. 정원의 손 위로 다시 손을 겹친 석주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됐네요. 마침 정원 씨도 일어났고, 어차피 섬은 곧 떠날 거였으니까.”
그 말을 들으니 또 거짓말처럼 마음이 안정되었다. 순식간에 요동치는 자신의 감정이 조금 바보같이 느껴졌다. 석주가 차분하게 물었다.
“챙길 짐은요?”
“올 때도 몸만 왔는데, 그런 게 있을 리가요.”
“그럼 나갈까요.”
“네. ……아니, 바로 가는 게 아니고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정원이 의아하게 물었다. 석주는 여전히 긴장감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정원 씨가 잠깐 걷자고 했잖아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한가하게 굴어도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석주에게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순순히 그를 따라나섰다.
걷다 보니 처음 도착했던 바닷가였다. 분명 여기서 석주를 데리고 오두막까지 갈 때에는 천리처럼 느껴지던 길이 생각보다 가까워 조금 허무했다.
바닷가는 여전히 인적 없이 조용했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살살 부는 바닷바람이 정원과 석주를 번갈아 간질이고 지나갔다.
나름대로 급박한 상황이 분명한데, 이상할 만큼 마음이 편했다. 어쩌면 석주가 피워 놓았던 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없는 생각을 하며 석주가 서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곧바로 시선을 눈치 채고 정원을 마주 본다. 당연하다는 것처럼 손을 뻗어 정원의 손을 쥐어 왔다.
손가락 사이로 말려 들어오는 단단한 손의 감촉. 정원은 잠시 넋을 잃고 석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밀어낼 거라면 손이 닿자마자 그렇게 했어야 했다. 멍하니 있는 사이 손은 이미 석주에게 단단히 붙들린 상태였고, 새삼스럽게 떨쳐내는 것도 이상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건조하고 따뜻한 손이 감겨 오는 감각이 더는 낯설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해안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어차피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석주가 있으니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눈치를 살피던 정원이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요, 뭐든지.”
“혹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하고 싶은 일.”
석주가 천천히 따라 말했다. 설명이 부족하기는 했을 것이다. 정원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한가해졌을 때라거나…… 시간이 있을 때라거나. …아니면 자유로워졌을 때. 뭔가 해 보고 싶었던 일이 있냐는 거예요. 다들 버킷리스트 정도는 가지고 살잖아요.”
구구절절 이어지는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석주가 되물어 왔다.
“정원 씨는요?”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볼멘소리를 하자 석주는 작게 웃었다.
“이런 얘기를 한다는 건 정원 씨 본인한테 뭐가 있다는 뜻이잖아요.”
속을 꿰뚫린 듯한 기분이었다. 대답하지 않는 정원에게 석주가 한마디 더 했다.
“나는 마땅히 생각해 본 게 없어서요. 미래 생각 같은 건 별로 안 하는 편이라.”
담담하고 별거 아닌 듯한 투였지만, 그 말이 어쩐지 신경 쓰였다. 자신과 겹쳐 들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정원은 본래 염원을 이루고 난 뒤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복수는 자신의 죽음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러나 어쩌면 석주와의 각인으로 죽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이 생긴 탓인지, 아니면 동화 같은 꿈속 풍경을 본 다음이어서인지 몰라도 그런 생각을 떠올려 버린 것이었다.
자신도 그런 버킷리스트 비슷한 것을 품어 본 적이 있었다는 생각.
“지금보다 좀 더 어렸을 때는……. 있었죠.”
“뭐였는데요?”
“인적 없이 조용한 곳에서 작은 집 하나 짓고 조용하게 사는 거. 좀 전형적이죠.”
귀농을 꿈꾼다는 사람들처럼요. 괜한 말을 덧붙이며 눈을 돌렸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석주는 담담한 듯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하는 얼굴이 어쩐지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처럼 느껴졌다면 그건 기분 탓일까. 실은 그런 꿈을 꿨고, 그 꿈에 당신도 나왔다는 말을 하는 게 좋을까.
“정원 씨는 지금 너무 바쁘잖아요. 처음에 데이트 약속 잡을 시간도 없었고.”
정원이 망설이는 사이 석주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명백한 농담조였다. 데이트 약속 같은 걸 잡을 사이는 아니었다고 날카롭게 정정하는 대신 그냥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웃는 얼굴로 담백하게 물었다.
“그럼 갈까요.”
복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다음은 금방이었다. 눈을 한번 깜빡하는 사이 시야가 뒤집혔다. 어찔한 현기증과 함께 눈을 떴을 때에는 눈앞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꿈결 같은 바닷가에서, 어두침침한 건물 안으로.
그것도 그냥 평범한 건물 안이 아니라…….
“……화장실 아닌가요?”
정원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즈넉한 바닷가에서 한순간에 어두침침한 화장실 칸 안으로 떨어지다니. 유쾌할 리 없는 상황이다. 석주가 목적지 설정을 잘못하기라도 한 걸까. 그러나 그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나타나면 이상하니까, 이런 비밀스러운 데가 좋죠.”
“그래도 그렇지 왜 하필…….”
중얼거리던 정원은 문득 지금 두 사람이 서 있는 화장실 칸 안이 너무 좁고, 둘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삼스럽게 내외하는 것도 우습지만 장소가 영 아니었다. 정원이 석주의 가슴팍을 떠밀었다.
“좁아요. 일단 좀 비켜 봐요.”
“비킬 데가 있어야 비키죠.”
못마땅한 얼굴로 석주를 노려보던 정원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상태는요? 가이딩 필요하지 않아요?”
“이 정도 가지고 뭘요.”
“저번에는 순간이동 한 번 한 걸로 거의 쓰러졌잖아요.”
그때는 특수한 상황이었다고 하는 대신, 석주가 씩 웃어 보였다. 그가 정원의 바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은 각인했잖아요.”
귓가가 간질간질하고 오싹했다. 석주는 그 말을 남긴 뒤 밖의 기척을 살피다 문을 열어젖혔다. 누가 있었더라면 상당히 민망한 상황이 되었을 텐데,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아마 그것도 석주의 계산 안에 있었을 것이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섰다. 정원은 부지런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여기가 어디인지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높게 솟은 빌딩 숲이 유독 낯설었다. 얼마간 조용한 곳에 있었다고 도시와 서먹해진 듯했다.
얼굴을 찌푸리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석주가 갑자기 정원의 어깨를 가까이 확 끌어당겼다. 그가 속삭였다.
“미행이 붙었어요.”
어떻게 된 게 돌아오자마자. 놀람보다도 한숨이 먼저였다. 정원은 자연스럽게 석주에게 어깨를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