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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87화 (87/126)

87.

차에서 내려 양손을 든 채 투항하겠다는 뜻을 보이자, 정원과 석주를 쫓던 이들이 후다닥 달려와 두 사람을 포박했다. 정원에게 달라붙은 것은 고작 한 명이었는데, 석주에게는 족히 다섯은 되는 사람이 달라붙어 손목을 묶었다.

정원이 언뜻 보기에 사람들은 모두 B급 정도 되어 보이는 에스퍼였다. 국가 기관이 동원할 수 있는 인력 중에서는 나름 고급 인력에 속하는 이들이겠지만, 다섯 명이 달라붙어도 석주 한 사람을 묶어 놓는 데에는 역부족일 터였다. 그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그러나 석주는 정원의 부탁대로 저항하지 않은 채 순순히 손목을 내주었다.

난데없는 추격전의 여파로 도로는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 그들의 차가 길을 막은 상황이라 뒤쪽에서부터 빵빵거리는 소리가 잔뜩 들려오고 있었다. 국가 기관의 공무 수행 중이라는 사실을 밝혀도 마찬가지였다. 국가 기관이 갖는 이름값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다른 이들이 현장을 수습하게 둔 채, 검은 차 한 대에 올라탔다. 정원을 거의 차 안에 구겨넣다시피 하는 이들이었지만, 석주에게는 차마 그런 대접을 하지 못한 것인지 석주는 제 발로 정원의 옆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힐끗 본 정원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운전석에 앉은 이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건가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기에 꿋꿋하게 다시 물을 수 있었다.

“본부로 가나요? 유 관장님께서 호출하신 건가요. 그러면 왜 이런 방식으로…….”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히터에서 차거나 따뜻한 바람 대신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원의 얼굴이 저절로 구겨졌다. 급히 입을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정원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석주 쪽을 보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는 정원과 달리 석주는 말짱한 얼굴로 정원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이 보였다.

‘심한 짓은 하지 마세요.’

급히 입을 뻐끔거렸다. 정신이 혼미한 탓에 입모양이 제대로 정해지기는 했을지 의문이었다. 정원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수면 가스를 마신 후유증인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뒤로 손이 묶인 채 걸어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본부의 모습이었다. 어차피 이곳으로 데려올 거라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람을 기절까지 시킨 것인지 모르겠다.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석주를 향해 물었다.

“강석주 씨도 기절했나요.”

“설마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만 재웠는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강석주 씨한테는 안 통할 거 알았을 텐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향해 에스퍼 하나가 경고해 왔다.

“쓸데없는 대화는 그만둬 주시죠. 다시 잠들고 싶은 게 아니면.”

“내가 말이 너무 많아서 재웠다 이 소린가요? 그런 것 같죠, 강석주 씨?”

정원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옆에서 석주가 호응하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기에 석주의 반응은 바란 대로였다. 그렇지만 그가 정확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궁금해서, 눈을 돌려 다시 석주를 바라보았다.

가벼운 웃음 소리와 달리 완벽하게 날이 서 있는 눈빛이었다. 어쩌면 정원이 아무 짓도 하지 말라 경고를 해 둔 탓에 참고 있을 뿐, 실제로는 터지기 직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말을 해 봤자 괜히 석주를 자극해 상황만 악화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에 따르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원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유 관장이 머무르는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연 에스퍼가 석주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여기부터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지금 누구한테 말하고 있는 건지는 알죠?”

석주가 차분하게 물었다. 에스퍼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관장님 명령이라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태도가 영 다르지 않나. 그러나 그 사실에 새삼스럽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다만 석주의 반응이 걱정될 뿐.

지금이라도 그에게 다 뒤집어 엎어 버리자는 제안을 할까, 조금 고민이 됐다. 그러나 관장이 할 말이 궁금했기에, 당장은 그렇게 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다. 어차피 석주가 이 안에 있는 한 상황을 뒤엎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다녀올게요.”

