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계단을 오르며, 준희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얼굴이 지친 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준희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가운 소매로 닦아 내며 힘겹게 발을 옮겼다. 정원의 형, 정윤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이런저런 테스트를 하느라 벌써 한참의 시간이 지나 버렸다.
그동안 석주와 정원은 뭘 하고 있었을까? 무슨 진전이라도 있었어야 할 텐데. 두 사람의 분위기는 나쁘다고 해야 할지, 좋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석주가 정원만 보면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이 준희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테프트 사장과의 일전이 있었던 날 이후.
석주는 기억을 잃었고, 정원은 그 사실에 자취를 감췄다. 준희는 석주가 기억을 잃은 것이 테프트 사장이 마지막에 어떤 못된 수작을 부리고 간 탓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정원의 형 정윤이 '죽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도 사장이 그에게 정체불명의 능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객관적인 시선이었다. 준희가 그동안 보아 온 강석주는 절대 자의로 '정원을 잊고 싶다'는 생각을 할 리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원이 느끼기에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석주가 자신만을 잊은 것이 석주의 무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그의 옆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자조하는 것 같았는데, 준희가 보기에는 그저 안타깝고 못마땅해 한숨이 나오는 상황일 뿐이었다.
정원이 떠난 뒤, 간단히 설명하기 힘들 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 석주는 사장을 쓰러뜨린 직후부터 국가 기관의 호출에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다. 그러다 결국 사장의 죽음이 알려지고, 사건을 묻기 위해 유 관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로는 더더욱 바빠졌다. 세계 최강의 에스퍼라고 불렸던 사장이 그의 손에 쓰러진 이상, 가장 강한 에스퍼라고 할 만한 사람은 이제 석주뿐이었다.
그러나 상황을 수습하고 쏟아지는 일거리를 처리하면서도 석주는 계속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어딘가 '비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아마도 그것이 국가 기관이 벌인 농간이라고 의심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가뜩이나 가이딩을 반기지 않던 사람이 아예 모든 가이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의심스러운 국가 기관이 보내 주는 가이드는 물론이고, 준희가 애써 찾아내 들이민 소속 없는 가이드들까지.
준희가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서, 믿을 만한 가이드와 손끝이라도 스치게 해 겨우겨우 폭주를 막아 놓고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석주가 무슨 의심을 하고 있든, 정말 정원을 잊어버린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한 가지는 자명했다. 없어진 기억 탓에 불안정한 데다, 가이딩을 거부하고, 사장과의 일전 이후 몸도 성치 않은 강석주는 조만간 폭주할 것이다. 하루빨리 기억을 되찾게 해 그의 상태를 안정시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원을 만나게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잠적한 사람을 꾸역꾸역 찾아왔지만.......
'...몹쓸 짓을 한 기분이긴 해.'
정원은 석주와 준희가 찾아온 뒤로 내내 편치 않은 기색이었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저걸 폭주하게 두면...... 어휴.'
"상상하기도 무섭네......."
"뭐가?"
준희의 혼잣말에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준희는 흠칫 놀라 비틀거렸다. 다행히 발을 헛디디기 전에 난간을 잡아 계단에서 구르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들자,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팔짱을 끼고 선 석주의 모습이 보였다.
인기척이 없어서 건물 밖에 나가 있는 줄 알았는데. 하긴 자신 같은 비능력자가 석주의 인기척을 읽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지만.
준희는 과장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뭐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정원 씨는요?"
"쉿."
"헉. 정원 씨한테 뭔 짓 한 건 아니죠? 가만 보면 정원 씨한테 너무 막 대하는 경향이 있어. 좋아하는 사람 괴롭히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말이에요. 그러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수가......."
"조용히 하라고."
막혔던 둑이 터져 나오듯 떠들어 대는 준희의 말을 석주가 가로막았다. 준희의 예리한 눈치가 뒤늦게 빛을 발했다. 이 이상 떠들면 안 될 거라는 예감이었다. 입을 다물고 주위를 살피자 그제야 석주가 예민하게 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냥 소파에 기대 선 줄 알았더니, 실은 지키고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석주의 뒤에 있는 소파에 정원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뭔 짓을.......'
정원의 모습을 확인한 뒤 조용히 고개를 든 준희가 석주의 표정을 살폈다.
'.....하긴 했구만.'
