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기묘한 광경이었다. 굳어 있는 사람 틈에 오직 그들만이 멀쩡하게 생각하고,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사장은 웃음기를 머금은 눈으로 석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너에게 안 통할 줄은 이미 알았다. 그런데 그 친구까지 멀쩡하다는 건… 아무래도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사장의 시선은 정원에게 닿아 있었다. 아무래도 정원이 지금 멀쩡한 것은 사장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던 듯했다. 예측하지 못한 이유 때문에 정원이 이 사람들 틈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어렴풋이 예상이 갔다.
“각인인가…….”
정원이 생각한 것과 같은 말이 사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원은 반사적으로 석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석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얼굴로 사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꼭 사장을 흉내 내듯 입만이 웃고 있었다.
“많이 나약해졌구나, 석주야.”
사장이 입을 열었다. 믿기지 않게도 측은해하는 기색을 담은 목소리였다. 자신을 향한 말이 아님에도 정원의 기분이 나빠질 정도였다. 석주는 차분하게 맞받아쳤다.
“많이 변한 건 당신도 마찬가지지.”
덤덤한 대꾸였다. 그 말을 들은 사장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뜬구름 잡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 나도 내가 변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게 풀리지는 않더구나. 뭐… 오래전에는 두려울 게 많았으니까.”
“…….”
“그때는 내가 무서울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내가 쌓아 온 것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가이드의 존재도, 날 능가하는 에스퍼가 나올지 모른다는 사실도……. 실은 두려웠던 거지.”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예언이 두려웠다고 순순히 고백하는 사장의 모습이 영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정원에게 사장의 시선이 잠시 닿았다. 어깨를 으쓱한 그가 이어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예언 따위에 휘둘리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하지만 당시에는 확실히 그랬으니까.”
“뭘 원하는 건가요?”
정원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어 물었다. 사장은 의아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뭘 바라서 이런 짓을 하나요?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고 싶은 건가요? 본인 외의 다른 사람들이 다 하찮아 보여서 이러는 건가요?”
그 말을 들은 사장은 담백하게 웃었다. 그 말이 맞는다고도, 틀렸다고도 대답하지 않은 채. 그는 자신의 옆에 넋을 잃고 서 있는 전무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은 세상을 지배하고 싶다는 꿈에 빠져 있어서 내 말을 들었지.”
“…….”
“안쓰럽고 우스운 녀석이야. 자신 스스로 지배자가 될 만큼의 힘은 없으니 내 밑에 붙어 일하려 했다는 점이.”
“난 당신 얘기를 물은 겁니다.”
정원이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은 여전히 웃는 얼굴 그대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네.”
생각보다 훨씬 담담한 수긍이었다.
“그래서 날 몰락시킬 거라는 가이드를 찾아서 죽이려 했고… 그래서 나만큼이나 강한 잠재력을 가진 에스퍼의 힘을 빼앗으려 했던 거지.”
“……그런 적이 있었다는 건, 지금은 아니라는 뜻인가요?”
“비슷해. 지금은 그런 사소한 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정원은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느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을 지배하고 싶었고, 자신을 몰락시키거나 능가할지도 모르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는 말은 한심하게 느껴질지언정 이해는 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사장은 그저 미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 하찮은 동기로 움직일 때와 지금의 사장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처럼, 담백하게 꿈꾸듯 웃고 있는 표정을 보니 그게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 오히려 더 공포스러웠다.
“자네 옆의 그 녀석이 가진 능력을 거의 다 뺏기고도 살아났다고 했을 때부터……. 그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네.”
“…….”
“사실 죽일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말의 맥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로 미친 걸까. 혼란스러움에 가득 차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휙 고개를 돌리더니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사람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 광경을 봐. 아름답지 않나?”
“당신은…….”
“사람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이런 게 아닐까.”
