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혹시 아까 그 사람들... 어디서 본 적 있나요?"
알렉스가 석주나 준희를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가 석주와 준희를 마주쳤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가 확실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정원 스스로가 충격에 빠져 있느라 미처 알렉스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준희의 말을 듣고 나니 뭔가 이상했던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알렉스도 정원의 옆에서 놀란 듯 굳어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 머릿속을 스친 것이었다.
"네? 아까 그분들이요?"
알렉스는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만 봐서는 대답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정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방금 절 따라오셨던 분이, 알렉스를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다고 해서요."
"그, 그런가요? 빚쟁이...... 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좀 무섭네요......."
무섭다는 말에 걸맞게 사색이 된 알렉스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이 모습만 보면 알렉스는 전혀 수상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원은 확인차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모른다는 건가요?"
"그럼요. 제가 무슨 수로 그런 분들을 알고 있겠어요. 그분도 비슷한 사람이랑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
알렉스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정말로 순박한 시골 청년처럼 보여서 캐물은 것이 미안해질 정도의 표정이었다. 정원이 오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알렉스는 해명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전 빚 같은 건 없어요! 빚쟁이한테 쫓기고 있지도 않고......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모은 돈이 많지는 않지만......."
정원은 더 듣지 않고 알렉스의 말을 끊었다. 가만히 두었다가는 자신이 모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정원에게 빚을 갚으라며 빌려줄 것 같은 태도였기 때문이다. 빚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지만, 설령 정말이라고 해도 알렉스에게 돈을 빌릴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 사람이 그러는데, 알렉스가 자기들을 보고 놀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고....... 그래서 수상했다고 하더라고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네요."
"아, 그건."
알렉스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어우, 그 남자분 인물이 아주 훤칠하시더라구요.... 무심코 쳐다봤어요. 좀 부끄럽지만 주눅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잠깐 넋을 잃고 봐 버렸네요. 그분도 빚쟁이? 뭐 그런 일을... 하시는 거죠?"
얼굴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게 표정에서 드러나는 것 같았다. 졸지에 강석주까지 얼굴만 잘생긴 빚쟁이로 만들어 버린 것이 조금 머쓱하고 미안해졌지만, 정원은 내색 없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셈이죠."
"아무튼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럼 이제 정말로 돌아갈까요? 크레이프를 못 사 준 건 안타깝지만."
"아, 그건 괜찮아요! 다음에 먹으면 되죠. 사채업자한테 크레이프를 사기는 좀 그렇잖아요."
알렉스가 또다시 돈을 빌려 주겠다며 나서는 것을 막기 위해 말을 끊고 화제를 돌린 것이었다. 효과는 생각했던 것만큼 좋았다. 그러나 그 길로 돌아가면서도 정원의 안에서 찝찝한 기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 * *
"안녕하세요."
정원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단조로운 인사를 건넸다. 분명 바로 앞까지 다가온 정원의 기척을 느꼈을 것이면서 신문만을 들여다보던 석주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대답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네, 안녕하세요."
그러나 휘어진 입꼬리와 달리 눈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석주의 노란 눈동자를 보면서 이렇게 서먹하고 섬뜩한 기분을 느낀 것도 오랜만인 듯했다. 그러나 낯선 반응 정도는 이미 예측한 상태였다. 이 정도로 기가 죽어 물러날 리는 없었다.
준희는 아침 일찍부터 십수 통의 메시지를 보내 왔다. 내용은 석주가 묵고 있는 여관에서 아침 식사를 할 테니 찾아가서 얼굴을 익혀 두라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많은 메시지를 보낸 건 정원이 자고 있거나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인 듯했다.
물론 정원은 준희의 메시지가 봤을 때 이미 일어나 주인집 부부의 식사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먹었을 테지만, 오늘은 석주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인사를 마친 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석주는 포크를 집어 들며 정원에게서 시선을 돌렸고, 가벼운 투로 질문을 던져 왔다.
"어제 본 분 같은데?"
