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00화 (100/126)

100.

걸음이 휘청거렸다. 금방이라도 기절하듯 잠이 들어 버릴 것 같았다. 아스팔트 맨바닥에 머리를 대더라도 그대로 잠들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피로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장이 묵고 있는 모텔에서 잠을 청할 생각만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정원은 꾸역꾸역 걸음을 옮겨 그곳을 빠져나왔다.

인근 아무 호텔에나 들어가 아무 방을 잡은 뒤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개운하게 씻고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는 법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대로 긴 잠에 빠져들었다.

꿈은 아주 길었다. 정원이 잠든 채로 헤매다 겨우 눈을 떴을 때에는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점이었다. 끔찍한 꿈을 꾸고 말았다. 정원은 화들짝 놀란 채 창가로 다가갔다. 창 밖으로 오가는 사람의 모습을 당장 찾을 수가 없어서 마음이 불안해졌다. 내선 전화기를 들어 로비에 전화를 걸자 아주 길게 신호음이 울린 뒤, 그래도 누군가가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들렸다.

-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정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은 어제 그런 식으로 회장을 죽이지 않고 돌아온 일에 대해 내심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정원이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정의감이나 죄책감 탓은 아니었다. 그는 회장이 마지막까지 고통받기를 원했다. 단숨에 숨통을 끊어 주는 것보다, 다시 살아날 리도 없이 저주에게 갉아먹히듯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더 힘들고 괴로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그렇게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능력을 다시 되찾은 사장이 다시 한번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키려 드는 꿈을 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원이 지금 어떤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꿈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멀쩡한 것을 확인했으니 됐다. 정원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하고 전화를 끊는 대신 룸 서비스를 주문했다.

도착한 음식을 먹으며 생각했다.

'강석주에게는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사장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면 그는 그럴 수 있다고 말해 줄까. 아니면 그토록 복수하고 싶다 말했으면서 죽이지도 않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려나.

어쨌거나 정원은 그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음식을 다 먹어 갈 때쯤 전화가 왔다. 정원은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평소라면 어떤 번호인지 꼼꼼하게 확인한 뒤 받을지 말지를 결정했겠지만, 지금 정원에게 그런 것을 판단할 기운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여보세요?"

- 네, 여보세요.

준희의 목소리였다. 전화로 들어 잠시 헷갈렸지만 준희라는 것은 분명했다. '아, 준희 씨.' 하고 대답하자 준희는 '맞아요' 한 뒤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한 거라면 더 문제가 될 일은-.”

- 그, 그런 게 아니구요.

차마 '잘 처리했다'고 답할 수는 없어서 더 문제될 일은 없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려 했다. 그러나 준희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말을 끊어 버렸다. 정원이 의아함에 빠진 사이 준희가 덧붙였다.

- 음, 뭐, 문제 안 될 거라는 건 잘 해결하셨다는 거겠죠....... 고생하셨어요.

"그게 아니면 무슨 일로 연락한 건가요."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정원은 뒤늦게나마 자신을 포장해 주려 하는 준희의 말을 무시하고 질문을 던졌다. 준희는 난감하게 대꾸했다.

- 그, 석주 씨 깨어났어요.

깜짝 놀란 정원은 그대로 굳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깨어날 수 있을 거라 믿고는 있었지만, 자신보다 훨씬 긴 시간 잠들어 있을 줄 알았던 그가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눈을 떴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정원은 살짝 들뜬 목소리로, 이상하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한 채 대답했다.

"그거 정말 잘됐네요. 다행입니다. 잘됐어요, 정말로......."

- .......

준희는 대답이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정원은 그 떨떠름한 반응을 보며 다시 질문했다.

"왜 그런 반응인가요. 뭔가 잘못되기라도 했어요?”

- 그게.

"상태가 안 좋은가요? 위급해요? 어디가 아프대요?"

머뭇거리는 준희를 향해 석주의 상태를 캐물었다. 준희는 애매한 투로 대답했다.

- 그런 건 아니에요. 분명히 상처가 심해서 걱정했는데, 막상 깨어나고 나서 보니까 그새 좀 회복이 된 건지... 아무튼 얼굴이 멀쩡했어요.

다행인 일이지만, 그렇다면 준희가 이렇게 난감해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그가 정원에게 오지 말라는 말을 남기기라도 한 건가.

"...혹시 내가 가는 게 곤란한 상황이라면-."

- 그런 건 아니에요. 일단 오셔서 보시는 게 제일 빠를 것 같은데.......

