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잠시만요! 정원 씨! 잠깐 기다려 봐요!"
준희가 다급하게 정원의 뒤를 따라 나왔다. 정원이 감정에 못 이겨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탓에 그녀는 쉽게 정원을 따라잡았다. 준희는 난감한 얼굴로 정원의 옷깃을 붙들었다. 평소라면 그렇게 격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겠지만, 지금 정원은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준희의 손을 날카롭게 쳐낸 정원이 가쁘게 숨을 몰아 쉬었다.
겨우 이 거리를 뛰어 나왔다고 지쳐서는 아니었다. 이 상황에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준희의 얼굴을 돌아보면 눈가가 젖어 있다는 사실을 들킬 것 같았고, 그러면 정말로 눈물을 쏟아 버릴 듯해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무슨 심정이실지는 알아요! 근데 그래도 잠깐만 기다려 보시면......."
"뭘 안다는 건가요."
"......."
준희를 힐난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정말로 정원 자신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런 거라면, 대체 이 마음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강석주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니었다. 정말 기억이 없는 게 아니고서야 그런 눈빛으로 정원을 볼 리도 없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이렇게 자신하는 건 민망한 짓이었지만 그래도 그것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그건 완벽하게 남을 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강석주는 정말로 정원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요...... 제가 정원 씨 마음 백 프로 이해할 수 있다고는 못 하겠어요. 근데 그래도... 이렇게 가면 정원 씨만 너무 힘들 거 아니에요?"
"......."
이렇게 가지 않고 남아 그녀의 말을 듣는다고 조금 덜 힘들어질까. 그러나 정원은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가쁘게 차올랐던 숨을 가라앉히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잔뜩 일그러졌던 미간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펴며 입을 열었다.
"......준희 씨 이름을 부르던데요. 다른 건 기억하는 건가요?"
"그런 것... 같았어요."
준희가 정원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정원은 애써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다시 호흡이 조금 거칠어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나만 잊어버렸다는 거네요."
허탈함인지 쓸쓸함인지 모를 헛웃음이 터졌다. 분명 얼굴은 간신히 웃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새는 바람 빠진 웃음 소리는 거의 우는 것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준희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인지 본인이 더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열심히 팔을 휘저으며 하는 말은 그녀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여과 없이 보여 주었지만, 준희가 진심으로 정원과 석주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것과 별개로 정원은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준희 씨."
자포자기한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비장하게 들리기도 하는 목소리로 정원이 불렀다. 움찔하는 준희를 돌아보며 정원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강석주 씨를 잘 부탁할게요."
"......."
"다른 건 다 기억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내가 없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준희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정원은 그녀가 망설이는 틈을 타 할 말을 빠르게 이어 나갔다.
"오히려 내가 계속 주위에 있는 게 더 문제예요. 안정이 필요한 상태인데, 내가 보이면 혼란스럽기만 할 테니까."
"안정…. 그건 맞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둘 수도 없잖아요!"
곤란한 표정을 짓던 준희가 결국 그렇게 소리를 높여 말했다. 정원은 여전히 침착하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자신이 더 괴로운 얼굴로 보던 준희가 말했다.
"기억 찾게 만들어야죠. 다시 기억하게 할 수 있을 거예요."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정원의 입에서는 상당히 회의적인 답이 나왔다. 단호하던 준희가 그대로 움찔했다.
"딱 나 하나만 잊었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죠."
"이유라뇨...... 그런 말이 어딨어요."
이번에도 준희 쪽이 더 서운해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정원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만큼 내가 힘든 기억이었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 말은 입 밖에 내고 나니 더 아프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이 오니 스스로를 탓하게 됐다. 차마 자신을 잊은 강석주를 원망할 수는 없었으니까. 정원 자신이 그만큼 괴로운 기억이니 잊을 수밖에 없었던 거라며 자신을 깎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준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정원의 말을 듣다가, 곧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솔직히 제가 두 분 일에 대해 다 아는 게 아니라서 확실하게는 말을 못 하겠어요. 그런 거 아니라고 해 봤자 무책임한 말일 것 같구요."
"굳이 위로하려고 할 필요는......."
"근데 힘든 기억이라는 게 꼭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는 뜻이에요?"
도전적인 말이었다. 워낙 확신에 차 있는 통에 정원은 이렇게 참담한 와중에도 당장 입을 열어 '그러네요' 하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다행히 그런 충동은 참아 냈지만.
