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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111화 (111/126)

111.

암전되었던 눈앞이 천천히 다시 밝아졌다.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아파 오는 이마를 감싸 쥐려 했지만 등 뒤로 양손이 묶인 탓에 마음처럼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차 안이었다. 때마침 차체가 방지턱을 넘어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제야 기절하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완전히 떠올랐다.

시선을 돌려 보니, 알렉스는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차 안 룸 미러에 비친 얼굴은 무표정하게 굳어 정원이 알던 것과는 다른 빛을 띠었다. 웃고 있을 때에는 바보 같을 만큼 순수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어디부터 틀렸던 걸까.

정원은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딜 가는 건가요.”

물음을 들은 알렉스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가 힐끗 눈을 돌리더니 룸 미러를 통해 정원의 모습을 살폈다. 정원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챈 것 같았다. 작은 동요를 완벽하게 숨기지 못하는 것을 보니 역시 그렇게까지 치밀한 사람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약간의 난감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침착하시네요.”

그러고는 다시 정면을 향해 눈을 돌렸다. 사실상 말을 돌린 것이었지만 정원은 그 정도로 기가 죽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정원이 몸을 바로 세워 앉으며 재차 물었다.

“지금 어디쯤인가요?”

“…….”

“제가 잠든 지는 얼마나 지났나요.”

“음…… 정확히 말하면 그냥 잠들었다고 말하긴 좀 어렵죠.”

알렉스가 느릿느릿한 말투로 대꾸했다. 정원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기억은 나세요?”

정원의 침착하고 태연한 태도 때문에 의문이 생긴 모양이었다. 굳이 일깨워 주지 않아도 알렉스가 자신을 기절시켜 끌고 왔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것은 자명하니 굳이 길길이 화를 내지 않았을 뿐. 고개를 끄덕인 정원이 바로 말을 이었다.

“네. 도착까진 얼마나 남은 건가요?”

“기억하신다면서 되게…… 태연하게 물어보시네요. ……눈치채고 계셨어요?”

짧은 머뭇거림 끝에 알렉스가 물어 왔다. 그가 검은 속내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냐니, 그럴 리 없었다. 석주와 준희에게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눈치를 채기는커녕 그렇게 눈여겨본 적도 없는 상대였으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에 취해 주위를 경계하지도,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의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의심을 품고 있는 상태였음에도 그의 부름에 순순히 응한 것도 문제였다. 더는 스스로의 안전에 관심이 없어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원은 안일했다는 것을 쉽게 인정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줄줄이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정원은 건조하게 대꾸했다.

“제가 먼저 물어봤을 텐데요.”

“어차피 도착하면 알게 될 테니까요.”

알렉스의 답은 명료했다. 현재 위치나 목적지를 알려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정원은 묵묵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가는 차도 없는 한적한 길이라는 것 외에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자신을 속였는지 물론 궁금했다. 무의미한 질문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나요?”

다시 뒤를 힐끗 넘겨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정원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디인지 물었을 때와 달리 알렉스는 순순히 대꾸했다.

“그렇지는 않아요. 애초에 당신을 만난 건 정말로 우연이었으니까…….”

“…….”

얼굴을 찌푸린 정원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저 말했다.

“의외라는 얼굴 같네요?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리가 없잖아요. 당신이 우리 마을에 오게 된 것 자체가 우연이었는데.”

“그 마을 사람이라는 것부터가 거짓말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는 건 마을 사람들 전부가 저랑 한패라는 뜻이겠네요? 설마요. 그렇지는 않아요.”

정원은 그 해명에 그냥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한 사람을 속이기 위해 그런 일을 벌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정원 자신에게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어요. 또…… 당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래서 그렇게 친한 척을 했던 거네요.”

정원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며, 얼굴을 찡그린 채 말했다. 알렉스는 불편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그가 자신에게 보인 호의가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걸로 배신감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보다 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건가요? 내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은 아닐 텐데요…… 얼굴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러자 알렉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작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유 관장이 심은 사람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는 석주와 테프트 사장의 일 이후로 정신이 없을 테니 자신에게까지 신경을 쏟을 여유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또 알렉스는 그의 사람이라고 치기에는 너무 치밀하지 못해 보였다.

‘……누가 보낸 사람이든.’

크게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고민해 봤자 소용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에스퍼도 아니었고, 달리는 차 안에서 손이 묶인 채 빠져나갈 능력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정원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눈을 감았다. 기이한 졸음이 밀려왔다.

* * *

“도착했어요.”

다시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가물거리는 눈을 떠 보니 밖은 여전히 어둑어둑했고, 차는 알 수 없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 알렉스가 열어 둔 차 문틈으로 스산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알렉스는 정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간단히 평했다.

“약 기운이 아직 남아 있나 보네요. 잘 못 일어나시는 걸 보니까…….”

이상할 만큼 잠이 쏟아진다 했더니, 알렉스가 자신의 입을 막아 재울 때 썼던 수면 약의 영향인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차 뒷문을 열어 정원을 차 밖으로 끌어당겼다. 어차피 몸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기에 순순히 차 밖으로 발을 디뎠다.

차에서 내리자 보인 것은 낡아 빠진 오두막이었다. 이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외관이었다. 정원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속으로는 자신이 이런 폐건물과 대체 무슨 연이 있어 자꾸만 이런 곳에 오게 되는지 짧은 고민이 스쳤다.

알렉스는 익숙한 듯 문 앞에 다가서 손잡이를 돌렸다. 잠금장치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숨과 함께 열린 문틈으로 정원을 밀어 넣었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하고 굳이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알렉스는 정원이 직접 보기 전까지는 대답할 마음이 없어 보였기에.

오두막 내부는 외관과 마찬가지로 좋지 못한 상태였다. 분명 누군가가 지내고 있는 듯 세간살이의 흔적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뚜렷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알렉스는 정원의 등을 떠밀어 오두막 가장 안쪽에 있는 방문 앞에 세웠다. 그가 정원의 등 뒤에서 손을 뻗더니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 있죠?"

알렉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전히 문 안쪽에서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등 뒤에서 알렉스의 작은 한숨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들어갈게요."

결국 방 안에서는 끝까지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알렉스는 손을 뻗어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끼릭거리는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역시 잠금장치는 되어 있지 않았다.

잔뜩 어질러진 방 안에 쓰러질 듯한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이미 시체인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가는 사람의 몸 하나가 엎어져 있었다.

"윤......"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알렉스가 불렀다.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원은 정원대로 못 박힌 듯 선 채 침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뒷덜미의 솜털이 쭈뼛 일어선 상태였다. 무언가 나쁜 예감이 든 것이었다. 이대로 당장 뒤돌아 떠나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정원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유가 뭘까.

침대 위의 사람은 죽은 것은 아닌지 보일 듯 말 듯 몸을 들썩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알렉스는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쉰 뒤 침대 앞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정원은 그에게 묶인 손목이 붙들려 저절로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니 비로소 그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볼품없이 마른 몸과 푸석한 머릿결. 밥은 먹고 사는 것인지 의아해지는 모습. 그 모습을 보자 나쁜 예감은 더더욱 짙어졌다.

알렉스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보세요, 윤...... 제가 누굴 데려왔는지 봐요."

그는 그대로 귀신같이 고개를 들더니, 야생 짐승 같은 눈빛으로 알렉스와 정원이 서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정원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정원의 입에서 비로소 침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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