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21화 (121/126)

121.

악몽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상황도 그랬지만, 어딘가 붕 떠 있는 듯한 감각이 그런 감각을 더 강화시켰다.

한눈을 팔았나? 그렇지는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정원과 정윤의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CCTV로부터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은 석주는 당연하고, 그 옆에 앉아 있던 준희조차 둘에게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도…….

‘방심했어!’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비참할 정도였다.

설마 정윤에게 그런 수가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정원을 만나게 하면서 몸 수색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정원을 해칠 무기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만든 것인데, 설마 이런 대규모의 폭발을 일으킬 방법이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곤란하다고 느낀 이유는 또 따로 있었다.

정원이 이렇게 반응할 줄 몰랐던 것이다.

석주의 기억이 어느 정도 돌아온 것 같다는 이유로 무심코 안심했나 보다. 정원을 대하는 석주의 태도가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이젠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정원이 어떤 상태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한 발짝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던 자신들과 달리, 정원은 더 빨리 알았을 것이다. 정윤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를. 아마 그가 이상을 눈치채자마자 약속대로 석주를 불렀다면, 폭발이 일어나기 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자신과 함께 죽으려고 덤벼드는 정윤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다는 뜻인가.

하지만 준희는 빠르게 고개를 털어 내 씁쓸한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왔다. 당장은 수습이 먼저였다. 폭발과 함께 바닥을 굴렀던 준희는 겨우 몸을 일으켜 정원과 석주가 있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석주는 정원의 이상을 알아채자마자 달려왔다. 준희가 허겁지겁 따라왔을 때에는 그가 이미 열리지 않는 문을 완력으로 부순 다음이었다. 벌컥 열린 문틈으로 따라 들어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다. 문 밖에 있던 준희까지 나동그라질 만한 위력이었다. 그렇다는 건 정원과 정윤은…….

불길한 예감을 삼키며, 준희는 겨우 고개를 움직였다. 주위를 둘러보자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채 누워 있는 정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석…….”

석주 씨, 하고 부르려던 준희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폭발로 인한 연기 속에서 석주의 뒷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축 늘어진 누군가의 몸을 안아 든 채 서 있었다. 준희의 시선이 빠르게 바닥과 그곳을 오갔다. 누워 있는 것은 틀림없이 정윤이었다. 석주가 안아 든 것이 정원의 몸이라는 것 정도는 바로 알아챘다.

그 뒷모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석주를 보며 두려움을 느낀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위험을 느낀 것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정원이 잘못되었다면 준희 자신 역시 잘못될 거라는, 오싹한 확신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준희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주춤거렸다. 이대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준희는 남아 있는 책임감으로 그런 생각을 간신히 뿌리쳤다. 머뭇머뭇 그들의 옆으로 다가간 뒤, 안겨 있는 정원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는 정윤과 똑같이 먼지를 뒤집어쓴 상태였다. 얼굴에 난 생채기는 정윤보다 오히려 심한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준희가 정원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겨우 다시 눈을 떴다. 그 순간 정원의 손끝이 꿈틀거렸다.

“사, 살아 있어요!”

준희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석주는 준희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정원의 몸을 보호하듯 끌어안더니, 그대로 입속으로 무슨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한 거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텔레포트 능력을 사용한 것인지, 석주와 정원의 몸이 그 자리에서 빠르게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준희가 닭살이 돋은 팔을 쓸어 내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공포에서 어느 정도 빠져나온 뒤에야 그 자리를 제대로 둘러볼 수 있었다. 턱을 짚은 채 생각에 잠긴 준희가 결론을 내렸다.

‘폭탄 같은 건 없었어. 그렇다는 건 체내에서 일어난 폭발이라는 건데…….’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정윤에게로 걸어갔다. 정원과는 달리 미동도 없는 몸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맥을 짚어 보았다.

잠잠했다.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만족하려나, 뜻대로 돼서…….”