"정원 씨는 힘든 기억은 그냥 다 지워 버리고 싶으세요?"
대답을 피하거나 거짓을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원은 솔직하게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사장과 관련된 것, 가족들과 관련된 것. 그리고 이제 강석주와 관련된 것조차 정원에게는 힘든 기억이었지만, 그걸 잊고 싶지는 않았다.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힘들지만 기억하고 싶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 석주 씨라고 뭐 다르겠어요."
정원은 유리알 같은 눈으로 준희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아닌 석주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를 상상하고 있으면, 그는 방금 본 낯선 얼굴이 아니라 다정한 미소를 띤 모습으로 돌아갔다. 정원은 그런 웃는 얼굴을 상상하며 입을 열었다.
"잘 있어요."
"......."
준희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녀가 말했듯 희망을 가지고 그의 옆에 머무른다면 기억을 되살릴 수도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정원 자신은 잊지 못하더라도, 석주에게 굳이 그런 것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을 계속해서 사랑하고 기억해 주길 바라지만 이대로 자신을 잊은 채 자유롭고 행복해지길 바라기도 했다.
준희는 정원의 생각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정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정원이 결국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하자 그 등에 대고 외쳤다.
"꼭 다시 와요!"
"......."
"연락하시구요!"
정원은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기억 찾게 도와주고 있을 테니까요!"
등 뒤에서 계속해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좋은 사람이었다. 준희에게 '강석주를 부탁한다' 같은 말을 남긴 것이 전혀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도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원은 울음을 삼키며 발을 움직였다. 석주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 * *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원은 가장 먼저 달려가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그 앞에 서 있던 알렉스는 정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당황한 듯 뒤로 두 걸음 물러서더니, 겨우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손에 든 신문을 건넸다. 정원은 살짝 억양이 서툰 노른어로 '고마워요.' 말한 뒤 신문을 가지고 식탁 앞까지 걸어왔다.
"알렉스 왔어? 잠깐 들어가서 뭐라도 먹고 갈래? 좋은 쿠키가 있어."
"어... 그건 좀 실례 아닙니까?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들어오라니까. 정원 씨가 만든 쿠키인데 정말로 맛있어. 장사해도 될 정도로."
정원은 굳이 겸양을 떨지 않고 작게 웃었다.
어떤 부분에 혹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알렉스는 반색하며 집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정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 쪽으로 향했다. 벌써 집주인 내외의 아침 식사를 차려 놓은 참이었다. 입이 하나 는다고 해서 특별히 번거로울 건 없었다. 어색하게 서 있는 알렉스에게 자리를 권하자 그는 뻣뻣하게 식탁 앞으로 걸어갔다.
"역시 원 씨가 차려 주는 아침이 제일 맛있네."
"당신은 무슨 와이프 칭찬하듯이 그런 소리를 해?"
메리의 칭찬에 존이 타박했다. 메리와 존.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름을 가진 이 부부는 지금 정원이 머무는 집의 주인 내외였다. 나이는 마흔 초중반쯤 되었을까.
정원이 떠나온 지도 수 개월이 지났다. 그사이 정원은 거의 하지 못했던 노른어에 익숙해졌고, 맛있는 쿠키를 굽는 법을 익혔으며, 이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날 정원은 무작정 기차를 잡아 타고 먼 곳으로, 당장 표를 끊을 수 있었던 곳 중 가장 먼 곳으로 향했다. 기차 안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정원은 한적한 시골의 정취가 느껴지는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노른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도심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고, 그렇기에 같은 곳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낯선 마을이었다.
노른에서 가장 구석진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한 곳. 공기는 맑고 산은 높았다. 높은 빌딩 없이 낮은 지붕들과 넓게 펼쳐진 호밀밭이 정원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또다시 기차를 잡아 타고 더 먼 곳으로 떠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마을에 머무른다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정원은 처음으로 느긋한 생활이라는 것을 해 보았다. 실제로 마음이 편해진 것도 사실이었고. 속세와 단절된 듯한 마을이라 바깥 소식을 접할 길이 많지 않아 더 평온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렉스에게 줄 차를 내온 정원은 존이 들고 있는 신문에 무심코 시선을 주었다. 존은 오, 하는 소리를 내며 정원에게 잘 보이게끔 신문을 내밀었다.
“궁금해?”
아무 생각 없이 존이 보는 페이지에 시선을 고정한 정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테프트 전 사장 사망…… 기업 이대로 무너지나]
단절되었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