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03화 (103/126)

103.

"난리도 아니었어요. 노른 에스퍼 기관에서는 테프트 상대로 소송도 걸었다고 하던데요?"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정원이 한 반응이라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알렉스는 들뜬 듯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테프트 쪽에서도 사장...... 전 사장이라고 해야겠죠? 전 사장을 굉장히 강경하게 부정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꼬리를 자르려고 시도하긴 했는데요. 사실 아무리 자리를 비운 기간이 길어도 테프트는 그 사장 때문에 유지되는 기업이었잖아요? 이렇게 된 이상 추락하는 비행기 같은 입장이 된 거죠."

"그러게요. 사장이 빠지면 빈자리가 컸겠네요."

"네. 안 그래도 회사는 거의 망한 거나 다름없었고.... 이렇게 전 사장이 죽기까지 했으니까, 이제 완전히 문 닫는 일만 남았겠죠."

아무래도 알렉스는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어느 정도 상황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아예 몰랐으면 전해 들을 일도 없었을 테니 마음이 편했을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말을 쉬며 커피를 마신 알렉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정원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물어 왔다.

"그러고 보니까 정은...... 그 사람이랑 같은 나라 출신인 거죠?"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정원은 이곳에서 굳이 자신의 이름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이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굳이 출신 국가나 신분을 숨길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발음하기가 어렵다며 성인 '정'만을 부르고 있기는 했지만, 정원의 이름이나 출신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원이 고개를 끄덕이기 전 일단 손사래를 치더니, 미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설마 국적이 같다고 매도한다거나, 그럴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국적으로 따지면 이번 일을 해결한 것도 같은 나라 사람이었다고 하고요."

그런 생각은 딱히 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설령 알렉스가 그런 이유로 자신을 불편해한다고 해도 딱히 마음이 아프거나 억울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음, 한국 출신이면 혹시 뭔가 아는 게 있을까 궁금하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애초에 우리 같은 일반인이랑은 거리가 먼 얘기니까, 이런 걸 물어보는 것도 의미 없겠죠?"

우리 같은 일반인이라. 정원은 자신이 가이드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고, 일반인이 가이드를 알아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묶여 일반인이라는 말을 들으려니 이 와중에도 왠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원은 말없이 가볍게 웃기만 했다. 그 미소를 본 알렉스가 잠시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웃은 일이 딱히 없었던가.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다. 정원은 덤덤하게 물었다.

"이런 얘기에 평소에도 관심이 많았나요."

"아, 이런 얘기라고 하면...... 아무래도 에스퍼 얘길 말하는 거죠?"

정원의 웃는 얼굴을 잠시 멍하니 보던 알렉스가 곧 정신을 차린 것처럼 대답했다.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걸 보니 에스퍼에 관심이 많다는 게 민망한 모양이었다.

"하하, 좀 부끄럽지만...... 맞아요. 예전 사람들이 히어로 영화를 좋아했던 거랑 비슷한 심리죠. 우스울까요?"

"우스울 게 있나요. 에스퍼들 중에 연예인처럼 활동하는 사람이 많은 건 그만큼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인데요. 알렉스만의 얘기는 아니죠."

정원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를 위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그냥 정원의 평소 생각이 그랬다. 그는 그 말이 위안이 되었는지 정원을 보며 웃어 보이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정은요? 관심이 전혀 없어 보이기도 하고, 또 먼저 이런 얘길 물어보신 걸 보면 의외로 흥미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어느 쪽인지 궁금하네요."

"전 그런 데에는......."

관심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문득 알렉스의 말에서 걸리는 부분을 찾아냈다. 방금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 지나갔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마음에 걸린 것이었다.

"...글쎄요.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기는 하네요."

"뭔가요?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 드릴게요."

알렉스가 필요 이상으로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테이블에 양 팔을 올리며 자신 쪽으로 기울어 오는 알렉스의 상체를 보고 정원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는 그래도 개의치 않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 이 일을 해결한 사람이라는 건......."

