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그냥 가이딩 때문이라고 해도 안 돼요?”
한참 정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석주가 물었다. 짐짓 담담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정원은 그의 얼굴에서 다른 복잡한 기색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분명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음에도 그의 얼굴에서 안쓰러운 기색을 읽어 낼 수 있는 건 왜일까. 정원은 힘겹게 대답했다.
“그래서가 아니잖아요.”
석주의 대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네. 아니죠.”
부정할 생각조차 없는 걸까. 그러나 눈은 여러 가지를 묻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정원은 고개를 돌리며 정신을 다잡았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방금의 일로 그가 미워서 그 말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본분을 잊지 말아야 했다. 지금 석주가 가이딩이 필요한 것은 맞았고, 조금 더 효과적이고 빠른 가이딩을 위해 입을 맞춰 달라 말한다면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정원이 고개를 돌린 채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필요하신가요. 그렇게 상태가 나쁘면 어쩔 수 없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정원은 그가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에게 같은 것을 요구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 불안해졌다. 조용한 숨소리가 첨예하게 귓가를 울리는 것 같았다. 조금 뒤 석주가 작게 웃었다.
“아뇨. 괜찮아요. 이제 많이 나아졌어요.”
기운이 방금 전에 비해 안정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아 버려도 될 만큼 멀쩡한 상태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석주는 손을 들어 정원의 손을 겹쳐 쥐더니 상냥하게 떼어냈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 가라앉히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
정원은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그래도…….’라는 중얼거림에 석주는 괜찮다는 말로 대답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선 정원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폈다. 장내는 고요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대로라서, 여기가 방금 전까지 에스퍼끼리 싸움이 있었던 현장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게 했다. 몇몇 흔적이 보이기는 했지만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정원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를 향해 걸어갔다.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아도 동공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맹인 같은 모습도 아니고, 숨을 쉬는 마네킹에 더 가까워 보였다.
분명 눈을 뜨고 있고, 숨도 멀쩡히 쉬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의지만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 고칠 방법은 없을 것 같아요. 아마 정신계 에스퍼를 데려와도 뾰족한 수가 없을 테고요.”
차마 석주에게 물을 수는 없어서 말을 하지 않았던 건데, 석주는 알아서 자신의 소견을 말해 주었다. 정원은 고민에 빠진 채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계속해서 막막한 기분만이 밀려왔다.
기관에 연락할 수는 없다. 결코 정원과 석주에게 호의적인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경찰을 부르는 것도 소용은 없을 듯싶었다. 실질적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에스퍼들은 모두 사기관에 소속되어 있을 테니까.
고민하던 정원은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접니다. ……옆에 있고요.”
짧은 통화였다. 정원은 현재 위치와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긴 뒤 간결하게 전화를 끊었다. 뒤편에서 다시 한 번 석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예요?”
“강석주 씨가 잘 아는 사람이요.”
덤덤하게 대답하며 정원은 전화 상대의 모습을 떠올렸다. 석주를 태우고 급하게 호텔로 달리던 날과, 운전석에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을.
그러고 나면 자연히 그날 이어졌던 일까지 연상이 되었다. 정원은 낯을 붉히는 대신 고개를 숙여 착잡한 한숨을 뱉었다.
“아하……. 아직 번호를 안 지웠구나.”
석주가 혼잣말인지 아닌지 모를 애매한 투로 중얼거렸다. 정원은 더 설명하지 않고 핸드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신발 굽으로 액정을 박살내는 정원의 모습을 보며 석주가 힘없이 웃었다.
“화풀이예요?”
“설마요.”
단지 혹시라도 핸드폰 신호를 통해 추적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이곳에 올 거라는 사실 정도는 유 관장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 이후의 움직임은 알지 못할 테니까.
“어디 있는지 짐작이 간다고 했죠. 어디인가요.”