정원은 기묘한 불안감에 빠진 채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가겠습니다."

* * *

처음부터 갈 생각이었다. 다만 준희의 말을 듣고 그 시점이 조금 더 빨라졌을 뿐이었다. 빨리 나선 것이 무색하게도 정원은 가는 길 내내 조금씩 미적거렸다. 왠지 석주의 얼굴을 보고 설명하는 것이 두렵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준희의 이상한 태도. 말로는 와서 확인하라고 했지만, 역시 강석주는 정원이 오지 않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그가 화가 나고도 남는 상황이었으니까.

'이제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건 취소하려나.'

부정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석주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정원에게는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정원은 근처에서 꽃을 파는 노점상에게 꽃다발을 하나 고민했다. 병문안인 셈 치면 이 꽃도 너무 과하지는 않을 터였다. 꽃을 반입하는 것이 금지된 전문 병원도 아니니까.

정원은 기대와 불안에 동시에 젖은 채 준희의 가게로 향했다.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되짚어 볼 겨를은 없었다. 정원은 가만히 문을 두드렸고, 준희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곧장 문을 열어 정원을 반겼다.

"오셨네요. 어? 손에 그건 뭐예요?"

꽃다발을 든 정원을 바라보며 준희가 물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문득 지독하게 민망하고 부끄러웠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뭐, 병문안 비슷한 거니까요."

준희는 뭔가 불편한 것이 있어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정원은 의아한 듯 그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정원 씨한테도 이런 면이 다 있네요."

"나쁜 뜻인가요?"

꽃을 사들고 나타난 것이 많이 안 어울렸나. 당연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역시 조금 머쓱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정원 씨는 뭔가 꽃다발 들고 고백한다든가, 이런 게 안 어울리는 타입이라....... 아, 그니까 지금 고백을 하러 오셨다 뭐 그런 뜻은 아니고."

말이 길어질수록 준희의 횡설수설거림도 심해졌다. 어떻게든 수습하려 양손을 내젓는 준희에게서 정원은 가볍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석주가 누워 있던 방의 문을 열었다.

그는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반쯤 열린 창틈으로 햇살이 쏟아져 잠든 석주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잠든 것이 분명한 모습을 보며 정원이 의아하게 눈을 돌렸다.

'깨어났다더니?'

눈빛으로 묻자 준희가 당황해 말했다.

"거짓말 아니고요, 분명히 일어났어요. 지금은 아직 좀 피곤하다면서 다시 잠든 거구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사실 정원은 조금 안심했다. 그에게 들을 말이 내심 두려워기 떄문이었다.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겠네요."

정원의 말에 준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감을 접어 놓은 채, 정원은 불편한 의자를 끌어다가 석주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놓았다. 그 위에 걸터앉은 채 잠든 석주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 차라도…."

"왜 그렇게 차를 먹이는 데 집착해요. 괜찮습니다."

정원의 농담 섞인 대꾸에 준희는 어색하게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가 일어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 건지도.

"음......."

찌푸려지는 석주의 얼굴을 바라보고, 정원은 화들짝 놀랐다.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정원이 급하게 문 쪽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 했다.

"준희 씨......!"

부르려던 것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원은 걸음을 멈췄다. 소매 끝이 붙들렸기 때문이었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않은 채, 찌푸려진 얼굴로 정원의 소매를 잡은 석주가 다시 한 번 침음을 냈다.

"으음......."

"......괜찮나요? 정신이 들어요?"

석주가 그대로 눈을 떴다. 그는 두어 차례 졸린 듯 눈을 깜빡거리며 정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정원은 어쩌면 그가 자신에게 전혀 화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낙관적인 기대를 했다. 그는 그대로이고, 그가 했던 고백 역시 여전히 그대로 유효할지 모른다는 기대.

이렇게 소매를 붙들었으니까.......

그러나 눈이 마주쳤을 때, 석주는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알 수 없는 얼굴로 정원의 소매를 놓았다.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 내리는 석주를 보며 정원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그, 강석주 씨......."

"준희야."

석주가 잠긴 목소리로 불렀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준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금 자신을 무시한 건가. 정원이 민망함과 괴로움이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준희는 정원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일어나셨어요......?"

"어, 물 좀."

간결하게 대답한 석주는 그대로 정원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낯선 눈빛이 자신을 훑는 것을 느끼며, 정원은 할 말을 생각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그떄 석주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

"그쪽은 누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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