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88화 (88/126)

88.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최대한 차분하게 들은 말을 정리해 보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이건 배신감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분노인가. 관장을 백 퍼센트 믿었던 적은 없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을 속이지는 않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거다.

‘정원 군은 내 가족이나 다름없지.’라고 말하던 유 관장에게 동의한 건 아니었지만, 가족이라고는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정원에게 유 관장이 어느 정도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이렇게 마주하게 된 순간까지 정원은 제대로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에게 이런 비참하고 끔찍한 기분을 느끼게 될 거라고는.

가까스로 머릿속을 정리한 정원이 입을 열었다.

“관장님께서도… 그 말을 믿으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형이 살아 있는 줄 전혀 몰랐다는 말을. 그러나 관장은 조금도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하지 않았나. 믿기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믿어야 한다고.”

그러나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도 남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정원은 냉소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제가 아직도 관장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들을 거라 생각하시는 것도 아닐 테고요.”

“나는 정원 군이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관장은 조금 미소를 띤 채 중얼거렸다. 애써 가라앉혔던 마음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정원은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진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무지 차분하게 대꾸할 수가 없었다.

형이 죽은 것을 확실하게 확인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히 시체의 얼굴을 확인했다면서. 그래 놓고 정원에게는 죽은 형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일부러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정원은 결국 악에 받친 듯 입을 열었다.

“은혜요? 무슨 은혜 말입니까? 멀쩡히 살아 있는 형을 죽었다고 속이고 절 개처럼 부린 게 은혜인가요?”

정원은 생전 처음으로 격렬한 분노에 휩싸였다. 오히려 평생을 꿈꿔 온 복수의 대상이었던 테프트의 사장 앞에서 이보다는 더 차분했다. 그만큼 극심한 배신감이 정원을 사로잡고 있었다.

“우선 진정을 좀 하는 게 좋겠어, 정원 군. 너무 흥분했네.”

관장은 여전히 얼굴도 찌푸리지 않은 채 정원을 진정시켰다. 정원은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죄송하지만 오늘 내로 진정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

비꼬는 듯한 정원의 말에도 관장은 개의치 않았다. 뭐가 문제냐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기까지 했다. 꼭 정원을 일부러 자극하려는 것처럼.

“이러면 안 되지. 정원 군은 복수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런 정원 군을 도와주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정원 군.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네가 정말 나한테 추궁할 입장인지.”

“절 위해 노력해 주셨으니 감사하다고 대답해야 하는 건가요.”

“이렇다 할 대책도 없이 그저 복수하겠다, 복수하고 싶다 하면서 설치는 정원 군을 도와준 게 누구였지? 테프트의 사장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건? 찾아 봤자 아무것도 못 할 정원 군에게 그나마 싸워 볼 수 있는 무기라도 갖게 해 준 건?”

관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오히려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정원은 건조한 눈으로 관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움직이는, 냉랭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지금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확실하게 실감한 기분이다.

그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그때 정원이 대책 없는 어린아이였던 것도, 관장이 그런 정원을 거뒀다는 것도, 또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고 하는 정원에게 자폭이라는 무기를 준 사람이 관장이라는 것도.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관장은 뭐라고 했던가. 항상 정원에게 꼭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입에 발린 이야기를 해 주며, 그에게 필요한 모든 곳에 정원이라는 존재를 이용하지 않았던가.

그 사실이 억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궁금해졌다.

“애초에 제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신 적은 있나요.”

그 말이 관장에게는 단순히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이제 와 보니 억울해졌나? 그동안 나한테 청춘을 빼앗겼다고 생각해?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정원 군이 일에만 몰두하고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한 건…… 내가 정원 군을 악독하게 부려먹어서가 아니라, 정원 군이 바란 결과였잖아.”

정원은 언제 격하게 분노를 표출했냐는 듯 차분해진 얼굴로 관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관장님 말이 맞습니다.”

