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99화 (99/126)

99.

"안 쉬시는 거예요?"

"네, 쉴 시간이 없어서요."

문을 열고 나오자 준희가 의아한 듯 물었다. 정원은 순순히 대꾸했다. 정원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펴본 준희가 살짝 심란함이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더 했다.

"지금 나가시려구요?"

"그래야죠."

"......."

준희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지금 정원이 밖을 돌아다닐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실제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눈을 붙인다면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잠들어 버리면 며칠 동안 죽은 듯이 잠만 자게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자고 일어나 보면 지금 이 기묘한 느낌도 사라질지 모른다. 형과 사장을 찾아낼 방법이 자신의 감각뿐인 상황에 느긋하게 잠이나 자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럼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세요."

망설이던 준희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정원은 이번에도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럴 시간이-."

"제가 도와드렸잖아요?"

준희가 가볍게 말을 끊었다. 정원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저희 싸게 일하는 사람들 아닌데, 지금 상태를 보니까 개털 같으신데요?"

"그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보수라면 곧 드리겠습니다."

"뭐...... 돈은 돈이구요, 저 굉장히 힘들게 도와드린 거니까 적어도 어떤 상황인지 알 권리는 있다고 봐요. 차 마시는 동안 대충이라도 말해 주세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희는 정원을 낡은 소파 위에 앉힌 뒤, 차를 가지러 갔다.

정신을 놓지 않도록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버텨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준희가 오랜 시간을 잡아먹지 않고 금세 차를 내 왔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눈빛으로 계속해서 권하는 탓에 거절하지 못하고 마실 생각 없던 차를 입에 댔다.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마자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다. 정원은 묘하게 맑아지는 정신을 느끼며 놀란 눈으로 준희를 바라보았다.

"맛이 괜찮죠? 피로가 잘 풀리더라고요. 지금 안색이 진짜, 말이 아니셔서. 필요할 것 같아서 드렸어요."

"......고맙습니다.“

"고마운 줄 아시면 이제 설명해 주세요."

준희가 너스레를 떨었다. 정원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손에 쥔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상황을 아주 간략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만 골라 설명했다.

석주와 자신은 테프트의 사장을 처리하기 위한 작전을 실행 중이었고, 사장은 온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그걸 저지하기 위해 사장과 싸우다가 석주가 저 상태가 된 거라는 말.

너무나 간단하게 요약된 설명을 들은 뒤, 준희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물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에스퍼 능력이라는 게 원래 조건이나 범위 같은 게 있는 거잖아요? 세뇌 같은 정신계 능력을 소리만으로 그렇게 발동시켰다는 것도 신기한데, 전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그 짓을 하겠단 건......."

정원이 묘한 얼굴로 준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상대가 어떻게 됐는지는 안 물어보나요?"

"석주 씨가 이겼으니까 살아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에요?"

"그렇기야 한데......."

상대는 그 테프트의 사장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에스퍼. 당연하게 석주의 승리를 예상했다는 점이 신기했다.

"석주 씨는 여태 제가 본 에스퍼 중에 제일 세니까요. 지는 게 상상이 잘 안 가네요."

준희가 웃는 듯 마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상대를 잘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인가, 아니면 석주를 신뢰해서 나온 말인가.

어찌됐든 여기에 석주를 데려와 맡기기로 한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정원은 조금 식은 차를 입안에 털어 넣듯 쏟아 마신 뒤 말했다.

"가설이지만, 그 사람은 아마 어떤 매개 같은 걸 통해서 능력을 전달하는 방법... 을 알아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까 그 비슷한 걸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요."

준희는 바로 이해했다는 듯 호응했다. 정원이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저희랑 거래하던 사람 중에 돈 정말 좋아하는 에스퍼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능력으로 장사하는 기가 막힌 방법을 떠올렸다면서 그랬거든요."

"장사라고요?"

"네, 에스퍼가 능력을 물건 같은 데에 담아서, 비능력자도 그 물건만 가지고 있으면 그 에스퍼의 능력을 한두 번 정도 쓸 수 있게 하겠다는 거였죠. 예를 들어서 반지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에 능력을 담는다거나.... 거의 성공할 뻔했을걸요? 근데 능력을 담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성공했는데, 그게 유통기한이 너무 짧아서 문제였대요. 며칠도 안 가서 담겨 있던 능력이 사라지니까."

정원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준희의 말은 정원의 의도했던 것과는 살짝 다른 방향이었다. 정원이 말한 것은 사장이 소리에 능력을 실어 그 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능력이 닿게 만들었다, 정도였지만...... 준희의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 목걸이.'

