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16화 (116/126)

116.

키스할 때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상식이지만,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 정원은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맞닿은 석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질끈 감긴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입속을 샅샅이 훑고 지나가는 혀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순간 멍하니 굳어질 뻔했지만 겨우 정신을 차렸다.

모처럼 온 기회였다.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정원은 여전히 눈을 감지 않은 상태로 손을 뻗어 석주의 뒷목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가이딩을 시도했다. 당장이라도 밀어낼 줄 알았던 석주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회답하듯 정원의 허리를 붙들어 안았다. 급급한 동작이었다. 석주에게 기억이 있을 때 했던 키스와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만큼 이성이 흐려진 상태인 걸까. 아니면 혹시라도, 기억이 돌아오려는 전조 증상은 아닐까.

정원은 자신의 눈가 역시 방금 본 석주의 것과 비슷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렇게 감회에 젖어서는 안 됐다. 가이드의 기운이 불안정해질 경우 가이딩 효과도 떨어지고 말 테니까. 정원은 겨우 정신을 다잡고 석주를 안정시키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금방이라도 폭주할 것처럼 불안불안하던 석주의 기세가 점점 온순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석주는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정원의 어깨를 밀어냈다.

"......."

정원이 아직 부족하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때였다. 입가를 가린 채 거친 숨을 고르던 석주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이러려던 게 아니라...."

혼란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정원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겨우 마음을 다잡은 정원이 입을 열어 말했다.

"방금 한 건 기껏해야 임시방편입니다. 조금 더 가라앉히지 않으면......."

그 말을 들은 석주의 얼굴이 다른 방향으로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혼란스러움에서 불쾌감으로. 그 얼굴을 본 정원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기분 나쁘실 건 이해해요. 하지만 지금 멈추면 얼마 안 가 다시 불안정해질 겁니다."

"......."

석주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여전히 정원을 노려보기만 했다. 기억이 없는 상태이니 자신과 접촉하는 것 자체가 불쾌한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망설이던 정원이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폭주하면 당신만 곤란해지는 게 아니잖아요."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석주는 에스퍼답지 않게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하는 편이었으니, 이런 말을 하면 싫어도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걸 알면서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게 괴로웠다. 말을 뱉은 뒤 고개를 숙인 정원을 보더니, 깊이 한숨을 쉰 석주가 말했다.

"일단...... 함부로 손댄 건 미안하고."

"......."

"가라앉혀 준 건 고맙게 생각해요."

어딘가 억눌린 듯한 감사 인사였다. 그러나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으니 정원은 오히려 조금 조급해졌다. 정원이 뭔가 입을 열려 하자 석주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더는 안 돼요. 당신 몸에 무리가 갈 테니까……."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왜냐면 저는."

다급하게 입을 연 정원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왜냐면 자신은 석주의 각인 상대이니까.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기억이 없는 석주에게 그런 사실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혼란스러워진 나머지 폭주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실은 그것보다는… 돌아올 석주의 반응이 걱정되었다.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정원을 석주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입을 열어 물었다.

"왜요. 당신이 나랑 각인했으니까?"

"......."

정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놀란 듯한 정원의 표정을 보며 석주가 픽 웃었다.

"뭘 놀라요?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가......."

"언제부터......."

멍하니 중얼거리는 정원을 향해 석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죠."

“…….”

"각인한 상대를 못 알아보는 에스퍼가 어디 있겠어요."

정원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며 석주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문제는...... 왜 나랑 각인한 사람이 내 기억에는 없냐, 이거였는데."

정원을 가만히 보던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뺨을 감싸 쥔 손이 여전히 뜨거웠다.

"내 기억에 누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야 당신을 어떻게 할지도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려고 했는데."

그가 복잡하게 됐다는 듯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정원이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의심스러우셨던 건가요?"

석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정원은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절 찾으러 오셨던 거고, 그래서 저한테 가이딩을 받기 싫은 거라면...."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괴로움과 비참함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석주가 작게 한숨을 쉬는 것이 들렸다. 뺨을 감싸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석주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 표정은 하지 말고...."

"......."

정원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그를 위한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당신을 속인 적은 없어요."

“…….”

"강석주 씨가 기억을 잃어서 억울한 건 내 쪽인데."

그에게 이런 하소연을 해서 뭐에 쓴다는 말인가. 하지만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석주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뭘 더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가이딩만 하겠다는데...... 사람을 의심하기나 하고."

“…….”

"그러면 난 대체......."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석주에게 어떤 도움이라도 되고 싶었다. 정원이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본 석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했잖아요."

뺨을 쥔 손이 정원의 얼굴을 위로 젖혔다. 저절로 고개가 들려 그의 눈을 마주 보게 되었다. 복잡한 기색이 깃든 눈동자. 석주의 얼굴이 괴로운 듯 일그러져 있었다. 정원은 그 눈을 보며 조용히 대꾸했다.

"믿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조심스러운 부탁.

석주는 한참 동안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석주가 다시 한 번 정원을 향해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입술이 맞닿았다.

이번에는 폭주 직전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날뛰는 기운 때문도 아니라, 석주 자신의 의지로.

정원의 것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뜨거운 혀가 다시 한 번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망설이던 정원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입속의 움직임이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긴 키스가 끝나고, 석주는 정원의 젖은 입술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정원 역시 눈을 피하지 않았다.

꼭 가이딩을 해야만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됐다'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긴 시선 교환 끝에 석주가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곤란해하거나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준희 나오려면 한참 걸릴 거예요."

"......."

"1층은 너무 낡았고......."

중얼거리는 내내 석주의 손은 정원의 허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허리 부근을 느릿느릿 쓸어내리는 손길이 뜨거웠다. 정원은 말없이 석주의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우리 처음이 아닌 거죠?"

"......."

이번에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하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을 테니까. 석주는 조용한 정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작게 소리 내어 웃더니, 자신 쪽으로 정원을 끌어당겼다.

곤란해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기억이 났으면 좋겠네."

정원의 손목을 끌어당긴 석주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차가 세워진 곳으로 향했다. 차 키의 버튼을 누르자 헤드라이트가 깜빡이며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뒷문을 연 석주가 정원을 차 안으로 밀어넣듯 몸을 숙였다. 정원이 팔다리를 써서 뒷좌석에 자리를 잡자, 정원을 따라 차 안으로 몸을 구겨 넣은 석주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차 안은 어두웠다. 달빛이 조금 새어 들어오는 것을 빼면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게 해 줄 약한 빛조차 없었다. 석주의 손이 옷을 들추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정원은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으로 팔을 뻗어 석주의 목에 팔을 감았다.

또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다음으로 이어질 일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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