관장은 탐색하듯 정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원이 기가 죽은 것인지 확인하면서도, 그럴 리는 없다고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원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억울하지는 않아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비로소 관장의 표정이 풀렸다. 그는 다시 정원을 달래듯 말을 이었다.

“정원 군의 형이 위험하다는 건 사실이야. 너는 형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형을 빼돌리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 녀석은 기뻐하지 않을 거고.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 정원 군. 혹시 사장을 죽이는 데 실패하더라도 네 형만 생포해 데려온다면…….”

정원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관장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애초에 그는 정원이 테프트의 사장을 상대로 복수를 성공시킬지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정원의 형을 생포하는 것만을 노리고 있는 듯했다.

어쨌거나 더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정원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강석주 씨.”

“뭐라고?”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던 관장은 정원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정원은 조금 더 소리를 높여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관장이 듣게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석주 씨!”

그가 과연 본인이 한 말을 지킬 수 있을까. 이름만 불러도 정원에게 오겠다던 말을 믿고 꺼낸 부름이었는데. 정원은 초조한 기분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관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뭐 하나? 설마 석주를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

“이거, 참……. 그거 좀 붙여 놨다고 그새 나약해졌구나. 그 녀석한테 이렇게 의지를 하는 것도 그렇고, 그 녀석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번에도 관장의 말이 맞았다. 모르는 새 석주에게 의지하게 된 것도 맞았고, 그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원은 꿋꿋하게 석주를 기다렸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S급 에스퍼의 파트너로 일하다 보면 파트너가 신처럼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파트너의 능력이 자기 능력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거고. 그래도 그렇지, 설마 정원 군이 이렇게…… 드라마 같은 상상을 할 줄은 몰랐는데?”

비꼬는 듯한 관장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면 역시 석주가 와 주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관장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석주한테는 절대 못 빠져나올 경비를 붙여 뒀어. 우리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쾅.

그리고 관장의 말을 비웃듯 문 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비꼬던 관장의 말이 멈추고, 곧이어 문은 종잇장처럼 뜯어지며 그 바깥의 상대를 보여주었다.

“석주 씨!”

“너……!”

“안녕하세요, 관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석주는 산뜻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해 왔다. 눈으로는 정원의 얼굴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정원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관장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식은땀을 흘릴 것 같았다. 정원의 앞에서는 항상 능청스러운 모습만 보여주었던 사람이기에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장기말에 불과해야 할 석주가, 두려운 것처럼.

그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곧 다물었다. 그런 관장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석주가 입을 열어 물었다.

“제가 뭐 때문에 여기 순순히 따라왔다고 생각하세요?”

“…….”

“아실 거면서 이러시면 안 되죠. 정원 씨 표정이 죽상이잖아요?”

정원 때문에 조용히 따라왔는데, 정원을 이 꼴로 만들었다고 힐난하려는 것 같았다. 죽상이라는 말을 들으니 괜히 정원만 머쓱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정원은 제 입가를 꾹꾹 누르며 최대한 표정을 풀었다. 관장은 정반대로 점점 표정이 굳어 가고 있었다.

“…하하. 경비가 허술했나? 역시 다른 녀석들한테 네 절반만 본받으라고 경고를 좀 해야겠어.”

석주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뭘 돌려 말하세요? 어떻게 빠져나왔는지가 묻고 싶으신 거죠? 경비야 붙이셔도 처리하면 그만인 건데.”

“네 능력이라면 나도 잘 알아. 그래서 특별히 아무리 너라도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말을 잇던 관장이 하얗게 질린 채로 표정을 굳혔다. 뭔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석주가 원래대로라면 절대 깰 수 없었을 경비를 뚫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를 눈치 챈 걸까.

“너희 둘…… 설마!”

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석주는 그에게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듯 정원을 향해 다가왔다.

‘이제 가요.’라고 중얼거리는 그의 입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그 풍경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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