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안내 방송에 나온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미 현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장내를 절반으로 나눠 한쪽에는 비각성자, 다른 한쪽에는 각성자를 앉혀 놓은 듯했다. 모습이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그저 좌석 쪽에 비각성자와 각성자를 구분하는 플래카드를 걸어 두었을 뿐, 별도의 확인 절차는 없었다. 그럼에도 비각성자들 틈에 각성자가 섞여 있거나, 각성자들 틈에 비각성자가 섞여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 에스퍼와 가이드 중 일반인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듯 일반인들도 각성자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에, 알아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갔을 터였다.
고민하던 정원이 석주를 향해 물었다.
“어떡할까요? 확인은 안 하는 모양인데.”
“정원 씨 생각은요?”
“……더 속일 이유는 없긴 하지만, 그래도 비각성자 사이에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사장이 비각성자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려는 거라면 저쪽에 있는 게 막기 쉬울 테니까요.”
“그럼 정원 씨 말대로 해요.”
아무런 저항 없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모습이 고마우면서도 왠지 어색했다. 둘은 더 따질 겨를 없이 비각성자 틈에 섞여 들었다. 대충 빈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자 마침 사장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꼐 환영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맵시 있는 인사와 함께 시작된 사장의 연설은…… 의외로 정상적이었다.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이 들으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한 정론뿐이었는데, 그래서 오히려 정원의 경계심은 더해졌다.
테프트는 각성자와 비각성자의 조화를 꿈꾸는 회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함께 불렀다는 말이 시작이었다. 사장이 계속해서 회사의 비전을 소개했다. 이미 몇 차례 들은 적이 있는 내용이었지만 사장의 입으로 들으니 느낌이 또 달랐다. 물론 정원의 귀에 좋게 들릴 리 없었지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석주의 옷깃을 단단히 붙든 채였다. 그러나 예정된 행사 시간이 모두 끝나 갈 때까지도 상황은 그대로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모두 사장의 말솜씨에 빠져든 듯 집중한 상태였다. 그대로 이어지던 연설의 흐름은 단 한 사람 때문에 깨어졌다. 어느 순간 비각성자 틈에서 한 중년 남자가 벌떡 일어선 것이었다.
「듣자 듣자 하니 더는 못 들어주겠네. 닥쳐라, 이 위선자야!」
남자가 서 있던 곳은 정원과 석주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였다. 덕분에 그가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말의 내용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일반인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알면서, 뭐? 조화? 웃기지 말라고 해! 내 자식들은 너희 에스퍼 싸움에 휘말려서 죽었어!」
애석하게도, 그건 흔한 이야기였다. 아무 능력도 없는 일반인은 에스퍼들 사이에 휘말리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마침 주위에 그를 도울 만한 에스퍼가 있었다면 목숨을 건졌겠지만, 저 남자의 자식들은 그만큼 운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떤 싸움에 휘말렸다는 걸까. 에스퍼들의 무의미한 다툼? 아니면 에스퍼들이 괴물을 처리하던 현장에 운 나쁘게 발을 들여 버렸다거나?
어느 쪽인지 더 알 수는 없었다. 남자는 사장이 서 있는 곳을 향해 계란을 던졌다. 사장은 얼굴로 날아오는 날계란을 피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맞았다.
그는 마이크 앞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말없이 자신의 뺨을 닦아낼 뿐이었다. 그 동작에서 묘하게 극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어.’
정원이 눈을 부릅뜬 채 사장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런 능력도 실리지 않은, 평범한 계란일 뿐이었다. 사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걸 피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사장의 뒤에는 경호라도 하려는 듯, 전무를 포함한 다른 에스퍼들 서너 명까지 서 있지 않던가. 저들 중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마 사장이 지시했겠지만…… 왜?’
이런 곳에서 자신이 계란을 멋지게 피하는 모습을 보여줘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나? 그야 물론 기껏 던진 계란을 피하면 던진 쪽이 더욱 분노하기는 할 터였다. 그러나 피하지 않으면 역으로 각성자들 쪽의 분노가 더해질 텐데.
어쩌면 그걸 노린 걸지도 모르겠다. 사장 자신은 아무 말 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알아서 분열하도록.
그렇다면 저 울분을 토하는 비각성자도 사장의 계산 안에 있었던 걸까? 일부러 풀어 놓은 사람인가?
‘대체 뭘 위해서 이런 쇼를…….’
