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20화 (120/126)

120.

환자복 같은 옷을 입고 의자에 묶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정윤은 저절로 동정심이 들 만큼 불쌍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세 사람, 즉 정원과 석주와 준희는 표정 변화 없이 냉랭한 얼굴이었다.

화면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석주와 준희는 그렇다 쳐도 현장에서 형의 불쌍한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하는 정원에게는 정신적인 타격이 제법 클 터였다. 때문에 석주와 준희가 신경을 쏟는 것도 정윤의 수척한 모습보다는 그걸 지켜보고 있는 정원의 상태였다.

정원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정윤의 말은 잠시 사이를 두고 계속 이어졌다.

“너한테 정말 몹쓸 짓을 했다는 거…… 알아. 이렇게 사과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꼭 말을 하고 싶었어.”

“…….”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

“우린 이제 가족이라고는 서로밖에 없는 사이인데… 내가 그러면 안 됐던 거야.”

정원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형이 사과부터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형의 말은 낯설고 얼떨떨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정원이 형의 반응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형을 그만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뿐인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떨어져 지낸 세월이 훨씬 더 길었다. 그 시간 내내 형을 생각한 정원과 달리, 아마 형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 사과를 들으며 조금은 마음이 약해졌다. 그 사실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정원이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들은 것은 그 사과를 받아 주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씁쓸함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윤은 한참이나 말이 없는 정원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들었다. 정원은 그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대답했다.

“그렇게 말해도 내가 형을 믿을 수는 없어.”

“…알아.”

고저 없는 목소리에 정윤이 씁쓸하게 웃었다. 혹시 정말로 진심인 게 아닐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잠시 멈칫한 정원은 곧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도 그냥, 그런 생각밖에 안 들어. 그 능력을 풀어 줄 사람이 달리 없어서 나한테 이러는구나.”

“그것도 알아.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어.”

고개를 숙인 정윤의 모습은 방금 전보다도 더 애처롭고 기운 없게 보였다. 정원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그는 조급해진 것 같았다. 번쩍 눈을 들며 외친 것이다.

“설명할 기회를 줘.”

정원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해 보라는 듯 가만히 앉아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정윤은 회상하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너는 잘 모르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며.”

정원이 덤덤한 투로 말을 끊었다. 여기서 말을 끊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정윤이 흠칫했다.

“그 얘길 하려던 거야? 우리 부모님이 나쁜 사람이었고, 그래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라고? 그런 해명이라면 더 안 해도 알 것 같은데.”

“그건……!”

“…….”

“…그냥 그런 수준이 아니었어! 그냥 좋은 사람이 아니라거나, 나쁜 사람이라거나 하는 말로 표현하고 넘어갈 정도가 아니었다고……. 난 S급 가이드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매일같이, 밤낮없이 혹사당했어.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해도 그때 내 몸은 평범한 어린애였다고.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몸이 아니었어…….”

그 말을 하는 정윤의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역시나 불쌍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정원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든 정원이 이해해야 할 부분은 아니었다. 정원은 마음대로 그를 미워해도 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 바 아니야’라고 대답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 설명 안 해도 된다는 게 듣기 싫다는 뜻은 아니었어.”

“…뭐?”

“형 말은 이해해. 그때 형이 무슨 마음이었는지도 알겠어. 우리 부모님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는 것도 알겠어. 형이 어떤 사정이었든 부모님을 죽였으니 저주하겠다거나… 그렇게 생각할 리도 없고.”

“…….”

“그러니까 왜 그랬는지 나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

대부분 진심이었다. 정윤의 사정은 듣지 않아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미웠다는 것도, 그래서 사장을 따르기로 했다는 것도, 정원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는 것도. 하나뿐인 형이 자신을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가슴이 아팠지만, 그걸 물고 늘어질수록 자신만 비참해질 뿐이었다.

정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게 다면 이제 일어날게. 확인할 건 다 했어.”

“뭘… 뭘 다 확인했다는 건데?”

형이 망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 대답해 줄 이유는 없었지만 정원은 신중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형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알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상관없을 것 같아. 대신… 이제 내가 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겠어.”

“…….”

정윤은 정원이 그를 어떻게 생각한다는 건지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차마 그걸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정원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형이 바라는 건 내가 형한테 걸린 저주를 풀고 죽을 수 있게 도와주는 거지?”

대답은 기다리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바로 대답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냐.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볼게. 석주 씨나 준희 씨가 형을 죽게 둬도 상관없다고 하면 도와줄게.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대로 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을 마친 정원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굳이 또 뒤를 돌아보아야 하나. 그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정윤이 절박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더 했다.

“사과는…… 사과는 듣고 가!”

사과라면 벌써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하고 발을 옮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잠시 멈칫한 사이 정윤의 말이 빠르게 쏟아져 나왔다.

“정말 미안해. 내가 그랬으니까 이해해 달라고 하려던 게 아니야. 그냥 너한테……! 너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어. 아무리 내가 괴로웠어도 너한테 그러면 안 됐던 건데.”

“…….”

“네가 중요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아냐. 나한테도… 나한테도 원이 너는 중요했어. 소중한 동생이었어. 하지만…… 하지만 사장님의 말을 어길 수는 없었어. 그분은 나한테 절대적이었으니까.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으니까…….”

정윤의 목소리는 어느덧 흐느끼는 것처럼 변해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

“내가 널 찾았으면… 그래서 우리 서로 기댈 수 있는 사이가 됐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정윤의 목소리는 후회와 회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원은 그때까지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에도 변동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괴로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형의 말에 결국 등을 돌려 바라보자, 눈물로 젖은 비참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원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가까이 와 주면 안 될까.”

흐느끼는 목소리를 들은 정원은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정윤은 묶인 팔을 뻗고 싶은 듯 애처롭게 움직였다. 포옹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정원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잠시 생각하던 끝에, 정원은 그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가이드의 능력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가이드를 상대로 가이딩을 하는 것은 원래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느껴졌다. 형의 안에 있는 사장의 능력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두둑!’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형을 묶고 있던 구속이 풀어지는 소리였다. 정원이 미처 물러서기도 전 정윤은 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정원의 목을 끌어안고 늘어졌다. 방금 전 자신이 했던 것처럼, 정윤이 자신을 향해 가이딩 능력을 쏟아내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형은 또 자신을 배신한 것이다.

“너 정말 순진하기 짝이 없구나.”

“…….”

“네 몸에 있는 폭탄, 어떻게 작동하는지… 내가 알아 왔거든.”

독을 품은 듯한 목소리였다. 그런 형과 눈이 마주치고, 정원은…….

작게 웃었다.

“뭐… 뭐야. 왜…… 왜 웃는 건데?”

“…….”

“대답해. 왜 웃는 거냐고!”

귓가에서 긴박한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유 관장이 심어 준 폭탄이 작동하는 소리였다. 정원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형이 이럴 줄 알았어.”

“알았다고?”

“방법까지야 몰랐지만…….”

“알았으면 왜!”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 씨!’ 하고 절박하게 부르는 목소리도 들렸다. 귀 속에서 들리는 째깍째깍 소리가 점점 커지는 와중에도 석주의 목소리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상할 만큼 후련한 기분이었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동시에 귀 속에서 들리던 초침 소리도 끝이 났다.

폭발 직전…… 석주와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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