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15화 (115/126)

115.

한참을 달린 차가 도착한 곳은 낡은 간판이 달린 가게였다. 복잡한 기색으로 차에서 내린 정원이 주위를 둘러보곤 물었다.

"여긴 어디인가요?"

"저희 가게예요. 분점 같은 느낌? 자주 쓰는 데는 아니지만, 정원 씨도 아시는 거기까지 가긴 너무 멀기도 하고... 거길 아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준희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어 설명해 주었다. 확실히 정원도 가 본 적이 있는 준희의 가게와 간판 모양이 비슷하기는 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뒤 간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형을 납치하듯 데리고 왔으니, 이대로 그를 국가 기관에 넘기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은 어차피 유 관장이 쫓겨나듯 물러난 상태라고 했고, 석주가 기관 내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아는 사람들을 피해 이런 구석진 곳에 있는 가게까지 데려온 것을 보면, 형을 기관 연구소에 넘기는 대신 몰래 빼돌릴 생각인 듯했다.

석주는 둘의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트렁크 쪽으로 걸어갔다. 트렁크에 들어 있다던 형은 말 그대로 짐짝처럼 구겨진 모습이었다. 등 뒤로 양손이 묶인 채 발버둥을 치고 있었고, 입에는 청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발목도 밧줄로 묶인 상태였다. 강석주는 트렁크에 담긴 짐을 꺼내듯 정원의 형을 꺼내더니 다시 한번 기절시켰다. 정원이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대로 준희의 가게 안에 들어서는 모습이었다.

석주와 준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퀘퀘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이 자주 방문하지 않는 곳 같았다. 그러나 준희가 벽면의 책장을 밀자 그 뒤편에 숨어 있던 계단의 모습이 드러났다.

'비밀 공간이라니, 무슨.......'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공간 같았다. 살짝 질린 얼굴로 바라보는 사이 준희와 석주는 짐짝처럼 들린 정원의 형을 데리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먼지 쌓인 1층과 달리 오히려 지하실은 깨끗한 모습이었다. 연구소 못지않은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실험대 위에 정원의 형을 던지듯 내려놓은 석주는 팔짱을 낀 채 벽면에 기대어 섰다. 준희는 손을 씻더니 뭔가를 준비하듯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서 있던 정원이 물었다.

"뭘 하려는 건가요?"

그를 데리고 실험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미친 과학자처럼 보이는 준희의 모습을 보니 영 터무니없는 망상 같지도 않았다. 준희는 대답을 망설이듯 고개를 들어 올렸고, 석주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미동 없는 자세로 서 있기만 했다.

정원은 재촉하지 않았다. 이대로 대답을 포기해야 하나, 단조롭게 생각할 뿐이었다.

그때 석주의 주머니에서 작은 진동 소리가 들렸다. 그는 전화를 받고 오겠다고 간단하게 일러 준 뒤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올라 모습을 감췄다.

그가 나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준희가 입을 열었다.

"너무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세요. 설마 제가 정원 씨 형님을 해부라도 하겠어요?"

"제 형이라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 형 본인도 그럴 테니까요."

정원의 담담한 대답에, 농담을 던졌던 준희의 얼굴이 곤란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어색하게 하하 웃은 준희가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요. 그냥 지금 이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고, 사장이 무슨 짓을 해 둔 건지 확인하려는 거예요."

정원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형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상태라고 했다. 분명 사장이 죽기 전 형의 몸에 무언가 능력을 사용해 두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왜 기관에 데려가지 않은 건가요. 준희 씨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가게보다는 연구소 쪽에 맡기는 게 확인이 훨씬 쉬울 텐데요."

"그거야 석주 씨 때문이죠."

어깨를 으쓱한 준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자신의 지겨움을 나타내는 모습이었다. 정원은 의아한 얼굴로 잠자코 설명을 기다렸다.

"지금 석주 씨 기억이 없잖아요."

"...그렇죠."

"사장이나 기관이 자기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석주 씨 본인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으니까요."

기억의 빈 공간을 느낀 석주가 기관을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정원이 곧 물었다.

"그래서 형을 데리고 오려고 한 건가요?"

사장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밝히기 위해 형을 찾아온 거라면 납득이 되었다. 그러나 준희는 정원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건 겸사겸사 아닐까 싶은데... 본인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더니 준희는 정원을 향해 나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통화 곧 끝날 텐데, 나가서 물어보시는 거 어때요? 제가 남이 보는 앞에선 일을 잘 못 하거든요."

그러니 나가 달라는 뜻이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정원은 실험대 위의 형을 힐끗 돌아본 뒤 계단을 올랐다.

다시 올라온 가게 1층에 석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먼지가 많은 곳이 싫어 밖으로 나간 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서 보니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을 손에 쥔 석주는 제법 날 선 목소리로 무언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정원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가게 벽에 기대어 섰다. 이야기를 들어도 되나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차피 석주가 자신이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석주의 통화는 금세 마무리됐다. 전화를 끊은 그가 입을 열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요?"

숨어 있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들켜 버린 기분이었다. 정원은 느릿느릿 걸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달빛에 언뜻 비친 석주의 얼굴이 영 좋지 않은 기색을 띠고 있었다.

"......강석주 씨?"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든 정원이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석주는 인상을 찡그린 채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정원의 접근을 막았다. 정원이 잠시 멈칫한 사이 그가 심호흡을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원은 인상을 찡그린 채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곧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중얼거리는 석주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지만, 기운은 전혀 없었다. 정원은 그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바로 앞까지 다가가 섰다. 핸드폰을 쥔 채 힘없이 늘어진 손을 잡아 들어 올리니 손목에서부터 후끈한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런 상태로 뭘 어쩌겠다는 건가요."

"이대로 두기만 하면 곧 괜찮아져요."

정원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석주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절로 입 밖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석주의 기운이 불안정하게 날뛰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폭주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아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폭주하고도 남았을 상태였다.

"그때 이후로 한 번도 가이딩을 안 받았나요?"

"그때라는 게 언제 얘긴지 모르겠는데."

석주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정원을 잊은 석주는 사장을 상대했던 날 정원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도 잊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굳이 정확한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가이딩을 단 한 번도 받지 않고 버텨 온 게 분명했다.

"왜 그런 짓을...."

한숨을 쉰 정원은 그대로 정신을 집중해 그에게로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석주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의 접촉이라서인지, 아니면 석주가 거부하고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가이딩의 효과는 미미했다. 정원은 복잡한 표정으로 석주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그가 가이딩을 받게끔 설득할 수 있는 걸까.

"강석주 씨. 제가......."

"필요없어요. 손은 치워 주세요."

정중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원하지 않으신다면 필요 이상의 신체 접촉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제가 가이딩에 집중할 수 있게... 거부하지 말고 잠시만 힘을 풀어 주시면-."

"손은 치워 달라고 했죠."

말을 마친 석주가 정원의 손을 쳐냈다. 나무를 짚은 채 숨을 고르는 모습이 오히려 가이딩을 시도하기 전보다 더 불안정해 보였다. 속이 끓는 기분이었다. 그렇게까지 거부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해서 거부감이 드는 걸까. 아니면 비록 기억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을 거부하고 싶어진 것일까.......

비참한 기분이었지만, 당장은 석주의 상태가 더 중요했다. 정원은 꿋꿋하게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이번에는 석주의 양쪽 뺨을 감싸 쥐었다. 자신을 똑바로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석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대로 두면 그대로 폭주할 겁니다. 당장 진정이라도 할 수 있게......!"

정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를 바라보던 석주가 혼란스러운 표정 그대로 고개를 숙여...... 정원에게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