단호하게 물으며 그제야 석주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석주는 담담한 얼굴로 정원을 바라보다 말고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혼자서 가라앉힐 거라는 게 영 근거 없는 허풍은 아니었던 것인지 석주의 기운이 조금 전보다는 더 안정되어 있었다.
석주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어릴 때 내가 있었던 곳이에요.”
그 말만 듣고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장이 석주를 잡아 두었던 곳이겠구나. 입을 달싹거리는 정원 앞에 다가온 석주가 정원의 팔을 가볍게 붙들었다.
“가 볼까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앞이 까맣게 뒤집혔다.
또다시 순간이동인 걸까. 석주가 이 능력을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번처럼 걱정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능력을 사용해도 괜찮은 상태인 건가. 그러나 힐끗 올려다본 석주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는 정원의 팔을 붙든 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낡아빠진 건물이었다.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사람의 발길이 조금도 닿지 않는 폐건물처럼 보일 뿐이었다.
“여기부터는 직접 올라가야 해요.”
정원을 힐끗 돌아본 석주가 마저 설명했다.
“능력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서요.”
“…….”
“뭐, 예전도 아니고 지금이니까 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여기서 힘을 뺄 필요는 없는 거니까요.”
실제로 석주의 안색은 영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본인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정원은 말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말이 샜다가는 필요하지 않은 말까지 꺼내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건물 내의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을 것처럼 낡은 외관이었지만, 혹시나 싶어 버튼을 누르니 계기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원은 파리한 석주의 얼굴을 다시 한번 살핀 뒤 눈을 돌렸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석주는 꼭대기 층을 누른 뒤 벽면에 기댔다. 꼿꼿하게 서 있지 않는 것마저 지쳐 있다는 뜻처럼 보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천천히 올라가는 숫자를 바라보며 정원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석주의 예측이 틀렸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가 여기 있을 것이라고 했으니 여기 있을 것이다.
문제는 형이 할 말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한 것인지 도무지 예측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날 부추기려는 말이겠지.’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미련이 남았다. 듣지 않으면 안 될 말을 남겨 놓고 있는 것일까 싶어서. 하지만 점점 커지는 숫자를 바라보며 정원은 긴 고민을 마쳤다.
형의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럴 시간은 없었다. 힘이 빠진 석주에게 모든 것을 맡길 마음은 없었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정원은 머릿속으로 몇 번씩 자폭 장치를 가동하는 법을 되새겼다.
꼭대기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입을 열리고, 정원과 석주는 텅 빈 최고층에 내렸다. 늘어선 문들은 누군가 그 안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게 싸늘한 모습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석주를 돌아보자, 그는 정원을 돌아보지 않은 채 계단 쪽으로 앞장을 섰다. 그를 따라 올라가자 굳게 잠긴 옥상 문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끔찍한 계획을 낡아빠진 건물 옥상에서 실행하려는, 가장 강한 에스퍼라니. 정원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우스운 상황이 아닌가.
옥상 한 편에 서 있는 사장과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원은 생각했던 대로 곧장 그들 쪽으로 다가서려 했지만, 다른 이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형은 정원을 향해 다가왔고, 석주는 사장을 향해 다가갔다. 달려들듯 가까워지는 형의 모습을 무시하고 석주와 같은 방향을 노리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석주가 정원의 양쪽 어깨를 붙들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사장은 그 모습을 여전히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눈을 크게 뜬 정원이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머릿속으로는 사장을 붙들고 이 건물에서 떨어지며 자폭 장치를 사용하는 그림이 벌써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원만큼이나 필사적이기 때문일까. 온 힘을 다해도 빠져나갈 수 없었던 이유는.
그는 정원의 귀에 대고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정원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말 안 해도 알 수 있어요.”
“이거 놓으세요, 강석주 씨.”
“항상 보고 있으니까.”
“…….”
“미안해요.”
“당신……!”
“사랑하고요.”
찰나의 망설임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눈앞에 있는 석주의 모습이 점차 검어졌다.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정원의 시야는 또다시 뒤바뀌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