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생각했다. 준희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현실감은 없었지만, 강석주는 정말로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시장에서 작은 노점을 내고 디저트를 팔고 있는 모습이라니. 상상 이상으로 그를 그리워한 나머지 환상을 보고 있는 거라고 하면 차라리 덜 이상했을 것이다.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로 서 있는 정원을 강석주는 담담한 눈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였다.
"크레페?"
메뉴를 묻는 질문이 어이없게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그 눈에서 어떤 감정 같은 것이 흘러 넘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원의 기억 속, 그리고 상상 속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얼굴이었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정원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옆에 알렉스가 있다는 것도, 디저트를 먹으려 했다는 것도 잊은 채 일단 뒤돌아 발을 옮겼다. 거의 뛰듯이 바쁜 걸음이었다. 몇 걸음을 떼고 나서야 정말로 도망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은 그때부터 숨이 찰 때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려 왔다. 순간 다급하게 자신을 따라 달려오는 것이 알렉스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들리는 목소리는 알렉스의 것이 아니었다.
"기다리세요, 정원 씨!"
이곳에서 들었던 이국의 언어가 아니라, 익숙한 한국어. 익숙한 호칭. 그러나 헷갈리지도 않을 만큼 명확하게, 강석주가 아닌 준희의 목소리였다. 한참을 더 달리던 정원은 더 이상 강석주의 시선이 닿지 않을 곳까지 왔다는 확신이 선 뒤에야 발을 멈추고 뒤를 홱 돌아보았다.
"뭡니까?"
날카로운 물음이었다. 정원을 따라 멈춘 준희가 무릎을 짚은 채 가쁘게 숨을 골랐다. 제법 필사적으로 달린 정원을 지치지 않고 따라온 게 대단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버거웠던 것인지 숨을 가라앉히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정원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침음을 냈다.
강석주를 보았다는 사실 때문에 넋이 나가 생각이 멈춰 있었지만, 달리며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나니 대강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강석주는 여전히 자신에 대한 기억이 없다. 자신을 찾아 이곳에 왔을 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온 것이 준희라는 것을 생각하면, 준희가 일부러 그를 이곳까지 데려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꾹 억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정원이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화를 억누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건가요."
누구에게도 자신의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것부터가 계획된 결과가 아니었다. 아무 차나 잡아타고 발걸음이 닿는 곳에 멈췄더니 이 마을이었으니까. 도착한 뒤로도 바깥과 연락을 완전히 끊었으니,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일했던 걸까.
"다 아는 방법이 있죠. 눈이랑 귀는 여기저기 있으니까요."
정원을 찾아냈다는 사실이 꽤 뿌듯했는지, 준희는 어깨를 펴고 꽤나 당당하게 말했다. 정원은 눈썹을 찡그리며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찔끔, 수그러든 준희가 눈을 피하며 곤란한 듯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안 반기실 건 알았는데.... 막상 그렇게 노려보시니까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막, 머릿속이 하얘지네요."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하세요. 어떻게 알아낸 건지 말하기 싫으면 왜 온 건지라도."
준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제법 길게 미적거린 뒤에야 대답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여기 진짜 촌구석이던데요. 어떻게 된 동네가 인터넷도 잘 안 터져요. 그동안 무슨 일 있었는지는 들으셨어요?"
정원이야 인터넷을 쓸 일이 없었으니 그런 고충 같은 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래도 준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네. 그 사람 죽었다면서요."
준희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알고 계시네요? 이런 데 숨어 계셔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실 줄 알았는데."
"오늘 신문을 봤습니다."
숨어 있던 정원을 미묘하게 원망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정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만을 했다. 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신문에는 어제 죽었다고 나왔겠지만... 사실 죽은 지 좀 됐어요. 그동안은 소식이 안 흘러 나가게 막고 있었던 거구요. 상황이 좀 안정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혀를 내두르는 얼굴만 봐도 그동안 꽤나 고충이 많았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정원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준희는 살짝 눈치를 살피다가 알아서 말을 이었다.
"사실 여건만 되면 진작 정원 씨 찾아오고 싶었는데, 그동안 진짜 무지막지하게 바빴어요. 아, 저 말고 석주 씨가요. 물론 저도 덩달아 같이 바쁘긴 했는데, 아무튼."
"......."
