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04화 (104/126)

104.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정원은 알렉스가 했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나름대로 고민에 빠져 있었고, 그도 대답을 기다리는 듯 별다른 말 없이 걷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가끔 정원의 눈치를 살피는 것인지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듯한 얼굴로 정원을 살펴보기는 했지만, 특별히 더 조잘거리지는 않았다.

조금 마음이 편해졌을 때쯤, 정원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 좋아한다고 말할 만한 게 많지는 않네요."

"역시, 여태 고민하고 있었던 거군요? 전 또 뭔가 기분이 나빠서 입을 다문 건가 좀 걱정하고 있었어요."

알렉스가 너스레를 떨며 대답해 왔다. 조금 가라앉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건 알렉스가 아닌 정원 자신의 문제였기에 그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정원은 가볍게 '그럴 리가요.' 대답한 뒤 말을 이었다.

"취미라고 할 것도 딱히 없고요."

"그래요?"

잠시 고민하던 알렉스가 곧 신중하게 말했다.

"음, 이 마을은 할 게 없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점이 있다면 마음이 한가해진다는 거예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기에는 이만한 데가 없을 거예요. 정은 여기 쉬러 왔다고 했죠? 좋은 선택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어요."

생각보다 뜻 깊은 위로라 조금 의외라고 느꼈다. 그리고 꽤나 맞는 말처럼 들렸다. 정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요새 디저트를 만든다거나, 차를 끓인다거나 하는 건 의외로... 괜찮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면 재미있고 좋아한다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잘됐네요. 저도 정이 만든 요리나 디저트를 정말 좋아해요!"

알렉스가 활짝 웃으며 칭찬해 왔다. 고마운 일이지만 정원은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한 뒤 고개를 돌렸다. 계속 느꼈던 사실이지만, 정원은 알렉스처럼 티 없이 밝아 보이는 사람이 조금 거북했다. 그가 생각보다 속 깊은 말을 할 줄 안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 역시 수확이라기보다는 거북함에 더 가까웠다.

정원은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작게 중얼거렸다.

"재미없는 사람이라 미안하지만 딱히 더 할 얘기가 생각이 안 나서요."

"음...... 그럼 뭘 물어보는 게 좋을까요."

알렉스는 여전히 물어볼 게 남은 모양이었다. 적극적으로 거절 의사를 표시하면 그의 말을 끊을 수 있겠지만 그럴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다. 살짝 눈치를 살피던 알렉스가 장난스럽게 물어 왔다.

"첫사랑 얘기 같은 거?"

"알렉스는 선생님들한테 사랑받는 제자는 아니었을 것 같네요."

정원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자신의 학생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알렉스는 당황한 것 같았다. 그가 눈을 깜빡이며 성실하게 대답했다.

"네? 갑작스럽지만... 맞는 말이기는 해요. 학창시절에 말썽을 좀 많이 부렸거든요. 티가 났나요?"

말썽을 많이 부렸다는 건 의외는 아니었으나, 그런 뜻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정원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수업 시간에도 틈만 나면 교사들한테 첫사랑 얘기를 물어보는 학생이었을 것 같아서."

"아무한테나 다 물어보고 다니는 건 아니에요!"

그가 살짝 목소리를 높여 부인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알렉스는 당황한 것처럼 눈을 돌리며 굳이 보태 설명했다.

"그러니까, 마주치는 사람마다 다 붙잡고 첫사랑이 누구냐고 질문하지는 않는다는... 뭐 그런 뜻이었는데......."

"그쪽은요?"

"네?"

정원은 덤덤하게 설명했다.

"알렉스는 첫사랑이 누구였냐고요."

사실 정말로 그의 첫사랑이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정원은 원래부터 남의 애정사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으므로, 그저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없다고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정원은 누가 애인이나 첫사랑에 관해 물어보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그런 사람은 없다고 대답하는 타입이었다. 이때까지는 그 대답이 사실이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첫사랑 따위 없다고 대답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없다는 말이 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꼴이 되어 버릴 것 같아서.

물론 의미 없는 고집이기는 했다. 알렉스는 정원이 나름대로 흥미를 느껴 주었다고 생각했는지, 나름 즐거워하는 듯한 얼굴로 대답을 고민하고 있었다.