정원은 석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돌아올테니, 진정하라는 듯이. 가만히 정원을 지켜보던 석주는 자신을 잡은 에스퍼들을 밀쳐내고 정원의 코앞까지 다가와 섰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말려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석주는 다른 말을 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정원의 턱을 쥐고 자신은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그대로 입술이 맞닿았다. 눈을 크게 뜬 정원의 시야에 당황해 입을 떡 벌리는 에스퍼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쩔 줄 모르며 눈을 돌리는 이들만큼이나 정원도 당황한 상태였다. 그러나 곧 석주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정원의 입속으로 작게 속삭였다.

“빠져나가고 싶어지면 신호해요. 내 이름을 크게 부른다거나.”

그런 말을 하려고 이런 만행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석주는 안심시키듯 웃더니, 순순히 다른 에스퍼들을 따라 멀어졌다. 정원은 홧홧해진 얼굴을 겨우 진정시키며 관장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환영이 너무 거칠지 않나요?”

자리에 앉아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던 관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해해 줬으면 좋겠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얼굴 보기가 힘들었을 테니까.”

“그냥 호출하셨으면 왔을 텐데요. 오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신 게 아닌 이상.”

정원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관장이 자리를 권했다. 정원은 고개를 저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자주 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자리를 권하고, 정원이 거절하는 것은. 그러나 오늘은 그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훨씬 더 묵직했다.

관장은 더 권유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보다... 정말 이렇게 올 거라고는 사실 생각 못 했는데 말이지. 석주가 그렇게 쉽게 동의하던가?”

“왜 그런 걸 걱정하시죠. 강석주 씨한테 돈이라도 빌리셨나요.”

“하하. 여전하구나. 그렇게 태연한 얼굴로 농담을 다 하고.”

그런 말로 분위기를 풀려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정원은 침착하게 본론을 꺼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르신 겁니까? 이런 방법까지 쓰실 정도면 중요한 용건이 있으시겠죠.”

“우선 정원 군 말대로, 너무 거친 방법으로 불러낸 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해 줬으면 해. 일단…… 업무 보고부터가 너무 밀리지 않았나?”

그 건에 있어서는 관장의 말이 맞았다. 그 섬에 가 있는 동안에는 연락할 방법이 없었고, 그 이전에는…… 정원 자신의 의지로 연락하지 않았던 것이니까. 설명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뭐, 사과를 하라는 뜻은 아니었고.”

“이제라도 보고할까요? 일은 나름대로 잘 풀리고 있는데요.”

정원이 침착하게 물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물론 관장은 이상한 낌새를 채고 있을 테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꾸해 왔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정원이 이야기해 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말이 이어졌다.

“네 형을 만났니?”

“…….”

그가 직접 이 이야기를 꺼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말을 피하거나 일부러 말을 돌리거나, 직접 물으면 그제야 변명을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정원의 표정에 잔뜩 날이 섰다. 그 얼굴을 본 관장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났구나.”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원은 유 관장의 얼굴을 노려보며 받아쳤다.

“저한테 들켰다는 걸 알게 되셔서 이런 난폭한 방식으로 불러내신 겁니까? 유감이네요. 차라리 원래대로 곱게 부르셨다면 뭔가 사정이 있었겠구나, 생각할 수라도 있었을 텐데요.”

잔뜩 날이 선 말투였다. 형의 이야기를 꺼낸 이상 더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관장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지, 정원 군.”

“……그래요. 끝까지 말씀하시죠.”

“형을 만난 이상 순순히 협조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어. 이 점은 정원 군도 이해할 텐데.”

“해명을 하려고 부르신 겁니까?”

정원의 물음에 관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부터가 본론이라는 것 같았다.

“똑바로 듣게. 지금 정원 군 형은 위험한 상태야. 그동안 우리를 모두 속여 넘기고 있었지. 정원 군 형이 그렇게 살아 있다는 걸 우리도 몰랐어.”

“하…….”

“믿기 힘들겠지. 하지만 믿어야 해. 정원 군에게는 그것과 관련해서 지시할 사항이 있어. 그래서 혼자 보자고 한 거고.”

기가 찬다는 듯한 정원의 태도에도 관장은 한결같았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들어 볼 가치는 있다고 느꼈다. 정원이 고개를 까딱했다.

“말씀해 보시죠.”

“뭔가 작전을 세우고 있다는 건 알아.”

“…….”

“그 작전이 성공하게 된다면…… 자네 형을 생포해서 데려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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