정원은 입을 다문 채로 준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민에 빠진 상태였다. 석주의 상태라거나, 그가 그동안 무슨 상황을 겪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말을 해도 되나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꺼내고 말았다.
"...알려진 모양이던데요. 이번 일 해결한 게 강석주 씨라고."
"네."
"원래 알려지는 걸 별로 안 좋아했다고... 들었는데."
두루뭉술한 질문에도 준희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너무 커져서 마냥 쉬쉬할 수가 없었거든요."
"......."
솔직한 심정으로 그가 걱정스러웠다. 그런 표정을 숨기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그거 때문에 여기저기서 하도 귀찮게 하는 바람에, 이렇게 빼내 올 수 있게 되기까지만도 한참 걸렸어요."
하지만 마음이 아픈 것과는 별개로, 준희에게 누그러진 대답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정원은 표정을 가다듬고 냉랭하게 물었다.
"그래서 여기 왜 왔냐고 물어보지 않았나요?"
"아니, 기억은 찾아야 될 거 아니에요!"
정원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침묵했다. 준희도 정원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입을 열지 않고 기다렸다. 한참 만에 정원이 물었다.
"병원에는 가 봤나요? 여태 기억을 못 하는 걸 보면 일시적인 기억상실 같지는 않은데요."
준희는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가 봤죠. 머리엔 아무 이상도 없대요. 뭔가 충격 때문에 그렇게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는 하는데...... 사실 무슨 치료를 제대로 하지는 못했고요. 정원 씨에 대한 얘기도 제대로 못 꺼내 봤어요."
"병원에서 그러라고 하던가요."
"네, 에스퍼잖아요."
에스퍼에 대한 치료는 에스퍼가 아닌 이들을 대할 때와는 결이 확연히 달랐다. 특히 지금처럼 뇌와 관련된 문제일 경우에는 더더욱. 잘못 치료했다가 에스퍼가 폭주라도 일으키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냥 에스퍼도 아니고....... 저 사람만 한 에스퍼니까, 함부로 뭘 어떻게 하질 못하나 봐요. 괜히 자극했다가 또 폭주할 수도 있대요. 근데 정원 씨가 연락 두절되는 바람에, 당장 진정시킬 수 있는 역량이 되는 가이드도 없었고."
예상대로였다. 정원은 잠시 더 침묵하다가,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그럼 그냥 그대로 두면 되겠네요."
"휴......."
바로 발끈할 줄 알았던 준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안 통하네.'라거나 '답답하네.' 같은 느낌의 한숨일 줄 알았는데, 심각한 표정을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준희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정원 씨 말이 무슨 소린지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그 왜... 기억상실은 뭔가 심리적인 충격이 있을 때? 잊고 싶은 부분을 잊는 거라고 하니까....... 그냥 덮어 놓자고 하는 말도 이해는 하는데요."
"그러면......."
"근데 석주 씨가 되게... 힘들어해요."
뭔가 말을 이으려던 정원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쿵, 하고 머릿속에 무언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힘들어한다고? 그럴 이유가 있나? 기억도 하지 못하는데? 몸에 문제가 있는 걸까?
수많은 의문을 뒤로하고 입 밖에 나온 말은 한마디였다.
"......멀쩡해 보이던데요."
준희는 즉각 반박했다.
"겉으로야 그렇죠! 남 앞에서 힘든 티 낼 사람도 아니고. 근데 그냥... 기억에 공백이 생기니까 혼란스러운가 봐요."
"......."
"그렇잖아요. 솔직히 그 사장 상대로 그렇게 복수심을 막 불태우던 사람도 아닌데, 자기가 왜 눈이 돌아서 그 사람을 처리하겠다고 나선 건지.... 그것부터 헷갈리지 않겠어요? 저한테도 자꾸 자기한테 뭐 숨기는 거 없냐고 물어보고 그런다니까요."
정원의 표정이 심각해진 것을 확인한 준희가 이때라는 듯 말을 쏟아 냈다.
"그리고 또... 자꾸 머리가 아프다고 해요. 머리 아프다는 거 말고는 말을 안 해서 통 모르겠는데, 제가 보기엔 기억만 없는 게 아니라 몸도 성치 않은 것 같거든요."
정원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준희는 초조한 얼굴로 정원을 계속 바라보았다. 긴 정적이 이어진 뒤,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정원이 입을 열었다.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