정원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아침을 먹으러 온 것뿐이니까요. 여기 밥을 좋아해서."
"며칠 굶었을 때만 여기서 식사를 하시나 봐요."
준비해 온 대답이기 때문에 거짓말은 어렵지 않았지만, 석주가 가볍게 웃으며 던진 말에는 살짝 움찔하게 됐다.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만큼 맛이 없던데."
씩 웃는 얼굴만으로는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굳이 맛없는 밥을 먹으러 찾아왔다고 말하는 자신을 비웃고 있을까. 그러나 정원은 내색하지 않고 꿋꿋하게 물었다.
"앞에 앉아도 괜찮을까요."
"자리가 여기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다른 자리는 옆자리 사람이 마음에 안 드네요."
뻔뻔하게 대답하자 잠시 말이 없던 석주가 곧 고개를 까딱했다. 무언의 허락인 듯싶었다. 냉큼 그의 앞자리 의자를 빼고 자리를 잡은 정원은 석주가 먹고 있는 것과 같은 모닝 세트를 주문한 뒤 입을 다물었다. 석주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지만 도통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준희가 여기 와 보라고 했어요?"
그다지 먹음직스럽지 않게 생긴 스크램블드에그를 포크로 뒤적이며 석주가 물었다. 정원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어제 준희와 아는 사이인 듯한 모습을 보였으니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쯤은 예상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여기 밥을 좋아해서 왔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준희랑은 어떻게 알아요?"
그러나 정원의 변명은 석주의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무시당했다. 하긴 저런 말을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준희에게 빚을 져서 도망치고 있다는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말한다 해도 믿을 리는 없으니 정원은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어깨를 으쓱한 뒤 모닝 세트가 나올 주방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석주는 포크를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정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준희가 뭘 시킨 거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뻔뻔하게 대답을 피하려 해도 석주는 생각보다 집요했다.
"계속 그렇게 피하려고 하면 곤란하죠. 내 일인데 나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생각을 들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에게 마음을 읽는 능력까지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원은 석주에게서 애매하게 시선을 비껴 나가게 한 뒤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의뢰를 받은 거예요? 굳이 이런 듣도 보도 못한 동네에 오겠다고 한 게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처음부터 그쪽 때문에 온 건가?"
준희는 이 마을에 오는 것에 대해 석주에게 나름대로 핑계를 대 두었다고 했지만, 역시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이미 들킨 상태였던 모양이었다.
"그런 것치고 어제 그쪽이 너무 귀신 본 것처럼 도망을 치셔서... 궁금해지네요."
"......."
"가이드죠?"
"......."
가이드는 원래 숨기려고만 하면 겉으로 티가 잘 나지 않는 편이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석주에게 그 정도 감이 없는 게 더 이상했다.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가이드라는 걸 알아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터였다.
"계속 대답 안 할 거예요? 뭐, 말 안 해도 뻔하긴 해요. 날 가이딩하라는 의뢰 같은 거겠죠."
"......."
"그쪽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필요 없어요. 거절하기 힘든 상황이면 내가 준희한테 직접-."
"확실히 견딜 만하신 모양이네요."
웬만하면 그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 했지만, 더 말하게 둘수록 손해일 것 같았다. 정원이 말을 끊자 석주는 묘한 표정으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가이딩이 꼭 필요할 만큼 비실거리지도 않는 것 같고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자 석주의 얼굴은 더욱 오묘해졌다. 어떤 부분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정원이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그런 의뢰를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런 뒤 정원은 잠시 고민했다. 뭘 어떻게 해야 이 대화를 끊기지 않게 할 수 있을지, 그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없는 정원으로서는 답을 내리기 힘든 질문이었다.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던 정원이 결국 입을 열어 물었다.
"식사하신 뒤에는 뭘 하시나요?"
의중을 살피듯 정원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석주가 곧 선선히 대꾸했다.
"글쎄요? 딱히 할 일은 없네요."
답을 들은 정원이 비장한 얼굴로 제안했다.
"저랑 같이 잠깐 걸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