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커피를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커피 볶는 향을 너무 많이 맡으면 신물을 내게 된다. 도심의 유명 커피 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지 한 달이 된 에밀리아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르바이트란 원래 지루하기 짝이 없는 루틴과, 그 사이에 종종 끼어드는 진상 고객이 조화를 이뤄 사람을 지긋지긋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에밀리아에게는 가끔 오는 흥미로운 고객을 만나는 것이 출근할 때의 유일한 낙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오늘은 시작부터 징조가 꽤나 좋은 날이었다. 근래 본 사람들 중에서도 손에 꼽게 그녀의 흥미를 끄는 고객이 매장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눈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연한 하늘색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었다. 아주 신경 쓴 것 같지는 않은 차림임에도 모델처럼 맵시가 살아 있다. 키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혼자 삐쭉 솟은 것처럼 보일 만큼 컸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메뉴판을 바라보는 얼굴은 언뜻 보기에도 갸름하고 날렵했다.
에밀리아는 지대한 관심을 품은 얼굴로 고객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단, 불쾌하지는 않아야 하니 너무 티가 나고 집요해 보이지는 않는 눈길로.
이 나라 사람 같지는 않은 얼굴이니 관광객인가? 그러나 그가 이곳에 서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이질적이지 않고, 꼭 그림에 그려 넣은 것처럼 잘 어울리는 걸 보니 이 나라에 오래 산 사람 같기도 했다.
아니, 사실 어떤 곳에 데려다 놓아도 그림이 될 사람으로 보이기는 한다.
에밀리아가 그를 관찰하는 동안 내내 메뉴판을 읽고 있던 그가 어느 순간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여기 할라피뇨랑 딸기잼이 들어간다는 핫도그 메뉴가 뭔가요?”
능숙한 발음. 최소한 이 나라에 오래 산 사람은 맞을 것 같다는 추측에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할라피뇨에 딸기잼이 들어간 핫도그. 듣기에는 괴식 같지만 이 카페에서 내세우는 대표 메뉴였다. 묘하게 중독되는 맛을 가진 탓에 명물 같은 것이 되어 찾는 사람도 많았다.
얼른 손을 뻗어 스트로피뇨라는 메뉴 이름을 가리키자, 고심하던 남자는 커피 두 잔과 문제의 스트로피뇨 핫도그, 그리고 무난한 플레인 핫도그를 하나씩 주문했다.
‘일행이 있나?’
아르바이트생이 자꾸 자신을 힐끗거린다는 사실을 알아챈 걸까? 남자가 에밀리아 쪽을 휙 돌아보았다. 그제야 선글라스 너머로 색이 옅은 눈동자를 언뜻 볼 수 있었다. 움찔하며 바로 눈을 피하려 했는데, 의외로 그는 입을 열어 기꺼이 스몰토크에 응했다.
“애인이 이 나라 여행은 처음이라는데, 여기 핫도그가 꼭 먹어 보고 싶었나 봐요.”
아, 애인이 있구나.
아주 짧은 순간 실망 비슷한 감정이 들었지만, 에밀리아는 곧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런 얼굴에 애인이 없는 것도 이상하지. 선글라스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보통이 아닌 미남이라는 것 정도는 바로 알 수 있는 외모였다. 머릿속으로 저런 남자의 애인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며 입으로는 착실하게 영업 문구를 늘어놓았다.
이 핫도그는 제법 유명해서 일찍 소진되는 경우도 많은 한정 판매 상품이며, 그러니 일찍 온 것이 잘된 일이라고. 분명 애인도 좋아할 거라고 말이다. 그러자 어느 순간에도 여유 넘칠 것 같던 남자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는 것이 보였다.
“그거 잘됐네요. 자는 동안 서프라이즈로 사러 온 건데.”
세상에. 상상 이상으로 젠틀한 반응이 아닌가.
에밀리아는 이번에도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얼굴값을 하는 남자가 많다고 하지만, 에밀리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얼굴값을 하는 건 오히려 어정쩡한 얼굴일 때의 얘기다. 정말 범접할 수 없는 미남인 경우에는 오히려 바른 정신이 깃든다.
딱히 신빙성이 있는 이론은 아니었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 덕에 그린 듯한 예시를 만들 수 있을 듯했다. 친구들을 주르륵 세워 놓고 ‘봐라! 눈앞의 이 남자가 살아 있는 예시 아니냐.’라고 하면 모두가 납득할 터였다…….
