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19화 (119/126)

119.

"가이드만 풀 수 있다고?"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석주가 물었다. 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떤 원리인지는 아직 명확하게 모르겠지만... 지금 저 사람 몸속에 있는 에스퍼의 능력을 가이딩으로 가라앉히는 개념인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준희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한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석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해. 아니, 있어."

"네?"

"분명 예전에......."

석주는 그대로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두통 때문이었다. 준희는 당황한 얼굴로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뭔가 떠올리려는 건가 싶어 잠자코 기다리자, 곧 차분해진 석주가 입을 열었다.

"생각났어. 전에... 정원 씨하고 같이 공항에 갔을 때, 에스퍼한테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있었거든."

"와, 소매치기 같은 것도 당해 봤어요?"

그럴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강석주 같은 이가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말은 퍽 흥미롭게 들렸다. 대놓고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짓던 준희는 석주의 냉랭한 표정에 곧 입을 다물고 집중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정원 씨가 그 녀석을 잡았어."

"정원 씨가요? 달리기로요? 석주 씨는 뭐 하고요."

준희의 악의 없는 물음에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석주가, 금세 그 질문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가이딩으로. 에스퍼가 그대로 쓰러져서 잠들던데."

"오......."

"그런 비슷한 개념인가?"

준희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딩을 그런 식으로 쓸 수 있단 건 처음 알았네요. 맞는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에스퍼의 능력을 가라앉혀서, 정윤 씨한테 걸려 있는 능력을 푸는 거죠."

"본인도 가이드인데, 본인이 풀 수는 없는 거고?"

"아마도요. 실험 장치로 에스퍼 능력을 주입했을 땐 아무 반응이 없었고, 가이드 능력을 주입했을 때 반응이 있었는데, 본인 능력에는 또 반응이 없었어요. 일부러 그렇게 해 둔 것 같아요."

말이 없는 석주의 얼굴을 힐끗 살핀 뒤, 준희가 조금 씁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렇게까지 해 둔 걸 보면... 저 사람이 다른 에스퍼한테 이용당하려는 걸 막으려던 거겠죠? 테프트 사장은 사람도 도구 취급하는 인간이었는데, 저 사람... 정윤한테는 그래도 좀 애착이 있었던 건가 싶어요. 진심으로 아낀 것처럼 장치를 해 뒀으니까요."

잠자코 준희의 말을 듣던 석주가 대꾸했다.

"왜, 불쌍하기라도 해?"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그냥...... 그렇단 거죠."

왠지 기분이 묘해서요. 덧붙이는 준희의 말을 듣고 석주는 표정 없이 눈을 돌렸다. 더 이상 생각에 잠길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듯, 바로 질문이 이어졌다.

"어떻게 할 거야."

"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준희가 당황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능력을 풀 방법은 알아냈지만 정윤의 처분은 그녀 자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전 오히려 석주 씨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요. 어떻게 할 건지. 능력 풀어서 죽일 거예요? 아니면 저대로 센터에 데려가서 가둬 두는 게 좋을까요?"

"......."

석주는 생각에 잠긴 듯 대답하지 않았다. 준희도 눈치껏 더 말을 붙이지 않고, 괜히 발을 움직여 흙바닥을 툭툭 두드리기만 했다. 짧지 않은 침묵 끝에 석주가 문득 말했다.

"느낌이 안 좋아."

미처 네?라고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문 쪽으로 달려간 석주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기 때문이었다. 순간 준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설마!'

그사이 정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자신이 지하실의 문단속을 제대로 했던가? 아차 싶은 생각에 빠르게 석주를 따라 가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정원은.......

"에엥? 잘 있는데요."

준희의 입에서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정원은 어느새 깨어났는지 소파에 앉아 멀뚱히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주의 느낌이 빗나갈 리 없다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었는데, 그가 실수할 때도 있구나 싶었다.

석주는 준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곤 정원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눈이 난감한 듯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이 준희의 눈에도 분명히 보였다.

'내외하는 건가?'

힐끗 석주의 얼굴을 바라보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정원이 시선을 피하건 말건 개의치 않는 듯했다.

"몸은."

"......예?"

석주의 입에서 딱딱한 단어 한마디가 툭 튀어 나갔다. 원래는 제법 사근사근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왜 저러는 건지, 지켜보는 준희가 다 의아할 지경이었다.

"괜찮냐고요."

"아......."

어쩐지 지켜보기 답답한 대화였다. 석주는 평소답지 않게 퉁명스러운 모습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기분이 좋지 않은 건가 싶은 모습이었지만, 준희의 눈에는 어쩐지 어쩔 줄 몰라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정원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석주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듯 머쓱하게 목뒤를 매만지다가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강석주 씨야말로 이젠 좀 나아지셨나요."

석주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마음이 불편했다. 두 사람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던 준희는 곧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들릴락 말락 작게 중얼거렸다.

"전 그럼 일 좀 하고 있겠습니다. 편히 대화하시길......."

로봇처럼 뻣뻣한 말투였다. 후다닥 계단을 내려간 준희는 그대로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 * *

"......그래서, 난 어떻게 할지는 정원 씨한테 맡기는 게 맞다고 봐요."

"......저한테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이 정도면 분위기가 나아졌을 거라는 생각에 준희는 다시 지하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차분한 말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와 보니 두 사람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분명히 둘이 뭔가 있었는데. 분위기가 왜 이렇게 딱딱해?'

이쯤이면 '기억이 돌아왔어요!', '이제 절 알아보시겠어요?'로 시작해 서로 마음을 고백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라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강석주는 진지하게 고백을 하기는커녕, 방금 준희 자신이 전달해 주었던 사무적인 내용을 그대로 읊어 주기만 한 것 같았다.

끼어들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정원이 겨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말씀드려야 할까요?"

"......."

말이 없는 석주를 대신해 준희가 나섰다.

"그런 건 아니에요!"

석주와 정원이 동시에 준희 쪽을 돌아보았다. 석주가 왜 나왔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차분하게 생각해 보셔야죠. 제가 생각하기에도 정원 씨가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망설이던 정원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실은 형을 한번 보고,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

"......."

"형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도 물어보고 싶고요."

그렇게 말한 정원은 곧 꼭 들어줄 필요는 없다며, 힘든 부탁이라는 걸 안다고 덧붙였다. 준희는 힐끗 석주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석주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하고 나설 거라고 생각했던 석주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역시 정원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겠다는 건가? 속으로 그런 놀림 가득한 생각을 한 준희는 짐짓 진지한 척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정원은 고개를 숙인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 * *

'아셨죠? 혹시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바로 이 버튼을 누르세요! 그럼 석주 씨가 튀어갈 거예요.'

정원은 다시 한번 손 안에 든 것을 만지작거렸다. 준희가 신신당부와 함께 건네준 작은 버튼 장치였다. 방 안에는 의자에 구속된 형이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탓에 잠이 든 건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더니 정원과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원아."

놀랍도록 독기가 빠져나간 목소리였다. 흠칫 놀란 정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형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다시 눈을 내리깐 채 힘없이 웃었다.

"왔구나.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 너한테 할 말이 있었거든."

정원은 머릿속으로 이어질 그의 말을 상상하며,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당연하게도, 자신에게 걸려 있는 사장의 능력을 풀어 달라는 부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말이 없던 형이 곧 먹먹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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