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제가 여기 왜 왔을까요?"
석주가 그렇게 질문을 던져 왔다. 문제를 내기라도 하려는 건가? 오묘한 얼굴의 그를 바라보아도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정원이 방 안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쓰러진 형은 전등에 얻어맞은 뒤통수에서 약간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당황해 눈가가 일그러졌지만, 어깨가 작게 들썩이는 것을 보아 기절했을 뿐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는다'는 말의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석주가 조절한 탓도 있을 것이다.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 정원이 물었다.
"맞혀 보라는 건가요?"
"아니요, 나도 몰라서 대답을 못 하는 거예요."
그가 여기 왜 왔는지 자신조차 모른다는 뜻인가.
아니면... 정원을 구하러 왔는데, 구하려는 마음이 왜 들었는지를 모른다는 뜻인가.
"이유가 뭐든......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이 겨우 입을 열어 감사 인사를 했다. 잔뜩 예의를 차려 딱딱하게 느껴지는 인사였다. 그 말을 들은 석주는 아무 대답 없이 정원의 얼굴을 마주 보기만 했다. 다시 서먹하고 어색한 정적이 이어지다가, 한참 만에 석주가 대꾸하듯 말을 꺼냈다.
"내가 말했죠."
"네?"
"얘 수상하다고."
그러고는 자신이 기절시켰던 알렉스의 어깨를 다시 발로 툭툭 쳤다. 정원의 감사 인사에 대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리려던 것이었나 보다. 정원은 쓰러진 알렉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이런 식일 줄은 몰랐지만......."
약간의 씁쓸함을 섞어 작게 웃은 뒤 정원이 고개를 들었다. 이상할 만치 빤히 바라보는 눈길에 석주의 눈가가 살짝 움찔거렸다. 왜 그렇게 보냐는 듯한 시선에 정원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와 줘서...... 기쁘긴 하네요."
석주의 표정이 다시 오묘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정원이 채 말을 잇기도 전, 그리고 석주가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석주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이 보였다.
"잠깐......!"
자신에 대한 기억이 없는 그에게서도 저런 표정을 보게 될 줄이야.
그의 표정은 인식했지만 정작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석주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눈을 돌리자, 그곳에는 좀비처럼 비척거리는 형이 서 있었다.
틀림없이 기절해서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줄 알았다. 방금의 표정을 보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석주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정원은 느릿느릿 고개를 숙여 제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내려다본 바로 그곳에 형의 손이 맞닿아 있었다.
'아니, 그냥 손을 댄 게 아니라......'
느리고 묵직한 통증이 닿은 부위에서부터 전해져 올라왔다. 이를 악물고 정원을 노려보던 형이 천천히 손을 뗐다. 정원의 허리를 찌른 유리 조각이 형의 손에도 상처를 내고 있었다. 형이 손을 들어 올리고, 퍽,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뒤통수가 울리며 눈앞이 핑 돌았다.
석주가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형을 향해 거칠게 손을 뻗는 것을 보며, 정원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눈을 뜬 곳은 또다시 차 안이었다.
'대체 기절을 몇 번씩이나.......'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가이드로 살면서 위험한 일을 수없이 많이 맡아 보았지만, 그러면서도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은 잦지 않았다. 정신을 잃을 만큼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도 좀처럼 쓰러지게 되지 않아서 일을 더 많이 맡게 되었다면 모를까.
요즘처럼 자주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이 없었다. 살면서 할 기절을 전부 다 몰아서 하는 기분이었다.
멍한 머릿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겨우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정원이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몸을 뒤척였다. 덜컹이는 움직임 덕분에 차 안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다 보니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베고 누워 있는 거지.'
눈을 크게 뜨고 위를 보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눈에 띄는 노란색.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형이나 알렉스가 아닌 석주의 눈이었다.
강석주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니. 놀란 정원이 퍼뜩 몸을 일으키려 했다. 웅크려져 있던 몸이 펴졌다. 그러나 자세를 완전히 바로 세우기도 전에 석주가 휙 팔을 뻗어 정원을 끌어당겼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저항할 수조차 없었다. 석주의 어깨에 엉거주춤하게 머리를 기댄 정원이 간신히 말했다.