부끄럽다는 듯 뺨을 긁적거리는 걸 보면 누가 봐도 첫사랑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 사실 제 첫사랑 얘기는 좀 부끄러운 기억인데......."

"왜요. 말썽 많이 부리던 학생일 때 전교생 앞에서 고백하고 차이기라도 했나요?"

너무 민망해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짓궂은 마음이 들어서, 아주 미미하게 웃으며 장난을 쳤다.

"묘하게 구체적으로 놀리시는 것 같은데...... 그런 정도는 아니고요."

알렉스는 난감한 얼굴로 하하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정정했다.

"음, 아니, 뭐, 그것보다 오히려 더 심할지도 모르겠네요."

"어땠길래?"

"에스퍼 얘기에 관심이 많냐고 물어보셨죠?"

정원은 눈치껏 받아쳤다.

"첫사랑이 에스퍼였나요?"

"비슷한데...... 아니고요. 가이드였어요."

알렉스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크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가요? 특이하네요."

정원이 특이하다고 한 것은 '가이드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부분이었다. 출동 현장에서 가이드가 하는 일은 에스퍼의 보조였다. 당장 위기에 처한 사람을 영웅처럼 구해 줄 수 있는 것도 주로 에스퍼의 능력이었고, 화려한 역할은 주로 에스퍼의 차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특이하다는 것이 가이드를 좋아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다시 민망한 듯 허둥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가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물론 저도 알고 있어요. 사는 세상이 다르다는 거. 첫사랑 삼았던 거야 어릴 때니까 가능했던 거고....... 하하, 부끄럽네요."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가이드가 목숨을 구해 줬습니다, 보다는 에스퍼가 도와줬습니다, 쪽이 많으니까 한 소리죠."

"아......."

"부끄러울 이유는 그게 전부인가요?"

애매한 표정의 알렉스에게 묻자,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네? 음... 열심히 따라다니느라 부끄러운 짓을 많이 하긴 했죠. 그래도 역시 가이드가 첫사랑이라는 게 제일 부끄럽긴 하네요."

"그게 부끄러울 이유가 되나요? 에스퍼도 아니고 가이드들이면 오히려 연애 상대로 일반인을 선호하는 경우도 많던데요. 아무래도 매일 상대하는 인간들이 인격파탄자니까. 자기 일과 관련도 없고, 상식적인 비능력자를 좋아하게 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죠."

그를 위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사실 적시였다. 알렉스는 오묘한 눈빛으로 정원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정도 가이드랑 연애해 본 적이 있으세요?"

"네?"

"묘하게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길래......."

아차. 아는 이야기가 나와 무심코 너무 구체적으로 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필사적으로 정체를 숨기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같은 비능력자라고 굳게 믿는 사람에게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역시 껄끄러웠다. 분위기가 나빠질 가능성이 컸으니까. 정원은 대충 얼버무렸다.

"알던 사람 중에 가이드가 있었거든요. 그 친구가 에스퍼라면 학을 뗐던 기억이 있어서."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원이 있던 기관에는 실제로 에스퍼와 연애하느니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주장하는 가이드가 많았으므로.

"어쨌든 그렇게 부끄러울 일도 아니라는 소리예요."

"고마워요. 정은 보기보다 상냥한 사람이네요."

대체 어디가?

정원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별말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발을 옮겼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에 되도록 말을 얹지 말아야 할 듯했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던 정원의 눈에 작은 노점상 하나가 들어왔다. 디저트류를 파는 점포 같았다. 원래라면 눈길을 주지 않았겠지만, 단순해 보이는 알렉스가 디저트를 먹이면 잠잠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정원은 점포를 가리키며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먹고 가지 않을래요?"

"좋죠!"

흔쾌히 대답한 알렉스가 앞장 서 걸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뒤를 따라가자, 디저트를 팔고 있는 남녀 중 여자 쪽이 밝은 목소리로 정원과 알렉스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뭘로 드릴까요?"

"음, 크레페를......."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리던 정원은 문득 방금 들은 목소리가 지나치게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

설마, 설마 하는 심정으로 정원이 고개를 들자....... 앞치마를 두르고 모자를 쓴 준희가 양손을 흔들며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그런 의문이 드는 것도 잠시였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정원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물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