입가에 야비한 미소가 번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자신이 정윤을 데리고 씨름하는 사이 무슨 일이 있어서 분위기가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준희가 원했던 대로 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석주는 준희가 씰룩거리는 입가를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정원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였다. 심지어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정원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기까지 했다. 준희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속으로 숫자를 센 뒤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기억 돌아온 거예요?"
정원은 어느 모로 보나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게 잠이 든 상태였다. 그러나 석주는 정원이 깰까 봐 노심초사하는 것 같았으니, 준희 역시 일부러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석주는 준희 쪽을 힐끗 돌아보더니 성의 없게 대답했다.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돌아오기는 한 모양이었다.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준희를 보며 석주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궁금한 점이 많았다. 준희는 여전히 목소리를 최소한으로 줄인 채 빠르게 질문을 쏟아 냈다.
"어쩐지. 얼굴이 좋아 보이던데요? 지금 상태가 어때요? 기분은요? 폭주는 안 하는 것 맞죠?"
"조용히 하라니까... 이 사람 깨."
배려심이 넘치는 석주의 말에 새삼스럽게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준희는 애써 질색한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는 다시 정원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고 가기 싫다는 듯 애틋한 표정이었다. 다시 한 번 팔에 소름이 끼쳤지만, 이런 석주의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라 최선을 다해 내색하지 않았다.
간신히 정원에게서 눈을 돌린 석주가 준희를 바라보며 문가를 가리켰다. 나가서 이야기하자는 것 같았다.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준희에게는 다행이었다. 준희는 석주가 앞장서기도 전에 냉큼 문가로 달려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등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쉰 석주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지금 저 아래...... 못 나오게 해 둔 거 맞지?"
정윤이 지하실을 탈출할까 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준희는 가슴을 펴고 호언장담했다.
"당연하죠. 저 잠금 장치 제가 5년 동안 밤낮 없이 연구해서 만들었는데. 못 믿어요?"
"잠금 장치를 5년 동안 연구했다는 게......."
과장을 보탠 준희의 호언장담에 석주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희의 발걸음은 이미 문 밖으로 향해 있었다. 준희는 밖의 상황을 면밀히 살폈다.
'집안에서는 딱히 뭘 한 것 같진 않았는데.......'
준희의 시선이 닿은 곳은 세워져 있는 차였다. 도착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두 사람이 저곳에서 뭔가 대화를 나눴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속으로 납득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아 소리가 나지 않게 한 석주가 물었다.
"그래서. 지금 무슨 상태야?"
"아, 정원 씨 형이요?"
멀쩡한 이름을 두고 서먹하게 지칭하자, 석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언제 애틋했냐는 듯 냉정하게 변한 석주의 얼굴을 보니 꼼짝없이 일 이야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준희의 얼굴 역시 덩달아 진지해졌다.
"일단 사장이 뭔 짓을 해 둔 건 확실해요. 지금 몸 안에 남의 능력이 뭉쳐 있는 상태거든요."
에스퍼가 주입한 능력이 무슨 세포 덩어리도 아니고, 표현이 우습기는 했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어쨌거나 정윤의 몸을 죽은 사장의 능력이 감싸고 있다는 뜻은 전달이 되었기에, 석주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못 죽게 하는 능력 같은 것도 있었나."
그러고는 질린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기상천외한 방향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 자신도 마찬가지면서. 혼자 한 생각을 속으로만 삼키며, 준희가 마저 말했다.
"에스퍼 능력으로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능력 장치들을 이것저것 써 봤는데... 아무것도 통하는 게 없어요."
"내가 해도?"
"강도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일부러 에스퍼가 어떻게 할 수 없게 능력을 걸어 뒀나 봐요. 뭐, 저 같은 비능력자는 당연히 안 통하고요."
"그러면?"
석주가 얼굴을 찌푸린 채 물어 왔다. 그러면 그에게 걸려 있는 사장의 능력을 풀어낼 방법이 없냐는 뜻이었다.
"그렇게 죽이고 싶으세요?"
준희가 농담을 던졌다. 사실 농담을 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이어질 말이 무겁게 느껴져서 이렇게라도 분위기를 풀고 싶었다.
"그냥 혼자 못 죽고 끝나는 거면 다행이지. 세뇌나 폭탄 같은 걸 심어 뒀으면 곤란하니까."
석주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준희도 알고 있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정윤이 죽고 살고 하는 문제를 떠나, 사장이 걸어 둔 능력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게 더 문제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준희가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말인데요, 가이드가…… 그니까, 가이드만 풀 수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