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괜찮아요?”
어깨를 짚은 석주의 손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정원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여기는 어디일까. 호텔 방 같지는 않았고, 가정집이라기에는 인기척도 사용감도 없는 방 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차마 여기가 어디인지를 물어볼 기운이 없었다.
“나쁜 말이라도 들었어요? 죽이고 올 걸 그랬나?”
“무슨 그런 살벌한 소리를 해요.”
농담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는 석주의 말에 작게 웃음을 흘리기는 했지만, 그 웃음 소리에도 기운이 없었다. 석주는 굳은 얼굴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잡혀 주는 게 아니었나…. 혼자 얘기하게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미안해요.”
뭘 사과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석주가 사과할 일이 아니지 않나. 그보다 그는 꼭 관장과의 대화에서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했을지 예측한 걸까.
“몰래 듣기라도 했어요?”
반쯤 농담 삼아 묻자 석주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원래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잖아요? 본인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처럼 교묘하게…… 다 네 탓이라고 눈치 주는 타입이니까.”
“강석주 씨한테도 자주 그랬나요. 의외네.”
S급 에스퍼인 석주에게는 조금 더 몸을 사렸을 줄 알았다. 관장 본인이 석주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는 것처럼 이야기한 적도 있었고. 정원은 그 말을 하며 가볍게 석주의 손을 밀어냈다.
석주는 부정하지도 붙잡지도 않고 순순히 떨어져 주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본 정원은 한구석에 놓인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안전한 곳은 맞을 것이다. 강석주가 데려왔으니까. 소파에 걸터앉은 정원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중얼거렸다.
“걱정 안 해도 돼요. 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기분 나빠 하는 것도 이상하고.”
“뭐가 다 맞는 말이라는 거예요.”
석주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정원은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듣지도 않았으면서…….”
“그 사람이 정원 씨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말이 맞는 말일 리가 없잖아요.”
석주의 대답은 단호했다. 정원은 오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조차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가지 않는데, 그가 저런 말을 해 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작고 힘없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맞는 말이죠. 복수를 하겠다고 말은 하면서 대책 없이 살기는 했으니까.”
“…….”
“관장에게는… 내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있냐고 따졌지만 사실 나부터가 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그랬으니까. 그래서 복수를 위해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나……라는 데 너무 몰두해 있었던 거죠.”
석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학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정원의 마음은 이상할 만큼 평온한 상태였다.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래서 강석주 씨한테는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석주 씨 덕분에 손에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니까…….”
여전히 말이 없는 석주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그 인간은…… 그 행사장에서 틀림없이 뭔가 하겠죠? 정말 원하는 게 뭘까요?”
“내가 상대할 거니까 정원 씨는 다른 생각 하지 마요.”
내내 조용하던 석주가 그 말에만 즉각 대답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정원이 대답하지 않았다. 석주는 다짐을 받아내려는 듯 다시 말했다.
“가이딩만 해 주면 돼요. 그 사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단호한 대답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는 없는 내용이었지만.
각인은 성공했다. 석주가 이전이라면 뚫지 못했을 거라는 경호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그 효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사장을 상대하는 일을 모두 맡길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석주가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 왔다고 해도, 이건 정원 자신의 복수여야 하니까. 여차하면 여전히 자폭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정원은 그 말에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대화를 끝내듯 입을 열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지금 너무 피곤하네요. 일찍 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긴 안전한 거 맞나요?”
“…….”
자신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석주의 시선이 느껴졌다. 꿋꿋하게 앞만 보고 있었더니 석주는 곧 포기한 듯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럼요. 설마 정원 씨를 이상한 데 데려왔겠어요.”
농담 같은 말이었다. 더 캐묻는다면 대답을 들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방 안에 침대는 더블 침대 하나뿐이었다. 성큼성큼 다가가 먼저 자리에 누운 정원이 석주를 향해 손짓했다. 석주는 짐짓 난감해 보이는 표정으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누우라고요?”
“네. 혼자 못 자겠네요.”
전혀 진심 같지 않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석주는 순순히 정원의 옆에 다가와 누웠다. 그러나 다소 뻣뻣한 자세는 숨길 수가 없었다. 새삼스럽게 낯이라도 가리는 건가.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누운 석주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원이 먼저 손을 뻗었다.
