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06화 (106/126)

106.

정원이 마지못한 듯 꺼낸 말을 듣고 준희는 대놓고 반색했다. 잘 생각했다는 것처럼 박수를 짝짝 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더 심란해졌다. 잠시 기쁨을 만끽하던 준희가 이내 다시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더니, 그제야 정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꺼냈다.

"그러니까, 뭘 하셔야 하냐면......."

정원은 긴장한 얼굴로 준희를 마주 보았다. 디저트 점포까지 공수해서 이곳에 온 성의를 생각하면 분명 그에 상응하는 방법도 준비해 왔을 터였다.

준희는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말을 마무리했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장난하자는 건가요?"

정원이 황당한 목소리로 즉각 대꾸했다. 그렇다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단 석주를 이 시골 마을까지 끌고 왔다는 소리인가?

"아무 방법도 없으면서 어쩌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대책 없이, 정말......."

"그러면 어떡해요! 저 사람 상태는 날이 갈수록 뭔가 묘~ 하게 이상해지는데,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고요. 일단 정원 씨를 만나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결될 것 같아서 열심히 찾아온 거라구요."

여전히 한숨이 나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준희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정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도 그 이상 준희를 힐난하지는 않았다.

"일단 저는 기억을 찾게 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일단 정원 씨를 자주 봐야 되겠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최선을 다해 협조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솔직히 정원 씨도 저 사람이 기억 찾았으면 좋겠잖아요?"

그 말에는 부정을 하지 못했다. 그가 다시 자신을 기억해 내기를 바라는 것은 정원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일단 석주 씨한테는 제가 핑계를 대 뒀어요. 처음에는 그냥 요양을 좀 하러 가자고 했거든요? 마침 의사도 저 사람 좀 쉬어야 된다고 한 상태라서요."

"의사한테 그런 말까지 들었나요? 정말로 몸에 문제가 있는 건......."

얼굴이 조금 하얗게 질린 채로 정원이 물었다. 준희는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정원을 안심시켰다.

"그건 그동안 잠도 안 자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거예요. 가이딩도 제대로 안 받은 상태로 과로했으니까 쉬긴 쉬어야죠."

그 말을 듣는다고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걱정스럽게 찌푸려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 정원을 보며 준희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랬는데 말을 안 듣더라고요? 멀쩡하니까 쉴 필요 없다면서요. 그래서 살짝 양념을 좀 쳤죠. 여기서 해결해야 될 일이 있다구요."

"해결해야 될 일이요?"

"네, 테프트 사장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고......."

그 말을 들은 정원이 인상을 팍 구겼다. 준희는 다급하게 변명했다.

"아니,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그 정도 핑계 아니면 안 올 테니까 저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혹시나 정말 그런 제보가 있었나 해서요."

"뭐, 그런 제보는 하루에도 열몇 건씩 들어오긴 해요. 다 그냥 관심받고 싶은 사람들이 거짓말로 제보하는 거지만요."

거짓 제보가 판을 칠 정도면 사장의 사망이 그만큼 이슈가 되기는 한 모양이었다. 정원은 편치 않은 표정으로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눈치를 보던 준희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석주 씨는 여기도 그냥 가짜 제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따라와 주기는 했으니까요. 남은 건 여기서 푹 쉬게 하면서~ 정원 씨 얼굴도 매일매일 보게 하고~ 그러면서 기억을 살려내는 것밖에 없어요."

말이야 쉬운 이야기였다. 정원은 애초에 자신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석주의 앞에 매일같이 얼쩡거리며 친한 척을 할 만큼 뻔뻔하고 사교적인 성정이 되지도 못했다. 알렉스라면 모를까.......

"......아."

그러고 보니, 알렉스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크레페를 사려다 말고 그를 내버려 둔 채 갑자기 여기까지 도망쳤으니... 얼마나 황당할까? 게다가 초면인 줄 알았던 가게 직원과 추격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 자리에 단둘이 남겨졌을 강석주와 알렉스를 생각하니 식은땀까지 나는 것 같았다.

"빨리 돌아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자주 보는 거고 뭐고...... 일단 의심부터 샀을 것 같은데. 저도 일행을 두고 왔고요."

"맞다!"

준희가 박수를 짝 치더니 짐짓 표정을 굳혔다. 이번에도 심각한 얼굴로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나 싶어 정원은 심드렁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어요. 같이 있던 그 사람 누구예요?"

"알렉스라고 해요."

"이름을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이 마을 사람입니다. 오늘 장이 선다는 것도 그 사람이 알려줬어요."

