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정원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만약 그 말을 들은 것이 정원이었다면 잔뜩 경계하며 거절한 뒤 자리를 피했을 터였다. 그리고 한참 동안 상대가 무슨 생각으로 접근한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으리라. 그러나 석주는 생각보다 훨씬 더 선선한 태도로 정원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여관을 빠져나와 거리를 걸었다.
이 마을의 길은 잘 정비된 산책로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밟히는 흙의 촉감이 더 생생했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마다 보기 좋은 정취가 눈에 들어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느릿느릿 걸으며 주위를 돌아보는 석주 역시 이 풍경이 꽤나 마음에 든 눈치였다.
그러나 정작 정원은 옆에 강석주가 서 있다는 것만으로 평소와는 전혀 다른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입을 다문 채 한참을 걷기만 했더니 결국 강석주가 먼저 입을 열어 질문을 던져 왔다.
"먼저 걷자고 하길래 할 말은 다 준비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
"마음에 없어 보이니까 그렇게 기계적으로 사과하지 말고요."
"......."
석주의 담백한 말에,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던 정원이 결국 석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빙긋 웃고 있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어떤 대답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어 눈싸움을 하듯 마주 보다가, 뻔뻔하게 들릴 만큼 단조로운 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해 주세요. 생각하는 데 방해됩니다."
그러자 뭐가 좋다는 건지 석주가 웃었다. 반쯤은 진심이 섞인 말이었지만 대책 없이 불러낸 데 대한 미안함도 있기는 있었으므로, 꺼낼 생각은 없던 이야기였다. 오히려 좋아하는 듯한 석주의 반응이 이상했다.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석주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는 잔잔하게 질문을 던져 왔다.
"혹시 의뢰받은 게 가이드가 아니라 이런 쪽인 거예요?"
"이런 쪽이라는 게 어떤 쪽인가요."
석주가 생각하는 것과는 상황이 전혀 다를 터였다. 그러나 실제로 준희에게 지시를 받은 것은 사실이기에, 그 물음에 괜히 마음이 뜨끔했다. 석주는 어쩐지 장난기를 섞어 정원의 되물음에 대꾸했다.
"사실 지금 이게 뭔지 나도 잘 감이 안 와서... 준희 의도를 모르겠네요. 친구도 없고 적적한 노인 말동무해 주는 아르바이트를 고용한 건지, 아니면 선이라도 봐서 좀 얌전해지라는 건지."
어이없게 들리는 비유였다. 어처구니없다는 심정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작게 헛웃음을 터뜨린 정원이 다시 한번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쪽이 생각하기에는 뭐가 더 맞는 것 같나요."
석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전자였으면 실패인 것 같아요. 말 상대 아르바이트치고는 말이 너무 없네."
"그럼 후자인 걸로 해요."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해도, 맞선을 보러 나왔다는 비유에는 작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슬쩍 웃음이 터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석주가 물었다.
"준희한테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어요?"
그런 질문을 하는 것치곤 차분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를 힐끗 돌아보자 석주는 다시 웃었다. 그가 침착하게 부연했다.
"아니면 왜 그런 의뢰를 받으셨나 해서."
"그런 게 중요한가요?"
"그럼요. 나랑 선보는 사람이 왜 선을 보러 나왔나, 뭐 하는 사람인가, 당연히 궁금하잖아요?"
지금 상황이 그런 호구조사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 비유에는 괜히 머쓱하게 눈을 피하게 됐다. 잠시 고민하던 정원은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하는 성의 없는 대답 대신, 어느 정도 솔직하게 입을 열기로 결심했다.
"의뢰 같은 거 아니라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도 딱히 안 믿으시는 거 아닌가요."
"의뢰가 아니면요?"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넘어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석주에게 '당신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이런 짓을 하는 중이다'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정원이 고민하자 석주는 다시 웃었다. 살짝 장난기 섞인 어투로, 그가 정원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 왔다.
