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97화 (97/126)

97.

“왜 그랬는지가 궁금해?”

형은 작게 미소를 띤 얼굴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원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든 다리에 힘을 주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궁금해. 우리 부모님…. 형을 정말 아꼈잖아.”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자연히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함축된 말이었지만 딱 그 말대로였다. 부모님은 정원의 형을 진심으로 아꼈다. 달리 말해 형을 아끼고 사랑한 것에 비해 정원을 그만큼 귀하게 대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니, 실은 단순히 그만큼 아끼지 않은 게 아니라…….

“그래서 네가 얄팍하고… 뭘 모른다는 거야.”

“…….”

“난 정말 궁금하다, 원아. 그 인간들, 네가 있는 게 나한테 해가 된다느니 불길하다느니……. 별 말 같지도 않은 미신 얘기를 하면서 널 학대했잖아. 그런데도 그럴 마음이 들었어?”

정원은 여전히 형의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의 말을 부정할 생각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그래도 자신을 사랑했고, 학대 같은 것은 없었다며 우길 만큼 꽃밭 같은 머릿속은 아니었으니까.

매번 꾸는 그 꿈속에서조차 정원은 좁은 방 안에 갇히듯 숨어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가라앉는 마음 탓에 고개를 떨구게 됐다.

고개를 숙인 정원은 애써 덤덤하게 물었다.

“뜬구름 잡는 얘기 그만하고 똑바로 말해……. 아버지 어머니가 날 안 챙기는 게 안타까워서 죽였다는 소리는 아닐 거 아냐.”

형이 그럴 만큼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쯤은 모를 리가 없었다. 형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한심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화낼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정원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대체 그 인간들이 뭐라고 평생 이런 의미 없는 짓을 한 건데? 나 같으면 그냥 차라리 잘됐지, 하고 내 인생 살았을 텐데.”

정말 그럴 수 있었겠냐는 물음을 던지는 대신 정원은 작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래도 가족이었으니까.”

“그게 이해가 안 된다는 거야. 가족이라는 게 뭐라고…….”

“부모님만이 아니라, 형까지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말에 형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미묘하게 찌푸려진 표정이었다. 정원이 그를 향해 드러낸 애착 때문에 죄책감이 들기라도 한 걸까. 형은 불편한 얼굴로 눈을 피했다.

“…그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네. 나랑 네가 뭐 그렇게까지 가까웠다고……. 나 죽은 걸로 복수 같은 걸 하겠다고 설쳐?”

“그러게… 나도 모르겠다. 내가 대체 뭐 때문에 이런 짓을 했는지.”

정원은 허탈함이 섞인 웃음을 흘렸다. 가족을 전부 잃었을 때 느낀 정원의 슬픔과 분노를, 형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나날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정원의 간결한 물음에 형이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그래서 형은 왜 그랬는데? 그냥 가족이라는 게 형한테는 의미가 없어서? 그게 다였어?”

그 말에 그는 무감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인간들이 날 아꼈는데 왜 그랬냐고 했지?”

“그건…….”

“그래, 날 아끼긴 했지……. 쓸모가 있었으니까.”

“…….”

“그런데 원아. 그 인간들이 날 쓰게 해주는 대가로 기관한테 얼마를 받았는지는 아니?”

정원이 인상을 찡그렸다. 정원의 기억 속 부모님은 오히려 형의 능력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정원에게 너무 강한 능력을 타고난 형이 얼마나 괴로울지를 설명하며 ‘그러니 넌 최선을 다해 형을 도와야 한다’는 말을 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기억을 백 퍼센트 신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정원은 어렸고, 부모님은 정원의 존재가 형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말 때문에 정원을 외부에 보이는 것조차 꺼려했으며, 덕분에 어렸던 정원은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정원은 이어지는 형의 말에 그럴 리 없다며 우기는 대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이 실은 순수한 마음으로 형을 사랑한 게 아니라는 것. 정원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형을 한계까지 일하게 하고 그 대가로 거액의 돈을 받아 챙겼다는 것. 아직 어렸던 형에게 과도한 가이딩을 맡겼고, 그것 때문에 형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는 것.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침묵하던 정원이 확인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니까 형은…… 아버지 어머니가 형을 이용했고…… 그래서 그런 짓을 했다는 거지.”

“왜, 그래도 천륜은 배반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해?”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정원은 똑같이 날 선 대답을 돌려주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글쎄……. 모르겠어.”

그 말 그대로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 정원을 보며 형은 어깨를 으쓱했다.

“능력 없는 사람들을 저렇게 만들어 달라고 한 것도 나야. 다들 머릿속에 우릴 이용해 먹을 생각밖에 없으니까.”

정원은 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비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짓이 정당화되지 않는 건 당연하다. 그걸 따져 묻는다고 형의 생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원은 그냥 입을 열어 물었다.

“형이 이 얘기를 왜 하려고 한 건지 궁금해.”

형은 정원이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언성이 짜증스럽게 높아졌다.

“아직도 모르겠어? 유 관장도 다 알고 있었다고. 네 아버지, 네 어머니 왜 죽었는지 다 알았다고. 내가 사실 안 죽고 살아 있다는 것도. 근데도 널 이용한 거야. 왜? 예언에 나온 그 가이드가 필요하니까. 없어졌다고 하면 자기 입장이 위태로워질 테니까!”

