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98화 (98/126)

98.

"여기예요!"

허름한 가게 문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며, 정원은 석주를 부축한 채 힘겹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부축을 도와주었다. 정원은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확인한 뒤 고맙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달리 연락할 상대가 없었다. 기관에 연락하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였고, 그 외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행사장에서 세뇌 당한 사람들을 케어하기 위해 전화를 건 것도, 지금 석주를 데리고 찾아온 것도 결국 이전에 본 적 있는 상대인 준희였다.

가게 안에 들어선 뒤, 준희는 구석진 곳에 있는 방으로 정원과 석주를 안내했다.

"대체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오랜만에 연락하시더니…… 아까 그 사람들은 다 뭐구요!"

방문 안으로 두 사람을 떠밀어 넣고는 준희가 물었다. 정원은 동요 없이 침착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떻게 됐나요, 그 사람들."

"일단 어떻게든 장소를 섭외해서... 되는 대로 입원부터 시켜 뒀어요. 말씀하신 대로 바깥에 소문날 일은 없게 잘 처리했고요."

준희는 정원이 바로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는 것이 답답한 눈치였지만, 짜증을 내며 캐묻는 대신 못마땅한 얼굴로 순순히 대답을 해 주었다. 정원은 '잘하셨습니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 사람들, 정말 다 뭐였어요? 사람들이 다들 말을 걸어도 대답도 안 하고, 꼭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던데요. 근데 검사해 보니까 몸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하던데요."

준희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물어 왔다.

"그것도 에스퍼 능력인가요?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경우인데......."

"지금 한번 다시 확인해 줄래요? 아까랑은 상황이 달라졌을 것 같아서."

정원은 설명 없이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원인이 되었던 상황이 해결되었으니, 이제 그 사람들의 상태도 원래대로 돌아왔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준희는 빠르게 대답했다.

"아, 네. 지금 병원 쪽에 연락해 볼게요."

정원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정원이 여전히 석주를 부축한 채 힘겹게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준희는 방 한구석에 있는 간이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석주 씨는 여기 눕히시구요."

당연하게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정원이 석주를 눕혀 놓고 한숨을 돌리자, 반듯하게 누운 석주의 모습을 바라보며 준희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도 심각하다 싶었는데 오늘은 진짜 상태가 말이 아니네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저번이라면......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석주가 폭주 직전까지 갔던 날이자, 처음으로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그를 가이딩했던 날. 이제는 그날을 떠올려도 처음처럼 얼굴이 홧홧해지지는 않았다. 다만 가슴 근처가 이유 없이 저릿하기만 했다.

정원의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무슨 일이었냐니까...... 끝났다고만 하네."

시원하지 못한 대답에 준희가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정원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단언하듯 말했다.

"다시 이럴 일은 없을 거예요."

"......."

정원은 한동안 누워 있는 석주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준희는 그 옆에서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그쪽도 지금 상태 엄청 나빠 보이는 거 아세요? 당장 쓰러질 것 같은데, 그러고 계시지 말고 잠깐 쉬세요. 제가 차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차는 괜찮습니다."

고민 없이 대답했다. 준희는 잠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원을 보다가, 짧은 한숨과 함께 알았다며 자리를 떠났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원은 준희가 나간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잠든 석주의 얼굴은 깨어 있을 때에 비해서 훨씬 앳된 느낌이었다. 그가 자신보다 연하라는 사실은 가끔 믿기 힘들었고, 잊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는 실감이 날 수밖에 없었다.

"강석주 씨."

그가 깨어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그의 이름을 한번 불러 보았다. 석주는 미동 없이 누운 채 아주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기만 했다. 잠이 깬 것 같지는 않았다. 잠들었다기보다 기절한 상태에 가까우니 이름 한번에 깨어날 리는 없었다. 정원은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놀라는 대신 묵묵히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그 자리를 가만히 눌렀다.

미간을 펴 주자 석주의 표정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이가 잠든 것 같은 평온한 모습을 보며 정원은 밀려오는 노곤함을 참기 위해 애썼다.

"아까 했던 말......"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 입을 열었다.

"진심인가요?"

오늘이 오면 죽은 목숨일 거라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살아남더라도 더는 살아갈 이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런 탈력감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겠다거나, 더는 희망이 없다거나, 그런 비관적이고 불행한 생각 대신 석주의 말을 자꾸만 곱씹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한다고 했어.'

