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몇 번의 공방이 오간 뒤 사장이 입을 열었다.
“어릴 때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지?”
잠시 그 누구도 공격이나 방어를 하지 않는 침묵이 이어졌다. 석주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장과 대치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아주 오래전의 대화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능력은 총 몇 가지나 되지?’
‘모르는데.’
‘이능력이라는 게 뭔지 모르나?’
‘아니. 세 본 적이 없는데.’
그때 사장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웃었던가. ‘나와 같은 유일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지 않았던가. 석주는 그 당시에도 지금도 사장이 말하는 동질감의 형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그 당시 사장이 강석주에게 느낀 동질감은 강석주가 언젠가 자신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흐려질 만큼 하찮은 것이었다는 게 우습지 않나.
석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상대에게서 짜릿함을 느끼고, 힘을 억누르지 않아도 되는 상대에게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은 에스퍼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석주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강석주는 지금 그의 인생에서 손에 꼽게 강렬한 감각에 취해 있었다. 자신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다는 사실을 절절히 실감했다. 고양감이 온몸을 휘감았고, 분노와 희열이 뒤섞여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쏟아내게 됐다.
정원의 오랜 숙원을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이뤄 주고 싶다는 생각. 오랫동안 켜켜이 쌓아 온 증오의 대상을 자신의 손으로 끝장 내고야 말겠다는 생각. 그런 바람과 상상들이 뒤섞여 정신이 나가 버릴 듯한 아찔함을 선사했다.
아드레날린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질주했다.
석주가 땅을 꺼뜨리면 사장이 그걸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다. 사장이 단상을 무너뜨려 강석주를 매장시키려 했을 때에는 석주가 그걸 원상복구시켰다. 불 붙은 나무가 날아오면 그걸 얼렸고, 반대 되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똑같은 것으로 받아쳤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뇌우가 하늘을 울렸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일반인의 눈으로 재앙을 직감할 만큼 느리고 친절하지는 않았다. 수 초 간의 공방 틈에 수십 가지의 이능력이 서로 부딪치고 상쇄되었다.
어느 순간 강석주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느꼈다.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싸울 때에는 인간의 범위를 넘어서는, 온갖 화려한 능력이 난무했으나 정작 승패가 결정되는 순간 두 사람은 가장 단순하고 폭력적인 상태로 맨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사장을 찍어 누르고 올라탄 석주는 아무런 능력도 실리지 않은 손으로 그의 멱살을 틀어쥔 채였다.
사장은 숨을 몰아쉬며 석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강석주가 조금만 더 이성적이고 여유 있는 상태였더라면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따위의 농을 던졌겠지만 그럴 정신 따위는 없었다. 조금 전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던 아드레날린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이다.
저항은 없었다. 불안정해진 능력의 일렁임을 보니 이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러지 못하는 상태 같았다. 바로 가이딩을 받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폭주를 일으킬 것만 같은 상태였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 숨통을 막아 버려야 할 것이다. 멱살을 쥔 손에 한층 힘이 더해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잠시 후였다.
이런 상황이 온 이상 사장이 보여야 할 반응은 정해져 있었다. 최후의 수단을 쓰겠다는 양, 차라리 폭주를 일으켜서라도 석주를 막으려 한다거나… 말로 회유하려 든다거나. 그러나 사장의 반응은 그 중 무엇도 아니었다.
이상할 만큼 평온한 표정이었다.
“죽일 건가?”
“…….”
“죽이고 싶었나?”
그제야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사장은 웃고 있었다.
비인간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던 석주의 눈이 순식간에 원래의 빛을 되찾았다. 자신이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석주는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고개를 들며 떠올렸다.
‘정원 씨는 어디 있지?’
그 당연한 사실을.
일단 붙들어 놓은 상태라고는 하나 한순간이라도 사장에게서 눈을 뗀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석주는 그렇게 했다. 가장 먼저 정원의 얼굴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곧장 눈을 돌려 그의 흔적을 찾았다.
