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12화 (112/126)

112.

정원이 그가 누구인지 알아챈 것과 동시에 그 역시 정원을 인식한 것 같았다. 귀신 같은 몰골의 형은 정원을 발견하자마자 핏발 선 눈을 크게 뜨고 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가! 당장 여기서 나가!”

그건 분명 알렉스가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던 모양이다. 당황한 알렉스는 제 입술을 한번 세게 짓씹더니 정원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방문 밖으로 끌려나가다시피 발을 옮긴 정원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형의 얼굴을 넋 나간 듯 보고 있었다.

문 안쪽의 형은 계속해서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정원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곤 머리를 쓸어 넘겼다. 벽에 기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는 모습이 시야 한구석에 들어왔지만 그가 앉아 있는 쪽을 향해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떠돌아다녔다. 그 중 어떤 생각을 가장 중점적으로 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결국 짧지 않은 침묵 끝에, 한 가지 생각이 필터링 없이 정원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살아 있었구나.”

알렉스는 쇠약하게 들리는 웃음 소리를 냈다.

“죽었을 줄 알았어요?”

“…….”

“형제가 죽기를 바랐다니…… 정이 없다지만 너무하네요.”

정원이 대답하지 않는 사이, 여전히 거친 웃음 소리가 섞여 있는 알렉스의 말이 이어졌다. 비꼬는 걸까. 진심이라기보다는 날 선 농담에 가까워 보였지만, 지금 정원이 듣기 적합한 농담은 아닌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내가 아니라 형 쪽이겠죠. 살아 있다는 거 자체에 놀랐을 뿐이에요.”

정원은 짐짓 담담하게 대꾸했다.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릴 듯한 충격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기분도 알렉스의 말을 듣고 나니 금세 추슬러졌다.

“…….”

알렉스는 되려 자신이 더 침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느 정도 평정을 찾고 나니 주변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집안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눈으로 훑은 정원이 주저앉은 알렉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정원의 손목을 묶은 밧줄의 끝이 들려 있었다. 형을 이곳에 숨겨 놓은 것은 알렉스일까. 대체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걸까. 테프트의 사장이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닌 일반인을 심복으로 썼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사장의 끄나풀이 아니라 정원의 형이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는 뜻일까?

그때 문득 알렉스가 자신에게 고백했던 말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것을 떠올리자 퍼즐이 끼워 맞춰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원은 홀로 어이없는 웃음 소리를 흘린 뒤 입을 열었다.

“당신…….”

“…….”

가이드를 좋아한 적이 있다고 하더니.”

“…….”

“그게 내 형 얘기였나요?”

민망해하며 고백하던 알렉스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것이 정말로 정원의 형을 가리키는 이야기였다면… 정말로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일까. 형과 정원이 어떤 관계인지. 정원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건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잘도…….”

알렉스가 어디서부터 자신을 속였는지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소름이 끼쳐 오는 듯했다. 하지만 정원은 곧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은 무의미했다.

알렉스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맞아요……. 절 구해줬고, 그래서 제가 좋아했다는 가이드.”

“…….”

“연락이 닿은 건 최근이에요. 여태 저 혼자 그리워하는 게 전부였죠. 원래 저한테는 정말로 다른 세상 사람이었으니까…… 옆에 있길 바랐던 적도 없었어요. 어떻게 그랬겠어요.”

정원은 얼굴을 찌푸린 채 그의 넋두리를 듣기만 했다. 이 와중에도 형과의 만남을 떠올리니 기쁘다는 것인지, 알렉스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랬는데, 이번 일이 있고 나서…… 다시 만나게 됐어요.”

“이번 일이라는 건….”

“테프트 사장이라는 사람이 죽은 뒤에, 저를 찾아왔거든요. 죽고 싶은데 죽어지지 않는다면서…….”

