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정원은 석주의 곁에 붙은 채, 미행이 몇 명이나 붙은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굴렸다. 그때 정원의 어깨를 단단히 쥔 석주가 '자연스럽게'라고 속삭였다. 어차피 자연스럽게 행동해 봤자 이미 붙은 미행을 떨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행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판별하는 것도 힘들었기에, 정원은 고개를 끄덕인 뒤 태연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미행이라. 누구일까, 의문을 품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테프트 쪽이었다. 꿈에서 본 모습을 생각하면 정원과 석주가 사라진 이후 아마 계속 그들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돌아오자마자 자신들을 찾아낸 걸까.
순간이동으로 도착한 곳은 어디인지도 모를 건물의 구석 화장실이었다. 그곳을 빠져나오는 동안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미행이 따라붙을 정도라니. 미리 대비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의아한 기분으로 빠르게 걸어 대로변으로 나오는 동안, 따라오는 이들은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S급 에스퍼인 석주를 견제해서인지, 아니면 아직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해서인지는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잠깐만요, 강석주 씨….”
주위를 둘러본 정원은 한 가지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 계속해서 부지런히 발을 움직이면서도 얼굴을 찌푸린 채 입을 연 건 그 이유였다. 석주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해 보라고 중얼거렸다.
“여기 한국인가요.”
방금 전보다 탁 트인 곳으로 나와 보니 알 수 있었다. 높게 솟아 있던 빌딩 숲도, 도로변에 서 있는 차들도 몹시 익숙한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있던 곳이 노른이었고, 행사가 벌어질 곳도 노른이었으니 당연히 노른으로 순간이동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맞아요.”
그렇다면 더더욱 의아했다. 물론 테프트의 원래 본거지는 한국이었다. 그러나 최근 테프트는 거의 노른이 본부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노른에 집중하는 분위기였고, 사장도 지금 노른 지부에 있는 상태였다. 인력도 거의 그쪽에 집중되어 있을 텐데, 역시 대체 무슨 수로 자신들을 이렇게 빨리 미행하기 시작한 것인지는…….
“저 차 보여요?”
석주가 물었다.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 눈을 돌리자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눈을 돌려 보니 비슷하게 생긴 차는 한 대가 아니었다. 세 대인가? 아니면 네 대? 저게 다 자신들을 미행하기 위해 따라붙은 차일까?
고민하는 사이 석주가 도로변 가까이 정원을 이끌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택시를 향해 몸을 던지듯 올라탄 석주가 정원을 확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태웠다.
“잠깐…… 어디로 가려는 건가요? 저희 지금 갈 데는 있나요?”
정원이 난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장 떠오르는 은신처 따위가 없었던 탓이다. 석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원은 일단 따라오는 차를 따돌려 달라고 말하기 위해 앞으로 몸을 숙였다.
“기사님, 저 뒤에…….”
그러나 정원이 말을 마무리하는 것보다 기사와 석주가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택시 기사가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정원을 향해 몸을 돌렸고, 하지만 채 무슨 짓을 벌이기도 전 석주에게 몸이 붙들린 것이었다. 석주는 운전석 의자 등받이에 기사의 머리를 가까이 가져다 붙인 뒤 그대로 목을 졸랐다.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기사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정원은 눈을 크게 뜬 채 놀란 가슴을 다스렸다.
“방금 나한테 뭘… 하려고 했던 거 맞죠?”
말하면서도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으면 석주가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로 택시 기사를 기절시켰을까. 한패였구나. 정원이 담담하게 생각하며 무방비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아니, 하지만 저 사람이 데리고 탔으니까 문제 없는 차일 거라고 생각했던 건데.’
설마 한패인 택시에 타서 기사를 처치하려는 생각이었을 줄이야.
석주는 자연스럽게 운전석 쪽으로 옮겨 갔다. 염동력을 활용한 것인지 이미 기절해 있는 기사의 몸이 알아서 조수석 쪽으로 움직여졌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그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순식간에 속도를 내는 석주 때문에 몸이 확 앞으로 쏠렸다.
그나마 빠르게 손잡이를 쥔 정원과 달리 조수석에 대충 걸쳐진 택시 기사 쪽은 사정이 더 나빴다. 앞으로 쏠린 몸이 쿵 하고 앞에 부딪쳤다. 정원은 손잡이를 붙든 채 힘겹게 입을 열어 물었다.
“저 사람 차에서 내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염려 섞인 정원의 물음에 석주가 손을 뒤로 내밀었다. 어디서 꺼낸 것인지 모를 로프였다.
