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겉옷을 걸치고 나왔음에도 날이 제법 쌀쌀했다. 으슬으슬한 몸을 감싸며 주위를 둘러보자, 정원의 방 창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알렉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원은 그런 알렉스의 앞에 다가가 선 뒤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일부러 무례하게 굴려 한 것은 아니었고 쌀쌀한 날씨 때문이었지만, 알렉스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이 시간에."
냉랭하게 느껴질 만큼 담백한 어투로 물었다. 알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난감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음...... 연락하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정원과 석주의 사이에 나타나 석주를 불한당 취급한 뒤, 정원에게 쫓겨나듯 자리를 떠나면서. 하지만 연락을 하는 것과 한밤중에 직접 찾아오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작게 한숨을 쉰 정원이 입을 열어 말했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이라면... 아까 제가 무례하게 말했던 건 사과드리겠습니다. 걱정해 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그래 주실 필요 없지만-."
"사과를 받으려고 온 건 아니에요!"
사과와 거절의 말을 동시에 꺼내는 정원을 보며, 계속해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알렉스는 결국 도중에 말을 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쪼그려 앉은 알렉스를 내려다보던 정원의 시선이 한순간에 위쪽으로 올라왔다. 정원은 갑작스럽게 소리를 높이는 알렉스를 석연찮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 죄송해요. 사람들 깰 수도 있는데 무심코......."
금세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언성을 높인 것에 대해 사과한 알렉스가 잠시 우물쭈물하는 얼굴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렸다.
"그러니까, 저는 그냥......."
"그냥?"
덤덤하게 묻는 정원의 말에 알렉스의 얼굴이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다시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지고 괜히 물었나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알렉스가 겨우 질문을 끝까지 마무리했다.
"그냥, 그분이랑은 무슨 관계이신지가 궁금해서요."
"......."
"그분도 빚쟁이... 그런 입장이신 줄 알고 걱정했던 건데, 오늘 보니까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서.... 제가 아까 오해하고 나섰던 건 저야말로 죄송해요."
알렉스가 가리키는 것은 석주가 분명해 보였다. 겨우 말을 마무리한 알렉스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자, 압박감을 느낀 것인지 알렉스는 괜히 다시 입을 열어 어물거렸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저하고 그분이 무슨 사이인지 묻는 건가요?"
"그런...... 거죠."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이는 알렉스를 보며, 정원은 인상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정원 자신이 준희와 석주를 빚쟁이라고 속여 놓은 상황이니, 아까의 상황을 빚쟁이에게 협박당하는 것으로 착각해 오지랖을 부렸다고 한다면 오히려 이해가 갔을 것이다. 그러나 분위기를 보고 그게 아니라는 것은 눈치챘지만, 그럼에도 석주와 정원의 관계가 궁금하다는 건.
게다가 단순한 궁금증처럼 보이지 않는 저 오묘한 뉘앙스까지. 정원이라 해도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기라도 한 걸까.
이런 상황에서는 그런 의심이 드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왜일까. 어쩐지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도저히 알렉스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어 이런 행동을 하는 거라며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게 왜 궁금하시죠?"
단도직입적으로 꺼낸 물음에 알렉스가 움찔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따지려는 게 아니고... 정말로 궁금해서요."
평소였다면 '궁금하다고 해서 대답해 줘야 하느냐' 같은 말을 꺼냈겠지만, 지금은 따질 방향이 달랐다.
"무슨 사이라고 대답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그 말에 알렉스는 한참 동안 쭈뼛거렸다. 언뜻 보기에는 안쓰러울 정도로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는 한참 뒤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이러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실은......."
"......"
"제가 정한테...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무슨 사이인지가 궁금했던 거예요."
정원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뻔한 대답이었다. 이 말로 납득하는 것이 보통이리라. 하지만 정원의 시선에는 여전히 찝찝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분이랑 같이 있을 때 당신 표정이 평소랑 다른 걸 보니까, 신경도 쓰이고 솔직히 조금 질투가 나기도 해서......."
"......."
"실례되는 질문이었다는 건 알아요. 제가 마음이 급해서 너무 서둘러 버렸네요."
그래서 좀처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정원을 보며 알렉스가 눈치를 살폈다.
"기분... 많이 상하셨어요?"
그 질문이 나오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어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런 문제는 아니고요."
"네?"
"그런 거 때문에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알렉스의 의아해하는 얼굴은 진실해 보였다. 이제까지 그가 자신에게 보인 호의를 생각하면 오늘의 태도도, 지금의 이 고백도 자연스러웠다. 한마디로 그가 이상하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의심의 근거는 순전히 정원 자신의 감뿐이었다.
하지만 그 감이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원만이 아니라 석주나 준희도 알렉스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처럼 바라본 전적이 있었으니까.
정원은 의아한 얼굴의 알렉스를 요목조목 뜯어보았다. 그리고 한참 만에 입을 열어 물었다.
"거짓말은 왜 하나요?"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자신의, 그리고 석주와 준희의 감을 믿기로 했다. 정원의 질문에 알렉스는 정말로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정?"
"말 그대로예요. 날 좋아해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무슨 생각인 거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정. 제 마음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 진심인걸요."
난감한 얼굴로 정원을 바라보던 알렉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정원의 한쪽 어깨를 짚었다. 꼭 정원을 진정시키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태도를 보고 순간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닌가, 순수한 마음을 고백하는 상대를 괜히 의심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그야말로 순간이었다.
정원은 묘하게 차가운 기색을 띤 알렉스의 눈동자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정원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의 싸늘하고 계산적인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오늘 갑자기 이렇게 찾아온 것도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그렇게 경계하고 의심할 필요는-."
여태 왜 저 눈빛을 읽지 못했을까? 그의 눈에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지고 본 적이 없어서? 아니면 그가 보이는 호의적인 태도에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아서? 그렇다기보다는 그저 알렉스가 지금까지 그 눈빛을 잘 숨겨 왔다고 판단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았다.
정원은 침착하게 물었다.
"당신, 그 사람들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도 거짓말이죠?"
"......."
알렉스는 아무 말 없이 곤란한 얼굴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계산하듯 굴러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는 고민하는 듯했다. 계속해서 잡아뗄지 말지를 생각하는 걸까.
한참 뒤, 턱 근처를 매만지던 알렉스가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선은 제가 물어본 말에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저 난감해하는 표정까지 거짓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강석주랑은 무슨 사이예요?"
"......."
"그 사람은 지금 기억이 없는 걸로 아는데...... 그런 것치고 분위기가 좋아 보여서요."
역시나, 라고 해야 할까. 석주와 준희에 대해 모르지 않을 거라는 추측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의 소속이나 위치에 대해 알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지, 존재 자체가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는 강석주의 이름까지 알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정원이 얼굴을 찌푸린 채 알렉스를 노려보았다.
알렉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정원을 마주 보다 입을 열었다.
"아까 당신 표정이 좋아 보였다는 건 정말이에요."
"......."
"그게 정말...... 정말로 유감스럽네요."
그는 정말로 애석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원의 표정이 좋은 게 어째서 유감스러운 일이라는 것일까. 정원 자신에 대한 악감정이 있었던 걸까? 대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그러나 정원의 의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단번에 정원을 향해 손을 뻗은 알렉스가 손으로 정원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민간인인 알렉스를 상대로 저항할 수가 없었다.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정원은 자신의 안일함을 반성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