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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109화 (109/126)

109.

알렉스와 만나는 사이냐고 묻는 석주의 목소리에는 놀리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정작 눈빛은 그만큼 장난스럽지는 않았다. 단순한 빈정거림이나 놀림이라고 하기에는 살짝 굳어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정원은 일단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면 아직 만나지는 않는 사이?"

"아직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어요."

"그럼 무슨 사이인데요?"

석주의 질문은 생각보다 집요하게 이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서는 안 될 듯한 분위기에 정원은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제가 여기 온 뒤로 도움을 좀 받기는 했지만... 무슨 사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닙니다. 그냥 아는 사이예요."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원의 입장에서 알렉스는 '그냥 아는 사이' 이상으로 표현할 상대는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석주는 여전히 오묘한 미소를 그대로 유지한 채 재차 물어 왔다.

"아하. 그럼 저쪽이 일방적으로 쫓아다니고 있는 거네요?"

"......."

그냥 아는 사이치고는 간섭이 너무 과하잖아요. 마음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혹시 스토커?"

웃으며 묻고 있었지만 단순히 장난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을 향한 걱정이 섞여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원은 입을 다문 채 석주를 지켜보기만 했다.

말을 얹지는 않았다. 실은 정원 본인도 알렉스가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스토커라고 치부할 생각은 없었지만, 정원은 여기서 알렉스가 원래 주위에 관심이 많고, 필요 이상으로 오지랖이 넓은 상황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그를 변호할 만큼 안일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석주의 속내가 궁금해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이 제일 컸다.

"대답이 없네....... 진짜인가? 도와줄까요?"

정원이 말을 하지 않자 석주는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질문했다. 방금 전까지는 말에 장난기가 섞여 있었지만 지금은 꽤나 심각하게 목소리를 가라앉힌 채였다. 정원은 가만히 석주를 마주 보다 입을 열어 되물었다.

"맞다고 하면 어떻게 도와주실 건가요?"

"글쎄요. 묻어 버리면 금방이긴 한데......."

정원의 질문에 석주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아왔다. 장난으로 던지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석주에게 민간인을 '묻어 버리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까.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는 사이 석주는 알아서 말을 물렸다.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으니까 그건 싫으시려나. 어떻게 해 주는 게 좋겠어요?"

담담함을 유지하려 했던 정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알면서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석주에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원이 보기에 석주의 태도는 이상했다. 만약 자신이 석주의 입장이었다면 정원을 결코 좋게 볼 수 없을 터였다. 그는 정원의 접근이 의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태였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정원 자신이 석주를 귀찮게 하고 있다는 것도 자명했다. 게다가 난데없이 나타나 석주를 경계하고 사라진 알렉스까지 보았으니, 심기가 불편해져 정원을 떼어 놓고 싶어 하는 것이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석주는 정원에게 도와줄 지를 묻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랬다. 조금 기대가 됐다.

복잡한 생각이 정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기억은 없지만 자신을 친근하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심지어는... 석주는 그냥 기억을 잃은 척하는 것이고, 자신을 걱정하는 티를 차마 숨기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그런 생각 탓에 순간 이성이 마비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정원은 자신에게 직접 방법을 물은 석주의 말을 무시하고, 짧은 질문을 던졌다.

"왜인가요?"

석주는 슬쩍 눈가를 찌푸리며 웃더니 대꾸했다.

"뭐가요?"

"도와주겠다고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강석주 씨가 절 도와주셔야 할 이유는 없을 텐데요."

그 말에 석주의 표정이 다시 오묘하게 굳어졌다. 무감정한 노란색 눈동자가 정원을 곧장 바라보았다. 뒷덜미가 서늘하게 느껴질 만큼 싸한 표정이었다.

말을 잘못 꺼낸 걸까.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표정을 보니 자신이 방금 한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인지 실감이 난 것이다.

자신 앞에서 부드러운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주어서 잊고 있었지만, 그도 결국 에스퍼였다. 한순간 아무 이유 없이 관계도 없고 귀찮기만 한 이를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 정도야 에스퍼의 변덕으로 치부하면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괜히, 어쩌면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거나...... 그런 기대를 품어 쓸데없는 질문까지 꺼내 버린 것이다.

살짝 비참하고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석주의 기분이 상했다는 게 더 문제였다. 심기를 거스른 것을 사과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정원이 석주의 기색을 살피고 있을 때, 그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러게요."

방금 전까지 보인 오싹한 무표정에 비해서는 온건하고 침착한 대답이었다.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어 얼굴을 살피니 훨씬 덤덤해진 표정이 정원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모르겠네요."

"......."

"뭐, 됐어요. 필요 없는 모양이니까 없던 얘기로 할게요."

그 말을 남긴 뒤 석주는 방금 전의 싸늘한 표정이 정말 착각이었나, 싶을 만큼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정원은 무심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석주가 가볍게 한쪽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 손짓은 단순히 인사 같기도 했지만 완곡한 거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차마 붙잡을 수 없는 뒷모습이었다.

정원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석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진 뒤에야 겨우 걸음을 뗄 수 있었다.

* * *

집에 돌아오자 메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원을 반겼다.

"왔네! 어딜 갔던 거야? 아침도 안 먹고......."

"지금 먹고 들어왔습니다."

걱정 말라는 듯 대답하면서도 살짝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정원은 이전에도 종종 아침을 거른 적이 있었고,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아침을 거른 채 외출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뭘까.

질문을 던지기 전 메리가 알아서 답변을 내놓았다.

"실은 알렉스가 찾아왔었거든. 정이 집에 있냐고 물어보던데, 없다고 했더니 표정이 싹 굳어서.... 급하게 가 버리더라고. 얼굴이 아주 창백해져선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횡설수설하기만 하고. 난 그래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뭐야."

"알렉스가......."

이상한 일이었다. 정원이 심각하게 얼굴을 찌푸리자 메리의 표정은 다시 걱정으로 물들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러고 보니까 마을에 이상한 손님들이 왔다던데, 무슨 관련이라도 있어?"

"아닙니다. 그냥 나갔던 건데, 알렉스가 뭔가 오해했나 봐요."

"그렇지? 하긴 알렉스가 네 일에 워낙 신경을 많이 쓰기는 하니까."

그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내심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기는 했다. 메리까지 그렇게 말할 만큼 알렉스가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걸까. 그러나 그런 심정을 티 내지는 않고 물었다.

"이상한 손님들이라고 하셨나요?"

"못 들어봤어? 지난번에 장이 섰을 때 왔던 남녀 한 쌍이 아직 여관에 있다던데. 신혼부부라고도 하고, 남매라고도 하고... 말은 많은데 아무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나 봐."

그렇게 설명한 메리는 정원에게 너무 집안에만 있어서 바깥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게 아니냐며 염려를 늘어놓았다. 방금 그 손님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지만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오늘처럼 자주 돌아다니라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정원은 생각에 잠긴 채 방으로 돌아왔다.

* * *

그날 밤.

정원의 방에서 툭, 툭 하고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처음에는 비가 오는 것인가 싶었지만, 간헐적인 소리는 누군가 일부러 내는 소리 같았다. 서너 차례 이어지는 소리에 정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

조금은 예상한 상황이었다. 창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은 알렉스였다. 왜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창가로 찾아왔을까. 늦은 시간이라 주인 내외를 깨우지 않으려 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괜히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정원은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지금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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