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24화 (124/126)

124.

석주의 눈은 본래 들여다보고 있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게 특징이었다. 도무지 읽기 힘든 것은 그만큼 신중하고 깊은 눈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지금은 굳이 알아내려 애쓰지 않아도 그 눈에 담긴 게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눈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은 혼란과 기대. 보고 있으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건 정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겨우 눈을 떠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떨리는 눈동자의 석주를 보자마자 바로 그를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만 것이었다.

석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눈으로 정원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번에 깨어나기 전이었다면 그 대답 없는 모습을 최대한 부정적인 쪽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사경을 헤매다 깨어났기 때문일까. 자신이 정확히 얼마 동안 잠들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정원은 그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과, 그사이 석주가 느꼈을 기분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멋대로 결론을 내리는 대신 다시 물었다. ‘당신은요.’를 조금 더 성의 있게 풀어 말한 것이었다.

“강석주 씨는요. 제가 기억이 나시나요?”

“……그럼요.”

석주의 목소리에 물기가 잔뜩 섞여 있었다. 간신히 대꾸한 그가 그대로 정원의 손을 끌어다 얼굴을 묻었다. 순순히 내준 손에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석주와 닿은 자리가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는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정원이 생각한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사과를 해야겠다는 것.

“미안해요.”

그러나 그 말이 나온 것은 정원이 아닌 석주의 입이었다.

“뭐가 미안한가요…….”

저절로 그 대답이 흘러나왔다. 진심으로 의문을 담아서.

정원이 사과하려 했던 것은 그를 이렇게 불안하고 괴롭게 만든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정원 자신이 너무 쉽게 삶을 놓아 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석주는 누구보다 괴로웠을 테니까.

만약 석주가 폭발에 휘말리는 것을 보아야 했던 쪽이 정원이고, 그 결과로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 석주를 보아야 했다면?

미치지나 않았으면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분명 그 순간에는 그리 생각했었다. 이거면 됐다고. 형이 결국 마지막까지 자신을 속였다는 걸, 그러니 더는 그런 형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대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석주를 이렇게 남겨 놓지는 말았어야 했다.

“내가 감히…… 정원 씨를 잊어버렸던 거.”

“…….”

그러나 이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원은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바로 그 자신을 부르라고 했던 말을 지키지 않았다. 그 사실을 탓해도 좋을 텐데,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오로지 자책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건지 짐작도 못 하겠어요. 나 하나로 다 못 담을 만큼 정원 씨가 나한테 중요해서…… 그래서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건가. 싶기도 하고.”

“생각이 난다는 건 기억이 전부 다 돌아왔다는 뜻이죠.”

천천히 입을 연 정원이 물었다. 석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분한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내가 싫지 않나요.”

“정원 씨가 뭘 잘못했다고 그런 소리를 해요.”

석주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조금 노기가 섞여 들었다. 그를 오늘 처음으로 화내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그 말이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뭉클했다.

“다른 사람 같아요.”

“……네?”

“기억이 없을 때랑.”

정원이 말하자, 석주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물들었다. 그를 비난하고 있는 거라고 착각이라도 한 것일까.

“이리 가까이 와 주세요.”

크지 않은 목소리로 나온 부탁이었다. 본디 정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경우는 잘 없었다. 냉랭하게 떨어질 것을 요청할 수는 있어도, 애틋하게 다가올 것을 부탁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능력을 가진 에스퍼는 정원의 부탁에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몸을 숙여 왔다. 힘없는 어린아이처럼. 가까이 다가온 석주의 얼굴을 본 뒤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따끈한 체온과 이미 맡아 본 적 있는 체향이 정원에게로 물씬 끼쳐 왔다.

시원하면서도 조용하고, 청량하면서도 무거운 향. 강석주라는 사람과 맞춘 것처럼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목을 끌어안자 석주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원은 그 상태 그대로 석주의 얼굴에 어깨를 묻었다. 완전히 긴장을 풀고, 오로지 그에게 모든 것을 내맡긴 사람처럼.