그토록 사장을 따라가고 싶어 했으니, 이렇게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걸로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에 죽은 정윤의 얼굴은 영 편치 않아 보였다. 표정은 잔뜩 일그러진 채였고, 눈은 크게 뜨인 채 감지도 못했다.

무슨 사정이 있었든, 이 남자는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도주한 뒤 테프트의 사장을 도와 온갖 악행을 일삼은 사람이었다. 그를 동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준희는 쪼그려 앉은 채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괴롭게 뜨인 눈을 감겨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준희가 찌뿌듯한 몸을 쭉 뻗었다.

“보자, 이제 따라가야 하는데…….”

어디로 갔으려나.

석주의 머릿속은 바로 읽을 수 없으니, 그를 쫓아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터였다. 또 한 번 한숨을 내쉰 준희가 주머니 속 차키를 확인하고 지하실을 나섰다.

싸늘하게 식은 정윤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만면에 여전히 의문을 가득 품은 채로.

* * *

한국 이능력 국가 기관은 근래 들어 전에 없던 혼란에 빠져 있었다.

본래 국가 기관의 수장은 유 관장이었다. 그가 마냥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가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항상 인력난에 시달리는 국가 기관을 멀쩡히 돌아가도록 유지하며 발전시킨 공은 분명했으니까.

그런 유 관장이 최근 자리에서 물러났다. 테프트의 사장이 꾸민 흉계에 그가 엮여 있었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진해서 관장의 자리를 내려놓았지만, 국가에서 꼬리를 자르기 위해 유 관장을 쳐냈다는 것은 기관 사람이라면 거의 다 알음알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유 관장이 물러났다고 해도 국가 기관이 한순간에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문제였다. 쏟아지는 비난과 문의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 관장의 빈자리를 메워야 해서 할 일은 오히려 배로 늘었다. 그나마 국가 기관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강석주의 공이었다.

강석주.

세계 최강의 에스퍼라고 불리던 테프트의 사장을 그 손으로 죽이고, 지금은 국가 기관을 거의 완전히 장악한 남자. 테프트의 사장이 그의 손에 죽은 이상, 이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불릴 수 있는 에스퍼는 그뿐이었다.

기관 내에서 강석주의 존재를 알고 있던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가 원래부터 국가 기관 소속이었다며 뜬금없이 나타났을 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많았다. 그러나 기관이 그나마 비난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은 강석주의 존재 덕분이었고, 따라서 그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며칠 전까지는.

“아직도 소식 없어?!”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문제는 오직 한 가지, 난데없이 사라진 강석주가 소식 없이 며칠째 자리를 비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관에서 현재 관장 대리를 맡고 있는 박성범은 발을 동동 구르며 직원들을 채근했다. 그래 봤자 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고, 사라진 강석주가 뿅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지만.

“대체 어딜 간 거야. 설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박성범이 이를 꽉 물었다.

‘기억 때문인가?’

강석주가 기억을 잃었다는 건 그와 연구원들 사이의 비밀이었다. 국가 기관 소속 가이드였던 정원과 강석주가 파트너였다는 것은 유 관장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장을 물리친 뒤 돌아온 강석주는 파트너였던 정원에 대한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박성범이나 다른 연구원들이 알 턱이 없었다. 그래도 파트너를 잊었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강석주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스퍼였다. 자신들이 쉬쉬하며 비밀을 지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그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이 나은 건가? 박성범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서, 선생님!”

“뭐야?!”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연구원이 뛰어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박성범이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강석주가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인데, 왜 저렇게 사색이 되어 있다는 말인가?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 그런데 그 가이드…… 정원이랑 같이 있습니다.”

“……결국 그렇게 됐구만.”

내내 불안해하던 일이지만, 오히려 올 게 왔다는 심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원 본인이 함께 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국가 기관에 충성심이 깊은 이였으니, 어쩌면 파트너인 강석주를 말려 줄지도 모른다.

“그, 그런데…….”

“뭐가 또 있나?!”

연구원이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지금 거의 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강석주는 폭주 직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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