그렇기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그게 다였다. 정원은 자리에 앉아 벽에 몸을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 * *

"사장님. 사장님!"

정원과 그의 형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싸움이 벌어지고 있던 건물 옥상으로 뛰쳐 들어갔다. 형은 정원에게 단단히 붙들린 상태라 사장을 향해 달려가지 못했다.

"이거 놔!"

그런 힘이 어디에 남아 있었던 것인지, 형은 정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정원 역시 필사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를 단단히 붙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옥상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장의 몸뚱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석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정원이 여기까지 와서 놀란 것인지, 조금 크게 뜨인 얼굴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금세 표정을 담담하게 바꾸며 입을 열었다.

"놔 줘도 괜찮아요."

그 말에 정원의 손에서 거짓말처럼 힘이 풀렸다. 형은 고삐 풀린 말처럼 사장에게 달려가 쓰러진 몸을 부둥켜 안았다. 가이딩을 하려는 것인지 사장의 얼굴과 목, 팔 등을 정신없이 짚어 보는 손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오직 석주의 말만을 믿고 형을 놓아주었다. 괜찮을 거라는 보장이 있으니 그런 말을 한 거겠지. 정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죽인 건가요?"

"곧 죽을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살아 있어요."

"저렇게 둬도 괜찮은 거 맞나요?"

"네, 가이딩을 해 봤자 소용없어요. 다시는 능력 같은 건 못 쓸 테니까."

"......."

담담하게 나온 말이었다. 정원은 순간 말문이 막힌 채 둘의 모습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말대로 정원의 형은 끊임없이 사장을 향해 가이딩을 쏟아붓고 있었지만, 사장에게서는 능력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석주 씨가 그랬던 것처럼......."

"능력이 돌아올 가능성이 있냐고요? 아니요."

단언하는 말에 의심은 생기지 않았다. 정원은 형의 목에 걸려 있던 검은 보석 목걸이를 깬 순간부터 사장의 끝을 직감했다. 그 무엇인지도 모를 목걸이에 대체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인지, 그걸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사장의 능력이나 목숨과 직결되어 있던 장치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강석주는 완전한 복수에 성공했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한 차례 자신의 능력을 빼앗아 갔던 에스퍼를 두 번 다시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으니까.

멍하니 사장과 형의 모습을 바라보던 정원은 곧 정신을 차리고 그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능력을 빼앗겼든 아니든 사장을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은 똑같았다.

형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들은 뒤라고는 하지만,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복수만이 유일한 목적인 것도 아니었다. 능력이 사라졌다고 해도 한번 그런 괴이하고 사악한 계획을 세웠던 이가 다시 악의적인 일을 꾸미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형은 사장의 몸을 부둥켜 안은 채 다가오지 말라며 비명 같은 소리를 질러 댔다.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가던 정원은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멈칫, 걸음을 망설였다.

빠르게 뒤를 돌아보자 제자리에 무릎을 꿇은 석주가 보였다. 과도하게 사용한 능력 탓일까. 정원은 찰나의 망설임 끝에 몸을 돌려 석주에게로 달려갔다. 쓰러지는 몸을 받아 안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정신 차릴 수 있겠어요?"

"가 봐야죠, 정원 씨....... 나한테 이럴 게 아니라...... 할 일이 있잖아요."

당연하다는 듯 정원이 떠날 것을 상정한 말이었다. 정원은 얼굴을 찌푸린 채 석주의 이마를 짚어 보기만 했다.

그때 등 뒤에서 바르작거리던 형은 부산스러운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했다. 정원이 다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람 소리 비슷한 것과 함께 그 자리에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공간 이동이었다.

에스퍼도 아닌 형이 어떻게 공간을 이동했는지, 원리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정원은 다시 석주를 향해 고개를 돌린 뒤 중얼거렸다.

"그런 건 괜찮아요. 강석주 씨는 그냥......"

* * *

"푹 쉬어요."

눈을 뜬 정원이 작은 소리로 입을 열어 말했다.

잠든 석주의 얼굴을 다시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보석을 깨뜨린 뒤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공간 이동으로 사라진 둘의 기척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 또한 그 보석에 달려 있던 능력 중 하나인 걸까. 정원은 사라진 형과 사장의 기척을 머리로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떠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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