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96화 (96/126)

96.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한다고. 나를.’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멍하니 그 말만을 되짚어 생각했다. 잘못 들은 거라고 하기에는 그 말이 너무 분명했고, 제대로 들은 것이라고 하기에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 강석주가 정원을. 전혀 몰랐느냐고 묻는다면 바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석주가 정원에게 보이는 헌신은 단순한 옛 정이나 인류애 같은 말로 포장할 수 없는 범위였다. 그가 정원에게 정원 본인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커다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왜.’

고장 난 기계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생각했다.

‘왜 나 같은 걸.’

그것이 정원의 근간에 깔려 있는 마음이었다. 자신을 아끼지 못하는 것. 그렇기에 정원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도 명확히 재단할 수가 없었다.

‘대답할 시간도 안 주고…….’

그럴 주제가 못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주 잠시 석주를 비겁하다며 비난하고 싶어졌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축객령처럼 남기고 상대를 쫓아내는 사람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럴 기운이 남아 있었다는 건 놀랍네. 아껴 두기도 모자랄 텐데.”

정원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먼저 입을 연 것은 형이었다.

정원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혼이 빠진 나머지 형과 함께 이동되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고백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흔들린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자신이 이렇게까지 약한 사람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고 비참하기도 했다.

정원이 까맣게 죽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편에 방금 전까지 정원과 형이 있던 폐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다. 석주도 힘이 넉넉한 상태가 아니었고, 그 건물 안에서는 능력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까지 순간이동을 시키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달려간다면 금세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정원은 여전히 죽은 눈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서 있는 형이 정원을 쉽게 보내 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잘됐어. 너한테 해 줄 얘기가 있다고 했잖아.”

형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저곳에 남은 사장이 걱정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가뜩이나 지쳐 있는 석주와……. 세계 최고의 가이드인 형에게 가이딩을 받았을 사장이 남아 있다면. 승자가 어느 쪽일지는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형한테 물어보고 싶었던 건 뭐 없었고?”

그는 떠보듯 입을 열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형에게 묻고 싶었던 것도 많았다. 하지만 다른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키스를…… 그냥 해줄걸.”

정원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입 밖으로 내려던 말은 아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 그러나 무심코 뱉은 말이 수치스럽다거나 후회되지는 않았다.

형은 어이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말할 정신이 없어 보이네.”

어깨를 으쓱하는 형을 향해 정원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그제야 이 기분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무력감과 허탈함이었다.

“형은 이런 짓을…….”

“이런 짓을?”

“왜……. 왜 하는 거야.”

처음에는 형이 사장에게 협박을 당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사장과 너무 오랜 시간 함께 지낸 탓에 그의 사상에 세뇌를 당해 버린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순간 ‘세뇌를 당한 거지?’라는 질문이 나오지는 않았다.

정원은 무겁게 물었다.

“형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형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 말이 해 주고 싶었다, 원아.”

맞는다는 것도 틀리다는 것도 아닌 대답. 정원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넌 내가 무고한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

“내가 세뇌를 당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아니라고 하고 싶은 거야?”

형의 말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정원은 지푸라기를 잡는 듯한 심정으로 형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는 굳이 피하지 않고 정원을 마주 보았다.

“형……. 원래 세뇌당한 사람은 자기가 세뇌당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 이렇게 말한다고 형 마음이 돌아설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불쌍한 내 동생.”

그는 아무렇지 않게 정원의 말을 잘랐다. ‘불쌍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치고 너무나 건조한 표정이었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싸늘한 눈빛이 정원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고 지나갔다.

“여태 세뇌당하면서 살아온 쪽을 고르라면 그건 너겠지, 내가 아니라.”

싸늘한 목소리였다. 정원은 이마를 감싸 쥐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또 내가 기관한테 이용당했다… 그런 얘기가 하고 싶어? 그런 건 이제 말 안 해도 알아…….”

지친 듯 중얼거리자 형은 정원의 얼굴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정원의 머릿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형이 입을 열어 물었다.

“너… 네 부모님이 왜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네’ 부모님이라니.

어딘가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꼭 남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말만 들으면 무슨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게 없다는 것은 정원이 가장 잘 알았다.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가족사진에서도 부모님과 형은 누가 봐도 부모와 자녀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똑 닮아 있었으니까. 정원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는데.”

왜 돌아가셨냐니. 부모님을 살해한 사람이 누구인지 뻔히 알고 있는데,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인간이……. 저 잘나신 사장님이 죽였잖아. 우리 부모님.”

“…….”

“왜 그렇게 보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형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는 잠시 더 건조한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순간 아무것도 없던 그의 눈에 복잡한 심정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슬픔 같기도 하고, 분노 같기도 하고, 아니면…….

희열 같기도 한 감정이.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그거 내가 그랬어, 원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정원은 얼빠진 얼굴로 형을 마주 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아주 미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씁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분명 웃음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하고 있던 모든 생각이 휘발되는 기분이었다. 들은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정원은 멍하니 입을 벌리며, 망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형은 담담하게 다시 말했다.

“부모님 그렇게 만든 거, 나라고.”

“…….”

정원의 멍한 얼굴을 빈틈없이 바라보면서, 그가 확인사살하듯 다시 말했다.

“다른 데 탓 돌릴 필요 없어. 내가 그런 거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저절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정원은 비틀거리며 이마를 감쌌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물리적인 고통이 아니라 형체 없는 통증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날 보았던 그 끔찍한 광경을. 설마 그게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이런 말을 하는 데에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럼 그날… 내가 본 건 뭐였는데?”

그 어느 때보다 비참한 목소리였다. 정원은 여전히 비틀거리며 형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의 양쪽 팔을 붙든 채 절규하듯 외쳤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저 인간이 우리 어머니를...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죽였는지 내가 눈 시퍼렇게 뜨고 분명히 봤는데!”

“…….”

“형이 어떻게 그런 말을......”

그는 자신의 팔을 붙든 정원의 손을 겹쳐 쥐고 밀어냈다. 그리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손아귀에서 저절로 기운이 빠졌다. 형은 담담하게 되물어 왔다.

“내가 직접 칼을 들고 찔러야만 살인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내가 죽여 달라고 했어.”

“…….”

거짓말이 아니다.

차라리 뭔가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거짓말일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형의 눈은 그게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긋지긋하니까 그만 벗어나게 해 달라고, 내가 직접 부탁했다고. 그분한테.”

“…….”

“그러니 날 구하겠다거나… 그런 멍청한 이유로 허튼짓 하는 건 이제 그만둬.”

“왜…… 왜?”

정원이 맥없이 중얼거렸다.

“뭔가 이유가 있었던 거지…. 나는 모르겠지만, 내가 몰랐던 뭔가가……. 뭔가 이유가…….”

정원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서 있는 형의 표정도. 그가 말한 잔인한 사실도.

“그럼 난 대체 왜…….”

정원의 다리에서 힘이 완전히 빠졌다.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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