“자리에 대충 묶어 두고, 뒷좌석에 도청장치 없는지 확인해 주세요.”
당연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한 투였다. 물론 그런 훈련도 받아 두었기에 사람을 묶는 것도, 도청장치를 찾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 뜬금없는 상황에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
말하는 대로 기사를 묶은 정원은 뒷자리에서 정말로 작은 단추 한 개를 발견했다. 도청 장치를 심어 놓는 아주 흔한 수법이었다.
단추를 부숴 창 밖으로 내던진 정원이 말했다.
“저거 말고는 딱히 없는 것 같네요. 진심으로 엿들을 생각도 없었던 모양인데요.”
대답하지 않으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던 석주가 한참 만에 말을 꺼냈다.
“위협만 하려는 거 아닐까 싶어요.”
짐짓 느긋하게까지 들리는 석주의 말과 달리 정원의 대답은 금세 나왔다.
“뭐 때문에요? 나설 생각 하지 말라고?”
“…….”
“이런 식으로 경고하는 게 테프트 방식은 아니지 않나요?”
다시 캐묻기까지 했지만, 석주는 이번에야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정원이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뒤에서 돌진해 오는 검은 차 때문에 말이 끊겼다. 석주가 빠르게 핸들을 틀었다. 정원은 이를 악문 채 손잡이를 강하게 붙드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다급한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정원이 수상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릴 때였다.
룸미러를 통해, 뒤쪽에서 검은 차 한 대가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뒤로 몸을 돌린 정원이 눈가를 찌푸리며 뒤 차의 모습을 살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차 조수석에서 내리는 사람의 모습을.
권총을 들고 이쪽을 겨누는 모습이 이상할 만큼 익숙했다. 그쪽으로 가까이 얼굴을 붙인 정원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석주 씨, 잠시만요!”
“위험하니까 몸 숙여요. 총 맞으려고 그래요?”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정원이 일단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 상태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강석주 씨도 봤나요? 방금 못 봤어요? 저 차에서 내린 사람……!”
“…….”
석주는 대답 없이 빠르게 핸들을 꺾기만 했다. 겨우 몸을 지탱한 정원이 말했다.
“분명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는데요. 본부에서…!”
탕!
급박한 총 소리와 함께 뒤쪽 창이 깨졌다. 계속해서 달리며 입을 열지 않는 석주를 보며 정원이 생각했다.
테프트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더니, 정말로 테프트가 아닌 거였다. 이런 식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추적 방식과, 한국이라는 장소를 생각했을 때 바로 알았어야 하는데.
지금 자신들을 쫓고 있는 것은 사장이 아니라 한국의 국가 기관이었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걸 지시한 사람은……. 유 관장일 것이다.
유 관장이 최 선생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설마 석주와 정원을 이런 식으로 쫓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추격대를 구성해 보내고, 도로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감행할 정도의 집요함이라니.
이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이 밉보이거나 버리는 패로 쓰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았지만, 설마 최고의 전력인 석주까지 이렇게 대접할 줄은. 어쨌거나 두 사람은 국가 기관 소속이었다. 그렇기에 석주도 쫓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알고 있었던 거죠? 강석주 씨?”
테프트가 아니라 기관 본부 측에서 자신들을 쫓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그 이유까지도. 그가 대답하지 않는 사이에도 추격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리 쏠렸다 저리 쏠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도망쳐 봤자 의미가 있나요? 본부가 아니면 우리가 갈 데가 있어요?”
“갈 데는 만들면 그만이에요.”
“그러지 말고, 우리 그냥……! 윽.”
빠르게 쏟아붓다 말고 차체에 머리를 부딪친 정원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태연하게 핸들을 꺾던 석주가 그제야 당황한 듯 뒤로 눈을 돌렸다.
“정원 씨, 괜찮아요?”
“운전 좀 똑바로 하세요.”
때에 맞지 않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뱉어낸 정원이 다시 하던 말을 이었다.
“우리 그냥 잡혀 봐요.”
“무슨 그렇게 위험한 말을 해요, 정원 씨.”
“어차피 최 선생님도…… 아! 운전 좀 똑바로 하라니까요. 최 선생님도 잡혀 계시잖아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들어는 보자고요.”
“좋은 소리는 못 들을 텐데요.”
석주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러나 정원의 제안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결국 그가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뒤 차에서 우르르 내린 사람들이 그들을 잡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