그가 아니었으면 정원은 오늘 밖에 나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랬다면 준희와 석주는 애먼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종일 크레페를 팔다가 허탕을 쳐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준희는 오히려 그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입장이 아닌가 싶었다.

"그 사람 좀 이상했어요."

"이상하긴 그쪽이 더 이상해 보였을 텐데요. 나도 마찬가지고."

"그런 문제가 아니고요! 저랑 석주 씨 보더니 표정이 뭔가 이상해졌다니까요."

생사람을 잡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들어서 손해일 것은 없었다. 정원은 더 말해 보라는 듯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정원 씨가 저희 보고 놀란 건 알겠어요. 근데 그 사람도 덩달아 놀라더라니까요?"

"제가 너무 놀라서 같이 놀랐나 보죠."

"느낌이 뭔가 이상했는데."

준희는 못내 수상하다는 듯, 혼잣말처럼 몇 마디를 더 꿍얼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팍 들어 올리며 날카롭게 물어 왔다.

"근데 그 사람 정원 씨 좋아한대요? 장이 서면 서는 거지 왜 따라 나왔대."

"글쎄요."

정원은 굳이 나서서 절대 그럴 리가 없다거나, 그는 그저 친절한 사람일 뿐이라거나 하는 말로 알렉스를 변호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알렉스가 어떤 사람이고, 왜 호의를 베풀었는지는 정원의 관심사 밖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해요!"

"처음 보는 사람 잡지 말고, 앞으로 어떡할 건지나 좀 더 자세하게 생각해 봐요."

정원이 점잖게 대답하자, 준희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일단 이 마을 여관에서 당분간 지내기로 했어요. 마을에서 제일 좋은 데 묵으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게 마을에 여관이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맞는 말이었다. 정원 역시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 여관에서 며칠을 묵었다. 그리고 지금 지내는 집 주인들의 호의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이었다. 방세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폐를 끼치는 것도 싫어하는 정원이었다. 웬만한 상황이었다면 자신들의 집에 오라는 제안을 거절했을 테지만.......

"......거기, 지내기 편하지는 않을 텐데."

이 마을의 여관은 상당히 열악한 환경이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정원이 떨떠름한 얼굴로 조그맣게 던진 말을 준희는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어차피 겪게 될 일, 미리 겁을 줄 필요는 없을 터였다. 정원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준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스마트폰도 아닌 구식 핸드폰이었다.

"뭔가요?"

"이걸로 연락하세요! 제 번호만 저장해 뒀어요."

정원의 원래 핸드폰은 배터리도 없이 가방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상태였다. 연락하라고 해 봤자 원래 핸드폰을 꺼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미리 짐작한 모양이었다.

"지령은 메시지로 보낼게요. 어기시면 지내시는 집 앞에 찾아가서 난동 부릴 거니까 꼭 들으셔야 해요!"

준희라면 정말로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정원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기다리셨나요? 미안해요. 너무 늦게 왔죠."

함께 돌아가면 더욱 의심스러울 것 같아서, 준희를 그 자리에 내버려 둔 채 정원 먼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알렉스는 점포 앞에 그대로 서 있지는 않았고, 정원이 돌아가던 길목에 나와 서성이고 있었다.

덕분에 석주의 디저트 가게 앞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으니 정원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아마 알렉스도 혼자 그 앞에 멀뚱히 서 있기는 민망했던 모양이다.

"아, 아니에요! 그건 괜찮았어요. 그보다......."

알렉스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정원의 모습을 살폈다. 살벌한 추격전을 벌였으니, 정원의 안위가 걱정된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그, 아까 그분이랑은......."

준희와 어떤 사이인지를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정원은 짧은 순간 뭐라고 둘러댈지 고민했다. '친척입니다.' 이건 보자마자 도망친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예전 여자 친구예요.' 이건 그 추격전의 이유에 대해 너무 많은 상상을 하게 만들 것 같았고, 무엇보다 거짓말로도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결론을 내린 정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빚쟁이입니다."

"......네?"

"말 그대로예요."

알렉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곧 흙색으로 변했다.

"그러면 정, 여기 온 게 혹시......!"

"네, 사실 빚을 좀 졌거든요."

순진한 알렉스를 속여 먹고 있는 기분이 약간 껄끄럽기는 했지만, 달리 더 나은 해명이 생각나지 않았다. 알렉스는 착하게도 무슨 말로 정원을 위로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정원의 머릿속에는 준희가 했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는데.......'

그냥 넘겨도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마음에 밟혔다. 정원은 떠보듯 알렉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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