머릿속으로 그런 실없는 상상을 하며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핫도그를 조리하고 있는데, 어쩐지 매장 바깥이 소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소란을 느낀 것인지 매장 안의 손님들도 문에 붙어 바깥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투명한 문 밖에서 혼비백산한 남자 하나가 달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한 뒤 이곳은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문을 열고 후다닥 안으로 들어왔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그가 외쳤다.
“테러다! 에스퍼가 테러를 일으켰어!”
“뭐라고?”
“테러래! 세상에…….”
“이거 봐, 에스퍼 세 명이 시내를 습격해서……!’
순식간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매장 안을 가득 메웠다.
핫도그를 만들던 에밀리아의 손이 일순 멈췄다. 테러라고? 에스퍼가 테러를 일으켰다는 말인가? 뉴스에서야 자주 접하던 일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 직접 놓였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저절로 하얘졌다. 당황한 에밀리아가 매장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매장 바깥에서는 테러를 일으킨 에스퍼가 활개를 치고 있는 것 같으니, 도망을 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유롭게 마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일행끼리 부둥켜안고 떨거나,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는 중이었다.
‘어쩌지? 안심시켜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어쩔 줄 모르는 사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에밀리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에밀리아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계산대를 두드린 뒤 한쪽 팔을 걸친 남자가 부른 소리인 듯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안 거지?’
순간 멍해졌지만, 곧 자신이 명찰을 달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남자는 말을 붙여 놓고 바깥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네?”
멍하니 대답하자 그가 곧장 물었다.
“핫도그 하나 다 되는 데 보통 얼마나 걸려요?”
“…….”
순간 에밀리아의 얼굴이 배신감 아닌 배신감으로 물들었다. 방금까지 역시 바른 얼굴에 바른 정신이 깃드는 거라며, 애인을 위해 몰래 핫도그를 산 남자를 칭찬했는데.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핫도그를 빨리 만들라며 재촉하는 사람이었다니!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잠시뿐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방금 팔던 커피를 팔아야 한다’는 사장의 말을 떠올린 에밀리아가 만들던 핫도그를 확인했다.
“앞으로 5분 정도면 완성될 것 같아요.”
“5분?”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등을 돌렸다.
“안 식게 가져가려면 서둘러야겠네요.”
“네?”
그는 겁에 질린 사람들 틈을 능숙하게 빠져나갔다. 방금 전 뛰쳐 들어왔던 이가 당황한 듯 그를 잡았다.
"이, 이봐! 밖에는 지금......!"
그를 힐끗 본 손님은 가볍게 웃더니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더 만류하기도 전 폭발음이 들려 왔다. 에밀리아는 짧은 비명과 함께 계산대 밑으로 몸을 숨겼다.
"꼼짝 마! 움직이면 다 죽을 줄 알아!"
테러범의 전형 같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슬쩍 몸을 일으켜 살펴보니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얼굴도 가리지 않은 에스퍼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서 무슨 회오리바람 같은 것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에스퍼라는 사실을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필이면 왜 하고 많은 상점들을 두고 이곳이라는 말인가? 사색이 된 에밀리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테러를 일으킨 에스퍼들이 금전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돈을 내주면 돌아온 점장님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자신을 해고하지 않을까? 아니, 그래도 일단은 살고 봐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머릿속으로 '전부 드리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이라고 말하는 부분까지 시뮬레이션을 마친 에밀리아가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였다.
"어......?"
알고 보니 얼굴값을 한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테러범 에스퍼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위험해요!' 하고 외치기도 전, 그는 이미 테러범의 어깨를 손으로 짚은 채였다. 이런 소란 속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 크게 들릴 리 없는데도, 그가 말하는 소리는 이상할 만큼 크게 들렸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바쁜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죠."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러범은 공중에 떠올랐다. 말 그대로 날아오른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저것도 에스퍼의 능력인가, 하는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날아간 테러범이 건너편에 있는 햄버거 가게의 벽에 쾅 처박힌 탓이었다. 당황한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러면 건물 부서지는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에밀리아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을 때였다.
대체 어느새 나타난 것인지, 에밀리아의 바로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네?!"
"언제부터 날뛰고 있었던 건가요? 저 사람."
모르는 남자의 차분한 눈길이 에밀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