분명 '같은 나라 사람'이 이 사건을 해결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장을 꺾은 것은 강석주였다. 그렇다면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일까. 같은 기관 소속이었던 정원마저 작전 동료로 만나기 전까지는 석주의 존재를 몰랐다. 그 본인이 숨기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이번 일을 통해 알려진 거라면.......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 질문에 알렉스는 반색하며 대답을 꺼내 놓았다.

"아, 그거 말이죠! 그 사장을 일대일로 이긴 에스퍼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사장은 거의 반신불수가 됐다나?"

사장의 상태를 생각하면 반신불수 수준이라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반응할 수는 없으니 정원은 최선을 다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렉스는 정원의 반응에 신이 난 듯 말을 이었다.

"테프트 사장이라고 하면 에스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고 유명했잖아요? 남들은 부풀려졌을 거라고 하지만, 그랬으면 어떻게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테프트 같은 거대 기업이 사장을 갈아치우지 않고 기다렸겠어요. 그런 사람을 일대일로 이길 수 있는 에스퍼라니......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더라고요."

"그러게요."

신난 듯 조잘대는 알렉스와 달리 정원의 대답은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알렉스는 꿋꿋했다.

"그런데 전혀 알려진 게 없어요. 한국 국가 기관에서 완전히 싸고 도는 모양이에요. 보통 그만큼 강한 에스퍼라면 외부에 어느 정도 노출이 되는 게 당연했는데 말이죠."

"......"

"아무튼 그 사람 덕분에 그 기관 쪽도 겨우 연명한 것 같더라구요. 거기 대장격인 사람이 테프트 사장이랑 얽혀 있다고 난리가 나서, 거기도 또 국제적으로 난리가 날 뻔했다는데... 그 에스퍼 덕분에 대장 하나 잘라내는 걸로 해결이 됐으니까. 영웅이 따로 없겠어요."

정원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원이 모를 리 없었다. 정원이 생각한 것에 비해 훨씬 많은 부분이 세상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테프트의 사장이 끔찍한 흉계를 꾸몄다는 것과, 석주가 그것을 막았다는 것.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석주의 정체가 완전히 공개되지는 않은 듯했다.

어쩌면 석주도 이제 굳이 자신을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또 뭔가... 궁금한 건 없으세요?"

알렉스가 기대에 찬 듯 해맑게 웃으며 물어 왔다. 정원이 뭔가 물어봐 주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질문에 대답해 준 게 고마워서라도 그의 기대에 부응해 주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떠오르는 질문이 전혀 없었다. 정원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침묵하자 알렉스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그럼 제가 질문해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대답해 드릴게요."

차라리 이러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정원은 알렉스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따라하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 에스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신나 있던 때와 달리, 알렉스는 그 말에 수줍게 주춤거렸다.

"그, 뭐, 특별히 정해진 질문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정원 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요."

"제가 궁금하다는 건... 여기 왜 왔는지나, 그런 게 알고 싶은 건가요?"

그런 질문이라면 이곳에 온 뒤 숱하게 들어 본 것이었다. 대답하는 것이 번거로워 여태 누군가에게 제대로 말을 해 준 적은 없었지만, 대충 꾸며낸 이유를 대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음, 물론 그런 것도 궁금하긴 하지만... 그것보단 그냥 정원 씨 자체가 궁금하다고 해야 하나요? 뭘 좋아하는지나, 취미는 뭐였는지라거나...... 좋아하는 스포츠라거나?"

정원은 잠시 행동을 멈춘 채 입을 열지 못했다.

알렉스의 사소한 질문들이 의외였던 탓도 물론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그 말에서 누군가를 떠올린 탓이 더 컸다.

굳이 물을 필요가 없는 시시콜콜한 질문들을 늘어놓았던 사람.

"......그런 거라면 그냥 가면서 대답해도 될까요?"

이 자리에 얼굴을 마주 보며 앉아 문답을 계속하다 보면 그때의 장면이 더 선명해질 것 같았다. 그때 석주가 던진 질문들이라거나.... 그날의 분위기 같은 것들이.

정원은 알렉스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의자를 뒤로 끌었다. 알렉스는 허둥대며 정원을 따라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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