소름이 끼쳐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지만, 정원은 침을 넘기며 정신을 다잡았다. 그가 뭘 원하는지 이해하는 건 포기해야 할 듯했다. 설령 그가 인간적인 두려움을 넘어 미쳐 버린 나머지, 이제는 ‘인간은 영혼이 나가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따위의 명분만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거라 해도…… 그런 이유여도 달라질 건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를 막아야 한다고 느낄 뿐이었다. 정원은 제법 결연하게 다시 말했다.
“계속 혼자 떠들 겁니까?”
“궁금한 게 아니었나? 내가 이러는 이유가?”
“사람들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혼자 감탄하는 걸 보니… 이유 같은 건 그냥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흠.”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려는 건지는 궁금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던 정원이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 서 있던 석주가 정원의 손을 가만히 겹쳐 쥐며 대신 그 말을 마무리해 주었다.
“그것도 일단 막아놓고 보면 해결이 되겠죠.”
“…….”
“여기 있어요, 정원 씨.”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자, 씩 웃어 보인 석주가 정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렸다. 혼자서 사장을 향해 가려는 모양이었다. 한순간에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방금 전까지 기세 좋게 떠들어댔던 게 무색하게도.
정원은 애타게 손을 뻗어 석주의 옷깃을 쥐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았던 석주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정원을 마주 보았다.
“잠시만요. 혼자 가려고요?”
애타는 물음이었다. 그 말을 들은 석주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곧 정원의 손을 잠시 꼭 쥐었다가 놓았다.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기운이 석주에게로 옮겨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짧은 가이딩이었다.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이 정원을 사로잡았다. 그런 생각 탓에 석주를 가만히 보낼 수가 없었다. 정원은 완전히 멀어지려는 손을 쫓아가 다시 한 번 강하게 붙들었다. 석주의 곤란한 얼굴을 보며 의문이 피어 올랐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지금이야 재미있는 것을 보듯 정원이 보이는 촌극을 감삭하고 있지만, 사장이 언제 마음을 바꿔 자리를 떠날지 몰랐다. 석주와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사장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지금 이 사람들 같은 꼴로 만들어 버릴 거라는 사실만은 자명했다.
지금 당장 막아야 했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은 석주였지 정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차라리 내가……”
그런데도 정원은 석주의 손목을 잡은 채 놓지 못했다.
석주는 차분한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라고는 품지 않은 사람처럼. 그는 아주 가볍게 맞잡은 손을 쓰다듬어 주었다. 정원을 안심시키듯이.
차라리, 뒤에 이어질 말을 예측한 듯 석주가 당부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하지 말아요.”
자폭만은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마침내 정원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정원이 그를 놓아주자마자, 석주는 한달음에 서 있던 자리를 박차고 날렵하게 뛰어 올랐다.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도약이었다.
단숨에 사장이 서 있는 단상 위까지 올라선 석주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사장을 마주 보았다.
정원과 석주를 재미있어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사장은, 그 순간 석주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들은 그 상태로 서로를 한참 바라보았다. 에스퍼가 아닌 이들의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는 공방이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정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처절한 심정으로 석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쾅!
이윽고 철저한 능력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듯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정원은 폭발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자리에 엎드렸다.
사장과 석주 중 어느 쪽이 시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원은 곧 고개를 들어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두 사람이 서 있던 단상은 안개 같은 연기에 휘말려 보이지 않았다. 연기가 걷힌 뒤에도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서로의 눈에만 보일 거리에서 싸움에 임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에스퍼끼리의 싸움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둘은 인간의 힘을 아득히 초월하는 능력자이니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공방을 벌일 수 있는 게 당연했다. 그때 정원의 귀에 일부러 들으라는 것처럼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설마 이 나이를 먹고 너와 이렇게 치고받고 싸우게 될 줄이야……’
사장의 목소리였다. 여전히 어디서 들리는지는 알 수 없었고, 석주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껴 말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득해졌다.
정원은 절망에 가까운 심정으로, 둘의 위치를 찾기 위해 자꾸만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그때, 정원을 향해 가까워지는 희미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달려가려던 정원은 곧 창백한 얼굴로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