막연히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정말 그랬다는 것을 확실히 들으니 그 무게가 달랐다. 유 관장에게 분노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나 정원의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런 말을 하면 내가 형이랑 똑같이 생각할 줄 알았어? 형처럼… 민간인을 다 그런 꼴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고 할 줄 알았어?”

“아닐 거라는 생각도 했지. 넌 원래 그런 애였으니까.”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린 형이 대답했다.

“이용당하고 있으면서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몰라. 아니,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좋다고 헤죽거리지.”

“그런데 왜 말했어? 형은 나한테 이해받고 싶은 게 아니잖아. 나 같은 건 어차피 형을 이해 못 할 거라고 생각하잖아. 그렇다고 날 구해 주고 싶은 것도 아니잖아? 부모님이 우릴 하나도 사랑하지 않았다거나… 국가 기관이 쓰레기라거나…… 그런 걸 나한테 말해서 뭘 어쩌고 싶었던 거야?”

형의 평가에 모멸감 같은 게 들지는 않았다. 대신 장황한 질문을 늘어놓았다. 형은 싸늘한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의미 없는 짓 그만하라고. 네가 포기하기만 하면 넌 살려줄 수 있어.”

“그러니까 왜?”

“왜냐니.”

“그냥 같이 세뇌해 버리면 그만이었잖아. 이런 상황 설명 같은 건 하지 말고… 번거롭게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그 말에 형의 표정이 조금 흐트러졌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고민에 빠진 걸까. 그도 자신이 왜 굳이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는 걸까. 그가 뭘 고민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무슨 심정인지도 알 수 없다. 아주 조금 남은 혈육의 정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라도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동시에, 자신이 그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도 혈육인 정원을 조금은 사랑했고, 그래서 정원만은 이 끔찍한 계획에서 빼 주고 싶다는 말이 듣고 싶은 걸까.

그런 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원은 곧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 대답하지 마.”

“…….”

“말한다고 내 생각 안 바뀌어.”

“넌 아직도…….”

“형이 정말로 날 생각한 거면, 한 번이라도 찾아왔겠지.”

말문이 막힌 듯 형의 표정이 변했다.

“넌 이용당하고 있는 거야, 난 살아 있어, 그 말 한마디라도 어떻게든 전해 줬겠지. 근데 안 그랬잖아.”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는 굳이 더 변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고개를 내저으며 품속으로 손을 가져갈 뿐이었다.

“난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했어.”

“형은 제정신이 아니야.”

“그럴지도.”

“난 한심하고, 형은 미쳤어.”

그리고 정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런 걸 두고 볼 수는 없어.”

형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품속에서 손을 다시 꺼냈다. 그의 손에는 이미 한 차례 정원을 향해 겨누었던 칼이 들려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정원을 처리해 버리겠다는 것 같았다.

정말로 자신을 죽이려 하는 건지 의문을 품을 겨를도 없었다. 정원은 자신을 향해 내질러지는 칼날을 보며 움직이지 않던 몸을 겨우 옆으로 굴렸다. 정원이 주저앉아 있던 자리에 형의 칼날이 훅 날아들었다.

그러나 정원이 앞서 형에게 대항하지 못했던 것은 상황이 워낙 갑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형도 어차피 초능력이 없는 가이드에 불과했다. 최선을 다해 체술을 익힌 정원과 달리, 몸싸움에 그리 능한 것 같지도 않았다. 칼을 들고 있다 해서 제압하지 못할 리 없었다.

정원은 그대로 형을 향해 달려들어, 그를 바닥에 메다꽂았다. 그러고는 형이 놓친 칼을 빠르게 주워 들어 형을 향해 치켜들었다.

이대로 그를… 처리해야만 하는 걸까.

자신의 손으로 형을 죽여야 하는 걸까.

죽이지는 않고…… 그러지 않고 해결할 방법은 정말 없는 건가.

치열한 고민이 이어지고 있을 때, 형의 입에서 단말마 같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안 돼!”

형은 사색이 되더니 본인의 가슴팍을 양 팔로 막았다. 엑스차로 교차한 팔이 단순히 심장 쪽을 보호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꼭 거기 있는 소중한 뭔가를 지키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정원의 머릿속에 직감이 스쳤다.

그게 뭐냐고 묻는 대신 형을 향해 덤벼들었다. 필사적으로 가슴팍을 감싼 형을 억지로 제압해 팔을 떼어내게 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 건지 형은 계속해서 저항했지만, 필사적인 것은 정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겨우 팔을 떼어낸 뒤 형의 목 근처를 파헤쳤다.

그의 목에 걸려 있는 것은, 생전 처음 보는 검은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그건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어떻게든 정원의 손을 쳐내려 애쓰는 형을 무시하고, 칼로 목걸이 줄을 끊어냈다. 짐승처럼 덤벼드는 형을 밀치며, 정원은 보석 위로 칼을 겨누었다.

형은 움직임을 멈췄다. 믿기지 않게도, 그는 가련하게 손을 모은 채 정원에게 빌듯이 부탁을 해 왔다.

“제발, 원아. 하지 마…….”

“중요한 거지? 이거.”

“…….”

“사장이랑… 연관이 있는 거지?”

형의 표정이 대답을 대신했다. 이걸 없애는 게 사장에게 어떤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게 분명했다. 정원은 망설이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높이 칼을 치켜든 뒤, 그대로 내리꽂았다.

파삭, 하는 감각과 함께…….

“안 돼!!!”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