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가이드를 본 적이 있었다. 정원과는 같은 국가 기관에서 일했던 D급 가이드였고, 높지 않은 등급 탓에 그 자신을 일반인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고 여기는 이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액션 영화란 찾는 이가 많지 않는 고전 문화에 가까웠다. 에스퍼의 등장이 가져온 변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액션 영화의 몰락은 그중 그리 눈에 띄는 요소는 아니었다.
그 가이드는 더는 좋아하는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시대에 산다는 사실을 아쉬워 하면서도, 동시에 그 사실 때문에 그런 영화를 찾아 본다는 말을 했었다. 에스퍼의 능력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건 만들어진 영화와 다르게 실질적이고 파괴적인 공포심을 준다면서. 그런 현실의 공포와는 동떨어져 있는 고전 영화를 찾게 된다나.
그 말에 공감했던 것은 아니다. 정원은 수많은 에스퍼의 능력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그가 말하는 것과 같은 공포심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강석주와 사장의 대치를 지켜보며 갑작스럽게 그 말을 떠올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석주의 능력을 한두 번 본 것은 아니었다. 그가 능력을 사용해 임무를 완수하는 현장은 벌써 숱하게 보아 익숙해졌다. 그 능력의 규모에 감탄한 적도 물론 많았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전투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천지가 갈라지는 것 같은 착각을 받을 정도의 번뜩임이 눈앞을 울렸다. 정원은 자신이 본 것은 실제 석주의 반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 속에서 막연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나는 것을 보았다는 것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이 강석주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아서일까. 아니면 내심 속으로 그가 사장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것 같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까.
발목에 족쇄가 묶인 것처럼, 표현하거나 벗어날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귓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여기까지 왔구나.”
어느새 형이 소리 없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정원은 소스라치게 놀라 형이 서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막겠다는 생각으로 온 거니.”
“…….”
“이렇게 멍청하게 컸을 줄은 몰랐는데.”
“……이런 짓을 안 막는 게 더 이상한 거야.”
형의 말에 직접적인 반박을 하고 있는 이 순간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기관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도 이럴 마음이 들었어?”
“그건 별개 문제야, 형.”
정원이 단호하고 씁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기관에서 나한테 무슨 의도로 거짓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어. 그렇긴 하지만 날 이용하려고 했던 거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이런 짓은 당연히 막아야 되는 거라고…….”
정원의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의 말에 확신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형과 대치하고 서 있는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내심 이 자리에 오면 형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막막한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기대와 달리 눈앞의 형은 냉소적인 비웃음으로 정원을 대할 뿐이었다.
“거짓말. 그냥 거짓말이라고…….”
“…형?”
“정확이 어떤 거짓말을 했다는 건지, 정확히는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그 말의 내용을 분명히 알아들었지만, 어떤 말로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원의 입에서는 꺼질 듯 희미한 질문만이 흘러 나왔다.
“저 사람이 형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직도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어?”
“…….”
“무슨 짓을 했냐고?”
그렇게 중얼거린 형이 사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석주와 사장의 모습은 워낙 빠르게 움직여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형의 시선은 그런 상대를 찾아내는 것쯤은 전혀 어렵지 않다는 듯 익숙하고 당연하게 사장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눈빛에 가득 찬 것은 분명 신뢰와 염려였다.
정원은 다시 한 번 막연한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자기 위안에 가까운 생각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장이 형을 세뇌했을 것이다. 형이 자의로 사장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저 여기 있는 이 사람들처럼 세뇌에 당해 자신의 의지를 잃은 상황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정원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세뇌를 통해서 나온 눈빛이 아니라는 걸.
“짓이라니, 그런 게 아냐.”
“…….”
“날 구해 주신 거지.”
더 말할 겨를은 없었다. 저편에서 승패가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리듯 난폭한 굉음이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정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이 한눈을 판 사이 석주가 이미 난도질을 당한 시체가 되어 있지는 않을까, 그런 불안함이 머릿속을 점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석주가 사장을 제압한 채 그를 깔아 뭉갠 것이었다. 정원이 그 모습을 확인한 것과, 형의 눈빛이 급변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순간 정원은 형이 당장이라도 무모하게 저 에스퍼들의 싸움에 끼어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언뜻 보기에는 싸움이 멈춘 듯 조용한 광경이었지만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여전히 첨예하고 고요한 이능력의 대립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저 사이에 섣불리 끼어든다면 간신히 균형을 이루고 있는 둘의 능력이 흐트러져 형의 목숨을 해칠 수도 있었다.