형이 가지고 있던 목걸이에 사장의 능력이 담겨 있던 걸까? 그래서 그걸 깨뜨리는 순간 사장에게도 심각한 영향이 생겼고, 덕분에 석주가 그를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상태로 만들 수 있었던 건가.

또 이능력이 없는 가이드인 형이 마지막에 사장을 데리고 순간이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가설과 연관이 있는 걸까.

아마 정원이 지금 두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능력이 담긴 매개를 깨뜨려서일지도 몰랐다. 준희는 자신이 상황을 알고 싶어 질문을 던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정원의 의문 역시 많은 부분이 해소되었다.

정원은 생각에 잠긴 채 빈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어떤 부분이 특히 고마우세요? 고마울 일이 좀 많았잖아요. 갑자기 전화해서 사람들을 좀 데려가라질 않나, 석주 씨가 쓰러졌는데 도와줄 수 있냐고 하질 않나......."

"좋은 차를 내줘서요."

정원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준희는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별말씀을요."

다른 말이 덧붙여지지는 않았다. 정원은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정말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

"준희 씨."

"음...... 네. 말씀하세요."

"강석주 씨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저한테요?"

정말로 의아하다는 듯한 투였다. 정원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준희는 어이없는 목소리로 '석주 씨 본인이 딱히 필요없다고 하실 것 같은데......'라 중얼거렸지만, 정원은 대답 없이 매무새를 고친 뒤 문 쪽으로 향했다.

준희가 다급하게 말했다.

"다녀오세요!"

"......."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시 오시는 거예요."

그 말에 냉큼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장과 형의 행방을 확인한 뒤에도 자신이 살아 있다면, 그리고 석주가 여기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면.......

준희의 말대로 '다녀올' 수도 있지 않을까.

정원은 말없이 묵례한 뒤 문을 열었다. 적당한 온도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 * *

"다 죽어가는 몸으로 여길 왜 와?"

그들을 찾아낸 곳은 노른의 구석진 곳에 있는 모텔 방이었다. 낡아 빠진 모텔은 주인조차 장사에 손을 놓은 것인지, 뚫고 들어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사장은 낡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형은 보호하듯 그 앞을 가로막은 채 정원을 노려보았다.

이제 자신을 완전히 적대하는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함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정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다 죽어가는 몸이어도 형이랑 저 사람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장은 눈을 감은 채였다. 그에게서 이토록 쇠약해진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석주가 절대 다시 능력을 쓸 수 있을 리 없다고 단언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분명 그사이에 가이딩을 받았을 텐데.......'

그런데도 이 상태라는 건 더는 가이딩이 먹히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리라.

"날 죽이러 왔나?"

"......."

"그럴 거라면 빨리 부탁하겠네. 지금 좀 힘들어서 말이야......."

"사장님!"

형이 비명처럼 그를 불렀다. 사장은 이미 삶을 포기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숨통을 끊기 위해 온 것이 맞지만, 죽여 달라고 목을 들이미는 모습을 보니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정원은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형을 막아낸 뒤 뒷목을 쳐 그를 기절시켰다. 정원도 힘이 빠진 상태였지만 형 역시 마찬가지라 어렵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사장이 물어 왔다.

"죽이지 않을 건가?"

"내가 굳이 손을 댈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알아봤군. 그래....... 자네가 지금 죽이지 않아도 얼마 남지 않았을 거야."

죽이지 않을 거냐는 말이 형을 향한 것이든, 사장을 향한 것이든 마찬가지였다. 정원의 냉랭한 얼굴을 보며 사장이 엷게 웃었다.

"석주 녀석이 많이 크기는 했어.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사람을 피 말려 죽일 줄도 알고."

석주의 능력이 사장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더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정원은 그 구체적인 원리가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석주가 그의 몸에 어떤 저주 같은 것을 심었든, 그의 능력을 어떤 식으로 없애 버렸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친한 척 부르지 마시죠."

정원의 말을 들은 사장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나 웃음 소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곧 헐떡이듯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을 데려왔으니 날 막을 가이드 같은 건 이제 없다고 생각했는데......."

"......."

"그게 설마 자네였을 줄이야."

정원은 소용돌이치는 감정 속에서 한참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오랜 침묵 끝에 정원의 입이 열렸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사시죠."

"......."

"얼마 남지는 않았겠지만요.“

정원은 쓰러진 형과 사장을 남겨 둔 채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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