정원이 얼굴을 찌푸린 채 사장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든 하려고 했으면 이런 연극적인 절차 따위 없이 바로 해낼 수 있으면서, 이런 상황을 통해 뭘 이끌어내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원이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도 상황은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각성자들 틈에서 야유의 목소리가 하나둘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는 일도 없이 묻어 가는 기생충 주제에.」
「이렇게 분위기를 망칠 거면 여기 참석은 왜 한 거야?」
그야말로 뻔한 말이었다. 유치하게 들릴 정도로. 점차 고양되는 분위기 속에서 사장은 여전히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정원은 답을 구하듯 석주 쪽을 바라보았다.
나서기에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저주하는 말이 쏟아질 뿐 사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대로 두기도 난감했다. 에스퍼들 쪽에서 일반인들을 처리하겠다며 능력을 사용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석주 씨.”
조용히 불렀지만 석주의 시선은 좀처럼 정원 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쩐지 낯선 기분이었다. 순간 당연히 그가 자신을 돌아볼 거라고 생각해 버린 탓일까.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사장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섬뜩하게 느껴질 만큼 날카로운 금색 눈동자였다. 무심코 그를 잡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그 손길에 겨우 석주의 시선이 돌아왔다. 정원은 하려던 말을 잊은 채 가만히 석주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짧은 이명 같은 것이 정원의 귀를 스쳤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장 석주부터가 무언가 들은 듯 의아한 표정이었고, 방금 전까지 분개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방금 무슨 소리였지?’ 하며 당황한 목소리를 뱉는 이들이 보였다.
그리고 주위에서 그렇게 의아해하던 사람들과, 아랑곳 않고 여전히 화를 내던 사람들 모두 한순간에 동작을 멈추었다.
오직 정원과 석주의 주위, ‘비각성자 구역’에 서 있던 사람들만.
“…….”
다른 쪽에서는 여전히 야유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몇몇 과격한 에스퍼들은 손에서 불로 된 덩어리를 만들어 내거나, 위협적으로 목울음 소리를 내거나 하며 싸울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이상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비각성자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더니, 멍하니 고개를 돌려 사장이 서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 앉지도, 입을 열지도 않은 채 그저 사장이 서 있는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정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것을 멈추고 눈치껏 그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장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아마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가만히 비각성자들이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던 사장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곧 손을 한번 휘저었다.
「다들 자리에 앉지.」
아직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한 각성자가 불만의 목소리를 터뜨리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사장의 말을 들은 비각성자들은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정확히 같은 타이밍에, 같은 동작으로. 여전히 사장이 서 있는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단순히 순종적인 것이 아니라 혼을 모두 빼앗겨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장내는 점차 싸늘해졌다. 여전히 상황을 알아채지 못하던 에스퍼 몇 명마저 그 주위에 앉아 있던 이들의 만류로 입을 다물었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가운데, 사장은 스스로 입을 여는 대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가 고개를 까딱하자, 한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왔다. 정원도 아는 얼굴, 즉 에단 전무였다.
전무를 앞세운 뒤 사장은 준비된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의 옆에는 가면을 써 얼굴을 가린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전무를 포함한 에스퍼들 틈에 섞여 있어서 당연히 그도 에스퍼일 거라고 생각해 주의 깊게 보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그에게서는 너무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형?’
그런 생각이 들자 좀처럼 전무 쪽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설마 형을 여기까지…….’
저 힘 있는 에스퍼들 틈에 대동할 만큼 정원의 형이 중요하다는 건가. 아니면 이용하기 위한 건가.
「여기부터는 제가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정원이 눈을 찡그린 채 형과 사장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전무가 입을 열었다. 간신히 형으로부터 신경을 돌렸다.
「그전에, 거기 계신 분들. 자리를 잘못 찾으신 건가요? 제자리로 돌아가 주시죠.」
전무가 비각성자들 사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 여긴 정원이 움찔했지만 꼭 정원과 석주만을 겨냥한 말은 아닌 듯했다. 눈치껏 섞여 있던 각성자 몇 명이 멈칫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석주를 살짝 돌아보자 그는 딱히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듯, 한쪽 손잡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원도 자리를 옮길 이유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 전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뒤 입을 열었다.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들, 비각성자들을 저렇게 만든 건 저희 테프트가 맞습니다. 이게 모두 그들이 열등하다는 증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