“힘들었어요. 날 잊었을 때.”

“…….”

“자책도 많이 했지만, 석주 씨가 야속하기도 했고…….”

“…….”

“그래서 지금 기뻐요.”

이렇게 솔직한 심정을 표현한 적이 있던가.

얼떨떨하게 정원을 마주 안았던 석주의 팔에 점차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함을 느끼라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여전히 정원은 사과할 사람은 그가 아닌 자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잘못했어요.”

“……뭘요.”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이렇게…… 이렇게 버젓이 기다리고 있는데.”

석주의 떨리는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 왔다. 자신이 감히 그를 아이처럼 느껴도 되는 건가 싶다. 하지만 그만큼 소중하게 느껴졌다. 석주를 틈 없이 꼭 안은 정원이 다짐하듯 대꾸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석주 씨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나를 당신만큼 중요하게 생각할게요.”

정원에게 있어 그 자신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도박 같은 짓을 벌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은 석주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런 강석주가 아끼는 자신이라면.

그러면 자신을 조금 아끼고 싶어질 것 같았다.

“강석주 씨랑 같이 살고 싶어요.”

이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 망설였던 감정이 결국 정원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랬다. 정원은 석주와 함께 살고 싶었다. 단순히 함께하고 싶다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복수 이후의 미래를 생각해 본 적 없는 정원이 처음으로 품어 본 생각이었다.

떨려 오는 석주의 몸을 느끼며, 정원은 그대로 마저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것 같아요.”

“…….”

“아니…… 사랑해요.”

석주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저 정원의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이를 악문 석주가 그대로 붙어 있던 몸을 떼어 내더니 다시 가까이 붙였다. 그대로 입술이 맞닿았다. 말캉한 감촉은 기억하던 것과 똑같았지만, 그의 입술이 전과 달리 퍼석하게 말라 있다는 사실은 큰 차이였다. 정원의 눈가가 살짝 찡그려졌다. 그를 이런 상태로 만든 것 역시 자신이라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석주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자책은 금세 잊힌다. 입속으로 파고든 혀가 뜨거웠다. 석주는 꼭 정원을 지금 당장 완전히 삼킨 뒤 그의 안에서 하나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사람처럼, 정원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치고 싶은 사람처럼 파고들고 있었다. 어느덧 병상 위로 완전히 눕혀진 몸은 석주에게만 모든 것을 의지한 채 힘없이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석주의 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정원을 모조리 발라 먹어 버릴 것 같은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 서두르지 않았다. 느리고 확실한 손길이 정원을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입술과 뺨, 그리고 목을 거쳐 어깨에 닿은 손길은 유혹인지 위로인지 모를 색을 띠고 같은 자리를 매만진다.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 때문이었지만…… 그동안 여행하면서 많은 델 다녀 봤어요.”

차분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정원은 소리 내 대답하는 대신 석주의 손을 잡았다. 불거진 손마디를 더듬고 있으면 그의 말은 차분하게 이어진다.

“관광지에서 프로포즈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게 무슨 심정일까 완벽하게 이해한 적은 없었지만…… 그러면서 정원 씨 생각을 한 적은 많았고요.”

“…….”

“그러니까, 같이 가고 싶어요.”

“어디를?”

“어디가 됐든지…….”

말을 마친 석주는 정원의 위로 곧장 몸을 겹쳐 왔다. 묵직하면서도 가벼운 무게가 쏟아져 정원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반사적으로 손을 올린 정원이 간지러운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나도 사랑해요.”

긴 시간을 돌고 돌아서, 마침내 석주로부터 다시 이 말이 나왔다. 질끈 눈을 감은 정원은 그대로 다시 석주를 끌어안았다. 작게 속삭이는 석주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병실 안을 채웠다.

고마워요.

다시 와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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