석주의 단단한 손을 감아 쥐었다. 손을 잡자 그는 고개를 돌려 정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정원에게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테프트에서 주최한다는 그 행사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의미의 마지막이든 간에. 다소 충동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손을 잡은 건 그래서였다.
석주가 잡힌 손을 빼지 않았기에, 정원도 석주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 * *
행사장은 초입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벌써 근처에서부터 웬 풍선을 들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몇 명 마주쳤는데, 귀여운 하트 모양 풍선에 테프트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제대로 된 축제 분위기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심지어는 기념품을 파는 점포들도 쭉 늘어서 있었다. 한 회사의 사장이 복귀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정원은 자신의 옆에 선 석주를 힐끗 돌아보았다. 담담한 표정만 봐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복잡한 인파 속에서도 일단 태연한 얼굴로 서 있는 석주와 정원이 믿음직해 보였던 것인지, 지나가던 사람이 그들을 붙잡고 말을 붙여 왔다.
<“실례합니다,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건가요? 토마토 축제 같은 거예요?”>
정원은 알아들을 수 없는 노른어였다. 손짓을 보아하니 이 축제에 관해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손가락을 뻗어 진행 요원이 서 있는 쪽을 가리켰다. 묵례로 인사한 상대가 이번에는 진행 요원을 향해 질문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입장은 어떻게 하면 되죠?”>
<“죄송합니다만 미리 참가 신청을 하셨거나 초대장을 받으신 분들만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머쓱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거절을 당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정원이 힐끗 석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냥은 못 들어가는 모양인데 어떡하죠?”
“네, 초대장 같은 게 필요하다고 하네요.”
또 순간이동을 하거나 몰래 들어가야 하는 걸까. 석주는 내내 자신과 함께 섬에 갇혀 있었으니 초대장 같은 걸 구해 왔을 리 만무했다.
실은 여기 오기만 하면 테프트 쪽에서 유 관장처럼 자신들을 납치하려 한다거나, 공격을 해 올 거라 생각해 마음의 준비를 해 둔 상태였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아 행사장 내에 들어갈 방법부터 생각해야 한다는 건 여러모로 의외였다.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석주가 정원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방금 그 진행 요원 앞에 선 석주가 그를 향해 건넨 것은 자신의 사원증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식으로 도망친 뒤, 회사에서는 어떤 식으로 처리가 되었을까. 당연히 사장이 어떤 조치를 취해 두었거나, 혹시 비밀로 했다고 해도 무단 결근으로 해고 처리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게 통할 리가 있나? 살짝 기겁한 눈으로 석주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덤덤했다. 더 기가 찬 것은 진행 요원의 반응이었다. 사원증을 힐끗 보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둘을 들여보내준 것이었다.
“…경비가 너무 허술하지 않나요?”
정말로 놀기 위한 판을 벌인 것도 아니고. 그러나 경계심 어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 정원과 달리, 석주는 망설이지도 않고 늘어선 점포 중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가만히 보니 자잘한 인형들을 파는 곳이었다. 정원은 얼굴을 팍 구기며 물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인형을 보겠다고요? 위기감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나요?”
석주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작은 인형을 들여다보며,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정원 씨는 이게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한다면서요.”
“……네?”
“자면서 그러던데?”
정원이 아연실색하며 석주를 바라보았다. 잠꼬대를 해도 하필 그런 비관적인 내용이라니. 석주의 표정은 딱 봐도 밝지 않았다. ‘절대 위험하게 나서지 말라’는 말을 몇 번씩이나 한 사람인데, 자신이 죽을 각오를 한 사람처럼 잠꼬대를 했으니 얼마나 속이 갑갑했을까.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마침 기념품도 팔고 있으니까 기념해야죠.”
비꼬는 것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석주는 정말로 작은 인형 하나를 골라 구매하더니, 그것을 그대로 정원의 손에 안겨 주었다.
“잘 간직해요.”
정말이지 속을 알 수 없는 말. 오묘한 표정을 지은 정원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마침 안내 방송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A구역에서 행사 본식이 시작됩니다. 사장님의 말씀이 있을 예정이니 참가자 여러분께서는 모두 A구역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