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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102화 (102/126)

102.

무슨 정신으로 멀쩡히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머릿속은 백지가 된 것처럼 멍했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지내게 된 뒤로 정원은 일부러 마을 바깥 세상에 관한 일을 잊고 지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꽤나 초연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초연함은 그 짧은 기사 헤드라인 한 줄을 전해 들은 것으로 깨질 만큼 얄팍한 것이었나 보다.

'그 남자가...... 죽었다고?'

멍하니 생각했다. 그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충분히 예측하고 있던 일이기도 했다.

정원이 그곳을 떠나오기 전 이미 사장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였으니까. 석주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죽음의 저주라도 심어 놓은 것인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걸 상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죽음의 소식이 목전에 다가오니 무게감이 달랐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남자는 자신의 부하였던 이들마저 모두 의식이 없는 상태로 세뇌하려 했는데, 그렇다면 부하들에게도 돌아갈 수도 없지 않았을까. 배신당한 부하들은 그를 세상에 고발했을까? 아니면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라 여겨 함구했을까. 사람들은 그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고 있을까.......

또, 형은 어떻게 되었을까.

형을 떠올리면 여전히 입안이 쓰고,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저며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족을 잃는 것은 신체의 일부를 도려내는 것과 같은 고통을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원은 이미 잃었다고 생각했던 형을 되찾는 듯했다가, 그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영영 잃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정원은 떠나 오면서 그를 이미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니 설령 형이 죽었다 해도, 지금의 정원과는 관계 없는 일이었다.

사실 형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랬다. 이제 정원이 바깥 돌아가는 일에 신경을 쓸 이유는 없었다. 세상은 정원 자신 없이도 멀쩡히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정원은 자신을 필요로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석주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가 원한다면 그의 옆에 머무를 생각도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마저도 아니었다.

그가 정원을 기억에서 지워 버린 이상, 그에게도 정원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래....... 더는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스스로 하지만 그 생각으로 아찔한 속마저 달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

그때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화들짝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알렉스였다. 정신이 없는 상태로도 그에게 내주려던 차를 제대로 주기는 한 모양인지, 그는 거의 비어 가는 찻잔을 든 채로 정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원은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물었다.

"아... 미안해요. 무슨 말이라도 했나요?"

"어, 아뇨! 아뇨, 별말은 아니었어요. 그냥 이 차가 정말 맛있다는 말을......."

"다행이네요."

"말했지,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니까."

덤덤하게 넘어가는 정원과 달리 메리 쪽이 오히려 더 뿌듯해하는 듯했다.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알렉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정....... 혹시 오늘 바쁘신가요?"

의아한 듯 눈을 마주쳤다. 알렉스는 허둥거리며 설명했다.

"그, 다른 게 아니라......! 오늘 장이 선다고 하더라고요."

"장이요?"

"예, 외부 상인들이 많이 왔을 겁니다. 정은 아직 본 적이 없죠? 여기 오신 뒤로 장이 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흥미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알렉스는 설명에 더 열을 올렸다.

"이 마을이 워낙 좀, 시골이잖아요. 외부에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는 건 흔치 않아서....... 마을 안에서는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 한정돼 있다 보니까, 오늘 같은 날이 정말 흔치 않아서요."

자꾸 흔치 않다는 말을 반복하는 걸 보니 묘하게 긴장한 모양이었다. 말없이 이어질 제안을 기다리자, 그는 예상대로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 왔다.

"그러니까, 저,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가 보실래요?"

“.......”

"유명한 공연단도 온다고 하더라고요! 분명히 재미있으실 겁니다."

“한번 가 보는 게 어때? 외출할 일이 잘 없었잖아. 기분 전환이 될걸?”

알렉스만이었다면 몰라도, 존까지 그렇게 말하니 생각해 볼 만은 한 것 같았다. 정원은 고민 끝에 입을 열어 물었다.

"식재료를 파는 사람들도 오나요?"

“아, 물론이죠!”

“확실히...... 보충해야 할 재료들이 있긴 했는데.”

"좋네요! 사러 가면 되겠어요.“

알렉스의 밝은 반응을 보며 정원은 살짝 경계하듯 물었다.

"같이 가 주겠다고 하시는 건가요? 괜히 저 때문에 시간을 뺏기실 필요는 없는데요."

"시간을 뺏다니요. 전 원래 한가한 놈입니다. 오늘 할 일은 이 댁에 신문을 전해 드리는 게 끝이었는걸요. 또 저도 그 공연이나 장에는 흥미가 있어서요. 정이 없었다고 해도 혼자서라도 갔을 겁니다."