몸이 굳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정원의 앞에서, 형이 움직였다. 정원은 손을 뻗어 형을 막으려 했다. 그가 자기 발로 죽으러 달려가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형이 향한 곳은 예상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형은 품속에서 예리한 날붙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정원을 향해 덮치듯 달려들었다. 칼날을 정확히 정원 쪽으로 겨눈 채.
죽는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스쳤다. 정말로 형의 손에 죽을지도 몰랐다. 시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괴롭고도 우스운 것은 그 순간 정원의 몸에서 거짓말같이 힘이 쭉 빠졌다는 것이었다. 무의식이 ‘형의 손에 죽는 것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따위의 생각이라도 한 걸까.
정말 세뇌당한 쪽은 자신이 아닌가, 그런 자조적인 생각이 들 정도로 우스운 상황이었다.
죽는다. 다시 한 번 생각한 뒤 정원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정원 씨!”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익숙한 모습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석주였다.
정원은 이 순간 자신이 죽더라도, 석주가 사장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보호하는 석주의 모습을 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망연해진 정원을 비웃듯 사장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와 함께 떠나기 직전, 형은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전언을 남겼다.
“너한테 해 줄 말이 있어. 우릴 찾아와.”
…….
긴 침묵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석주를 비난하던 정원은 한참 만에 입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한참 뒤에야 입을 열어 물었다.
“저희 형이 한 말을 혹시……. 들으셨어요?”
석주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원은 힘없이 ‘그랬나요.’ 대답한 뒤 고개를 떨궜다.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석주는 묻지 않았다.
말해 줄 것이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사장은 장소를 알려 주지 않았다. 오히려 포기하고 찾아오지 말라는 듯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들을 찾아낸다면 석주와 정원은 당연하게도 다시 사장을 막아 서려 할 것이었다. 형은 사장의 뜻에 완전히 동조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 사장을 생각한다면 방해가 될 정원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게 옳을 터였다.
그런데 왜 정원에게 마치 찾아오라는 것처럼……. 그런 말을 남겼을까.
오래 생각에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휘휘 고개를 내저은 정원이 주위 사람들의 모습을 살폈다. 사장이 이미 자리를 떠났음에도 전혀 세뇌가 풀리지 않은 듯 멍한 모습이었다.
이들의 상태가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돌려놓을 방법이 없는지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사장이 간 곳을 찾으려면 시간이 없었다.
“어디로 간 걸까요. 바로 찾아 나서지 않으면 곤란할 텐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석주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사장은 지금 바로 결행의 장소로 가겠다는 것처럼 선언을 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단서조차 없는 상황이니 늦지 않으려면 당장이라도 나서야 했다.
그러나 석주의 모습을 보니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강석주는 잔뜩 지친 듯한 기색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에, 입술색은 원래 자리에서 빠져나간 것처럼 창백해진 상태였다.
“석주 씨.”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석주가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다는 불안감뿐이었다. 석주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정원을 마주 보았다.
“걱정 마세요.”
“말하지 말아요. 바로 가이딩을 할 테니까…….”
석주는 정원의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운 모습으로 정원에게 몸을 기대 왔다.
“가기 전에 그 사람한테 능력을 하나 붙여 뒀어요. 당장은…… 뭘 하기 힘들 거예요.”
“…….”
말없이 가이딩에 집중하는 정원을 보며 석주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어디로 갔는지도 짐작이 가고요……”
“…지금은 말하지 말라니까요.”
“손 말고.”
“네?”
“손 말고 키스해 주면 안 될까요?”
이런 상황에 나온 부탁이 왜 가련하게 들릴까.
정원은 무심코 고개를 숙여 그에게 입을 맞추려다 말고 곧 그를 외면했다.
“어디인지 말해 주세요. 좀 괜찮아지는 대로.”
차갑게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석주는 체념한 사람처럼 꺼질 듯 대답했다. ‘네.’ 하는 한 글자가 유독 괴롭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