죽고 싶은데 죽어지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정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 이후로 형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한 적은 물론 있었다. 단순히 있는 정도가 아니라 꽤나 많았다. 일부러 바깥의 소식을 끊고 살았기 때문에 애써 궁금한 마음을 억누르기는 했지만.

그리고 사장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당연하게도 형 역시 같은 길을 갔을 거라 생각했다. 형은 사장의 가이드였고 최측근이었다. 사장이 사라진 지금 형의 울타리가 되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게다가 사장을 향해 형이 보였던 맹목적인 충성심을 생각하면 그를 따라 죽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알렉스의 말을 들어 보면 역시나 형은 사장을 따라 죽고 싶어 했던 모양이었다. 단지 성공하지 못했을 뿐. 그러나 알렉스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넋두리가 이어졌다.

“절 찾아 줬다는 게 기쁘긴 했지만, 제가 윤한테 해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이런 낡아빠진 은신처를 제공해 주는 것밖에 없었어요. 마음을 달래주기는커녕 딱 한 번 웃게 해줄 수도 없었으니까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그 말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알렉스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알렉스가 정원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거라 착각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그 눈이 실은 정원의 형 때문이었다니.

알렉스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윤이 당신 얘기를 정말로 많이 했거든요.”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런 기분을 느꼈다는 사실이 스스로 수치스러워졌다. 무의식적으로 기대를 해 버린 걸까. 어쩌면 형이 자신에게 혈육으로서 조금의 애정이라도 가졌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그러나 조금만 다시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이 결코 좋은 내용은 아니었을 거라는 사실을.

“……좋은 얘기는 아니었겠죠.”

겨우 입을 열어 받아치자, 알렉스는 입을 다문 채 잠시 정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쨌든, 당신 얘기를 들을 때에는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 같아 보였어요.”

정원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은 얘기가 아니었을 거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예상이 틀리지는 않은 듯했다. 그리고 정원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때 어땠는지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알렉스가 모든 이야기를 전한 게 틀림없었다.

“제가 뭘 하고 있는지 전부 다 일러바친 모양이네요.”

신랄한 말투였다. 알렉스는 이번에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안타까워하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계속 힘들기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힘들어한다는 얘기를 전하니까 형이 좋아하던가요?”

정말로 어이가 없고 황당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분노보다는 허탈함에 가까웠다. 알렉스는 정원의 얼굴을 빤히 마주 보았다.

“윤은 당신이 요새 전보다 훨씬 좋아 보인다는 걸 견디기 힘들어했어요.”

“요새 좋아 보였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얼굴을 찡그리고 물어보았다. 알렉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강석주가 오고 나서부터.”

“…….”

정원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원은 얼버무리듯 말을 돌렸다.

“그래서 여길 데려왔다는 건가요? 형이 그러라고 하던가요? 반응을 보니 아닌 것 같은데요.”

문 안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정원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소리를 질러 댄 것을 보니 정원이 올 거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한 듯했다. 알렉스의 독단인 모양이었다.

“제가 멋대로 데려온 거니까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윤도…… 기뻐할 거라고…….”

전혀 기뻐하는 것 같지 않던 형의 모습을 떠올린 것인지, 알렉스의 말끝이 침울하게 작아졌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방 안에서 창백하게 마른 손이 뻗어 나왔다. 정원의 손목을 묶은 밧줄을 잡아챈 형이 다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들어와.”

그러자 정원을 붙들고 있던 알렉스의 손에서 거짓말처럼 힘이 풀렸다. 정원 역시 저항할 마음은 없었다. 순순히 안으로 끌려 들어가자, 등 뒤로 문을 쾅 닫은 형이 정원의 목을 향해 손을 뻗어 왔다.

다시 보아도 유령 같은 몰골이었다. 입을 다문 채 가만히 그를 마주 보자, 형이 정원의 목을 조를 듯 강하게 감싸 쥐었다.

“저 자식이 또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잘됐어.”

“…….”

“널 죽이면 다 끝나겠지…….”

정원은 그대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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