“그런가요.......”

"그럼요, 짐도 들어 드릴게요! 같이 가시죠."

정원은 담백하고 무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알렉스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다만 주인 내외에게 조금 더 괜찮은 차와 디저트를 선보이기 위해 식재료를 사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었고, 외출이라도 해서 머리를 식혀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뿐이었다.

* * *

확실히 바깥 공기를 쐬는 것이 도움이 되기는 한 걸까.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충격도 많이 완화된 것 같았다.

알렉스는 정원이 사들인 식재료를 바리바리 싸들고 정원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몇 차례 만류해도 듣지 않으니 괜히 실랑이를 벌이는 것보다 그냥 짐을 들게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원래 말이 많은 것인지 쉬지 않고 정원에게 말을 붙여 왔지만, 정원의 대답은 기껏해야 네 번에 한 번 정도 나올까 말까 했다.

그 사실에 아주 약간의 미안함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다. 무거워 보이는 식재료 장바구니가 눈에 밟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알렉스의 부탁 한 가지 정도는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확실히 바깥 공기를 쐬는 것이 도움이 되기는 한 걸까.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충격도 많이 완화된 것 같았다.

알렉스는 정원이 사들인 식재료를 바리바리 싸들고 정원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몇 차례 만류해도 듣지 않으니 괜히 실랑이를 벌이는 것보다 그냥 짐을 들게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원래 말이 많은 것인지 쉬지 않고 정원에게 말을 붙여 왔지만, 정원의 대답은 기껏해야 네 번에 한 번 정도 나올까 말까 했다.

그 사실에 아주 약간의 미안함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다. 무거워 보이는 식재료 장바구니가 눈에 밟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알렉스의 부탁 한 가지 정도는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어! 저 카페, 이번에도 왔네요."

알렉스의 말에 고개를 돌려 보니 야외에 차려 놓은 일일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카페라고 부르기에는 포장마차 같은 모습이었지만, 카페라고 적어 두었으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저번에 왔을 때 마셔 봤는데, 저기 커피가 정말 예술이었어요. 아! 물론 정이 끓여 준 차보다는 아니겠지만......"

"굳이 띄워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진심인데...... 하며 말을 흐린 알렉스는 곧 그래도 한번 마셔 보지 않겠느냐며 권유해 왔다. 방금 전 그의 부탁 한 가지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 참이었으니 거절하기도 뭣했다. 정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커피가 나왔을 때, 정원은 일어나려는 알렉스를 두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말리기도 전에 값을 지불하는 정원을 보고 알렉스는 약간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제가 살 생각이었어요."

"안내도 도와주셨고, 짐도 들어주고 계신데…. 이 정도는 사 드려야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정원은 ‘부탁드린 적은 없지만.’ 하고 작게 덧붙였다. 농담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알렉스는 머쓱한 기색도 없이 잘만 웃었다.

정원은 더 말하지 않고 컵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알렉스가 그렇게 칭찬한 커피는 정원의 입에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묵묵히 목을 축이던 정원이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오늘 그 신문에 나온 내용 말인데요."

"신문이요? 아, 그 테프트 얘기?"

"......네."

정원의 말은 계속해서 잠깐의 사이를 두고 흘러나왔다. 다행히 알렉스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어서, 정원이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난리도 아니었죠. 그거 때문에 한동안 세상이 떠들썩했던 것 같더라고요."

"뭔가... 일이 많았던 모양이네요."

"처음 들어 봤어요?"

신기해하는 듯한 반응에 고개를 끄덕이자, 알렉스는 이번에도 알아서 납득한 채 말을 이었다.

"음, 정이 이 마을에 오고 나서... 정말 얼마 안 지나서 화제가 됐던 것 같은데요. 하긴, 그런 것도 이런 시골 동네랑은 거리가 먼 얘기니까요. 신문을 잘 안 보셨으면 모르실 만도 하겠네요."

"설마 테프트 사장이 그런 사람이었을 줄이야."

가볍게 중얼거린 말에 저절로 예민하게 반응하게 됐다.

"그 사람이 뭐라도 했나요?"

"음, 사실 거의 다 찌라시라 정확하지는 않지만요. 누구는 인체 실험이라고 하고, 누구는 에스퍼 능력으로 만든 폭탄을 전세계에 투하하려고 했다고 하고....... 어쨌거나 무시무시한 짓을 하기는 한 모양이에요.“

그 말의 내용이 조금 허무맹랑하게 와전되어 있어서일까. 어쩐지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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