"그냥 순수하게 데이트 신청한 거예요? 내가 마음에 들어서?"
"......."
곧바로 그의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생긋 웃는 눈가를 잠시 넋을 잃고 보고 만 것이었다. 정원은 석주가 자신을 향한 경계심 때문에 질문을 한 거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벽을 치려 하는 것이라기에는 그의 표정이.......
'원래 이런 타입이었나.'
자연히 그런 의문을 품게 됐다. '원래의 강석주'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무슨 의도일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예측했던 것처럼 불쾌감에 자신을 떠보려고 하는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순수한 장난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강석주가 그리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고, 이 상황을 마냥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기에는 정원의 앞으로 고개를 기울인 분위기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자신이 알던 강석주와는 다른 사람 같으면서도... 비슷한 느낌.
그래서인지 지금의 그를 서먹하게 여기면서도, 꼭 처음 그와 동행하게 되었던 그때처럼 석주를 바라보게 됐다.
"제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서 데이트 신청한 게 맞다고 하면 강석주 씨 반응이 달라지나요?"
정원이 말했다. 내심 그가 뭐라고 대답할지가 궁금했는데, 석주는 그 말에는 바로 받아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바로 옆에서 이어지던 발소리도 잠시 멈췄다. 정원이 의아하게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춘 석주가 오묘한 표정으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표정을 지을 만한 말을 한 건가? 그야 '마음에 들었다면 어쩔 건데' 하는 식의 대범한 질문이면 당황스러울 법도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런 당황과는 왠지 거리가 있어 보였다.
혼란스러움에 가깝다고 표현해야 할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덩달아 혼란스럽다는 듯 미간을 좁힌 정원을 마주 보다가, 석주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방금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속내를 알 수 없는 질문. 이런 타이밍에 나올 줄은 몰랐다. 흠칫 놀란 정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석주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자신을 보며 기시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런 거라면 그의 기억을 되살리겠다는 당초의 의도에 부합했다고 봐도 될까.
자신도 모르게 조급해질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져 그게 무슨 뜻이냐거나, '날 알아보겠어요?' 같은 질문을 던졌다가는 상황이 꼬일 터였다. 침착하기 위해 표정을 관리하며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적당한 걸까.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정!"
짧은 침묵을 깬 것은 정원도, 석주도 아닌 다른 이였다.
그 호칭을 부르는 사람은 달리 없었다. 목소리도 틀림없는 알렉스의 것이었다. 정원은 불안하고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는 다급한 얼굴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미 바쁘게 달려서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정원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다시 급하게 달려 두 사람의 앞까지 다가왔다.
알렉스는 어쩐지 비장해 보이는 얼굴로 정원과 석주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정원을 석주로부터 보호해 주려는 듯한 동작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이상한 상황에 잠시 말을 잃은 정원은 굳은 머리를 애써 굴려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해 냈다.
정원은 알렉스에게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다' 같은 말을 던져 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원과 석주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대책 없이.......'
정원이 황당한 얼굴로 알렉스의 등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여전히 비장한 목소리로 석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말로 하시죠...!"
"지금도 말로 하고 있었는데요?"
석주는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고, 오히려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들유들한 대답에 알렉스는 할 말을 고민하는 듯 망설이고 있었다. 정원은 알렉스의 어깨를 툭툭 쳐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지금 뭘 하시는 건가요? 그만하세요."
"정, 역시 지금 위협을 당하고 있던 건......."
"알렉스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만해 달라고 했어요."
단호한 어투였다. 우물쭈물하는 듯하던 알렉스는 못내 미련이 남은 듯 석주와 정원을 번갈아 보다가, 정원에게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긴 뒤 허무하게 자리를 떠났다.
어이없는 등장과 퇴장이었다. 석주에게 대체 무슨 말로 변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정원은 차마 그쪽을 돌아보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자 석주가 먼저 입을 열어 질문을 던져 주었다.
"벌써 다른 사람이 있으면서 데이트 신청을 한 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