원래 서 있던 곳과는 조금 떨어진 장소였다. 정원은 못이라도 박힌 사람처럼 가만히 선 채 창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바로 지척에서, 정원의 형의 모습이 보였다.
정원을 향해 곧장 달려들고 있는 모습이.
“…정원 씨.”
석주의 입에서 호흡처럼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동생을 향해 다가가는 형의 몸짓은 아니다. 살의로 가득한 동작이었다. 어째서 사장에게 와 가이딩할 시도조차 하지 않나 했더니, 정원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나.
석주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단단히 사장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정원에게로 몸이 흐르듯 튀어 나갔다.
“정원 씨!!”
비명과 같은 외침과 함께 정원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 형이 들고 있는 날붙이는 실제 움직이는 속도에 비해 터무니없이 느리게 느껴진다. 그것을 손으로 잡아 막는 것과 동시에, 석주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이능력을 사용해 그를 막으려 했다. 설령 그 과정에서 상대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게 된다고 해도.
그러나 그때, 바로 앞까지 덤벼들었던 그의 몸이 사장 쪽으로 자석처럼 끌려갔다.
언제 쓰러졌었냐는 듯 상체를 일으키고 앉은 사장이 피로한 얼굴로 끌려오는 몸을 받았다. 정원의 형은 방금 전까지의 살기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기세를 죽인 채 사장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가이딩을 하려는 게 분명했다.
먼저 반응한 것은 석주보다도 정원 쪽이었다. 그는 충격으로 창백해진 얼굴이면서도 어떻게든 사장을 막으려 하는 것 같았다.
지금의 사장에게 정원이 다가가도록 할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폭주할 만한 상황이었다는 점이 일차로 위험했고, 또 조금이라도 가이딩을 받는다면 당장 정원의 목을 꺾어 버릴 수도 있다는 점이 이차로 위험했다.
정원의 몸을 붙들어 막자 그가 날카로운 기세로 눈을 돌렸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가면 안 돼요.”
석주의 다 잠긴 목소리를 들은 정원이 멈칫했다. 그건 위험을 느껴서가 아니라, 꼭 석주의 꼴을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져 괜히 웃음이 나왔다. 석주의 웃는 얼굴을 본 정원이 황당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그 일그러진 표정에서 울 것 같은 기색을 읽어냈다면 착각일까.
저편에서 사장과 정원의 형, 두 사람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석주는 지금 당장 그들에게로 다시 뛰어들어 능력을 사용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장이 입을 열었다. 해 줄 필요 없는 말을 굳이 하려는 듯했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 꽂혔다.
“지금부터 결행을 하러 갈 거다.”
어딘가 기계적인 구석이 있는 말투였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내 능력에 기반해 만들어진 세뇌용 전파가 전세계로 퍼지게 된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지구상 모든 사람이 지금 여기 있는 이들 같은 모습이 되겠지…….”
말의 내용은 터무니없이 유치한 공상처럼 느껴질 만큼 비현실적이었고.
“그래도 네 파트너의 목숨은 살렸으니 다행으로 여기거라.”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기계적이면서도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인 사장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게 신호였던 듯 두 사람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자리에 남아 있는 인형 같은 사람들의 모습만이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잠시 후 꾹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왜 그랬어요.”
“…….”
“나한테 오지만 않았으면…… 그랬으면 확실하게 끝장낼 수 있었을 텐데.”
“…….”
“다 된 거 아니었나요? 이길 수 있었던 거 아니냐고요!”
정원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오갈 데 없는 분노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언성이 어쩔 수 없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정원은 어떻게 해서든 석주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차마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석주는 표정 없는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기로는 석주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랬으면 정원 씨는 죽었을 거예요.”
정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럼에도 석주가 정원에게 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석주는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나한테는 그런 것보다 정원 씨가 더 중요해요.”
“…….”
“미안해요.”
공허한 사과가 빈 사이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