"알겠어요, 안 움직일 테니까 이 손 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석주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엇, 정신이 드셨어요?"
운전석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진짜 다행이에요. 전 또 석주 씨가 사색이 돼서 나오길래 정원 씨 정말 잘못되는 줄 알고 걱정했어요."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말자."
석주가 삐딱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슬쩍 들어 석주의 표정을 살피니, 사색이 된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표정이 나쁘기는 했다. 정원과 눈이 마주친 석주는 슬쩍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정원의 고개를 제 어깨 쪽으로 꾹 눌렀다. 이번에는 걱정해서가 아니라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가이드 안 받고 버티니까 상태가 맛이 가죠. 사람이 눈앞에서 찔리는 것도 못 막고......."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말자고."
방금 전에 비해 짜증이 더 많이 섞인 투로, 석주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룸 미러를 통해 힐끗 뒤를 돌아본 준희가 금세 꼬리를 내렸다.
"네, 네. 아무튼 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것만 알아 두시라고요. 이거 다 돈으로 받아 낼 거니까."
"고마워요, 준희 씨. 모아 둔 돈이라면 저도 남았으니까......."
입을 열어 대답한 것은 못마땅한 표정의 석주가 아니라 정원 쪽이었다. 그 말과 동시에 아직도 정원의 머리를 잡고 있던 석주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준희 역시 석주에게 하던 말에 정원이 이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던 건지, 놀란 듯 대답이 나왔다.
"아뇨, 정원 씨 얘기가 아니라......! 정원 씨한테는 제가 죄송하죠."
정말로 고마워서 한 말이었는데. 머쓱하게 헛기침을 한 준희가 말했다.
"아무튼 그건 됐고! 입 다물게요. 저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대화하셔도 괜찮아요."
정원은 살짝 불편한 얼굴로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라니.......'
말이야 좋은 말이지만, 쉽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입을 다문 정원이 힐끗 석주의 얼굴을 살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눈이 마주치자 석주는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정말로 준희가 그 자리에 없기라도 한 것 같은 태도였다. 방금 자신이 한 생각이 머쓱해질 정도로.
"말씀하세요."
정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석주는 정원의 얼굴을 빤히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무슨 사이예요? 불려 가서 어떤 말 들었어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정원이 눈을 깜빡였다. 잠시 생각한 뒤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형과 정원이 무슨 사이인지가 궁금하다는 뜻인가. 자신에 대한 기억은 잘려 나갔지만, 정원의 형까지 잊어버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테프트 사장의 전용 가이드로 그를 알고 있는 것이리라.
정원이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그의 동생이라는 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석주는 정확히 어디까지 기억하고 어디까지 잊어버린 것일까. 잘못 입을 열었다가 괜히 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어 몸 상태를 악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가뜩이나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준희는 지나가는 잔소리처럼 말했지만, 그것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형이 정원에게 덤벼드는 동안 석주가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부터가 정상적인 상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이딩을 받지 않는 바람에 상태가 나빠져 대응 속도가 느려졌다면 말이 됐다.
정원은 도움을 청하듯 고개를 돌려 준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룸 미러를 통해 눈이 마주치자 준희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석주가 다시 말했다.
"없는 사람 신경 쓰지 말고요."
피할 구석이 없는 듯했다. 정원은 한숨을 푹 쉬고 될 대로 되라는 듯 대꾸했다.
"제가 그 사람 동생이에요. 알렉스 말고...... 정윤."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인 듯했다. 오히려 자신보다 알렉스 쪽이 훨씬 자연스럽게 형의 이름을 말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정원이 혹시 몰라 덧붙였다.
"그렇다고 한패라는 건 아닙니다."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한 말인데, 석주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봐서 알아요."
"......."
"뭐... 자세한 건 가 보면 알겠죠."
그렇게 중얼거린 석주가 좌석 뒤쪽을 손가락으로 대강 가리켰다.
"들어 있으니까요...... 트렁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